한국 재난 영화들의 문제점과 발전의 여지
모든 것이 붕괴하고, 세상이 리셋되는 재난영화는 관객에게 가장 강렬한 관람 쾌감을 제공하는 장르다.
거대한 파괴, 생존을 향한 질주, 극한 상황 속에서의 감정 소모. 이 모든 것이 결합되어 재난영화는 극장에서 가장 '체험적인' 장르로 자리 잡았다.
대부분의 관객이 이 장르를 선호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한 오락성을 넘어서, 재난영화는 오감을 자극하고 관객에게 공포와 집단적 생존 본능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재난영화를 보다 보면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기게 된다.
바로, ‘군인’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권력 전체가 부재하다. 무너진 국가 시스템 속에서 힘없는 개인만이 고군분투한다.
재난이 닥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존재들인 군인, 경찰, 소방관. 그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할리우드의 재난영화와 비교해보자.
<그린랜드>에선 시민 전체를 구하진 못하더라도, 재건을 위한 구조 시스템이 작동한다.
<2012>는 방식이 비윤리적일지라도, 국가 공조와 선택적 구조가 이뤄진다.
<투모로우>, <지오스톰> 역시 국가의 개입과 의무가 존재한다.
즉, 미국 재난영화 속 정부는 언제나 무언가 하려고는 한다는 시늉이라도 한다. 설령 무능하더라도, 존재한다.
반면 한국 재난영화는 어떤가?
<해운대>는 정부의 존재감이 거의 없다. 오히려 개인이 개인을 구하는 이야기다.
<부산행>에서 군인은 존재하지만, 국민을 좀비처럼 공격하는 공포의 존재로 변질된다.
<감기>에서는 시민을 총으로 겨누고 시민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 방치하며
<기생충>의 수해 장면에서도 누구 하나 구호에 나서는 공권력은 없다.
그렇다면 질문은 더욱 선명해진다.
왜 우리나라 재난영화에서 국가 시스템은 무능하거나, 사라지거나, 때로는 시민의 적으로까지 그려지는가?
왜 우리의 재난은 언제나 ‘국가 없는 재난’인가?
# 우리나라의 재난영화 발전 과정
왜 우리나라 재난영화에는 군인이 등장하지 않는가를 논하기에 앞서,
먼저 재난영화 장르의 형성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재난영화는 1969년 이만희 감독의 <생명>이다.
당시 기술적 한계가 뚜렷했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대규모 인명 피해와 구조 장면을 요구하는 고자본 장르에 도전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제작비 상승 요인이 많은 재난영화는 본질적으로 고자본 중심 장르다.
자연재해, 대규모 붕괴, 다수의 엑스트라와 부상 장면, CG와 특수효과 등 모든 요소가 높은 예산과 기술력을 요구한다.
한국 영화계에 본격적인 대기업 자본과 블록버스터 체제가 도입된 것은 1999년 강제규 감독의 〈쉬리〉 이후였다.
이전까지는 재난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산업적 기반 자체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2009년,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 가 등장한다. 이 영화는 단순한 재난 블록버스터가 아니다.
현대 한국형 재난영화의 ‘문법’을 처음으로 정립한 작품이다. <해운대> 는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산업적 성공을 거뒀고, 그와 동시에 한국 영화계에 재난 장르의 가능성을 증명해 보였다.
물론 이 영화는 과도한 신파와 클리셰, 그리고 감정을 강요하는 듯한 연출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눈물을 흘리라고 감독이 명령하는 영화라는 혹평도 존재했다. 하지만 이런 단점만으로 〈해운대〉의 선구자적 가치와 장르적 실험을 폄하할 순 없다. 오히려 이 영화는 헐리우드식 서사를 한국 정서에 맞게 감정 중심으로 변주시켜, 새로운 장르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예시였다.
<해운대> 의 성공 이후, 한국 영화계는<연가시>, <감기>, <판도라>, <엑시트> 등 다양한 재난영화를 시도하며
장르의 스펙트럼을 넓혀갔다. 그러나 동시에 <해운대> 의 서사 구조, 감정 연출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여전히 그 그림자 안에 머무르고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 시스템의 불신, 할리우드 영화와 비교
그렇다면, 〈해운대〉 이후 본격적으로 형성된 한국형 재난영화 속에서
왜 군인, 구조 시스템, 국가 권력은 사라졌을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나라의 시민들은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재난 상황에서 대한민국 정부에게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마 많은 이들이 ‘아니오’라고 단호히 대답할 것이다.
이 불신은 정치적 이념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깊은 구조적인 감정의 학습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그리 길지 않다. 해방과 분단 이후 형성된 우리의 국가는 여러 차례의 대형 참사와 사고를 겪으며 시민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 삼풍백화점 붕괴, 천안함 피격 이후의 진실공방, 세월호 참사, 이태원 압사 사고, 무안공항 추락 등등 단순히 사건 하나를 바라보자면, 매우 안타까운 개인의 현실일 뿐이지만 반복되는 대형 사고는 시스템의 붕괴가 본질에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은 언제나 시민에게 상처와 불신만을 남겼다. 우리는 이런 사고들을 보고 자란다. 뉴스는 빠르고, 감시는 촘촘하며, 우리의 일상은 CCTV와 블랙박스로 녹화되고 있다. 한국은 인터넷이 가장 빠른 나라 중 하나이고, 사건의 전파 속도 역시 세계 최고다.
우리는 매일같이 '시스템의 무능'을 보고, 그것을 학습하며 자란다. 이 학습은 개인을 국가보다 먼저 신뢰하게 만들고, 그 감정은 곧 재난영화의 정서적 문법이 된다. 그래서 한국의 재난영화 속 공권력은 점점 무능하거나 배경으로만 존재하고, 관객은 영화 속에서 '공적 해결'이 아닌, '사적 감정의 해결'을 기대하게 된다. 감정만 남은 재난영화는 곧, 시스템 부재의 은유가 된다. 초기 작품인 〈해운대〉는 재난을 '공포'의 감정으로 다뤘다. 시스템은 부재했지만, 그 부재가 '분노'로 전이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기점으로, 한국 재난영화는 재난을 더 이상 공포가 아닌 ‘분노’의 감정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최근 개봉한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들은 특정 정권을 비판하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은 본능적으로 느낀다. “왜 이 세계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가?” 이는 정권의 좌우 문제가 아니다. 좌든 우든, 어떤 정부도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지 못했다. 이 불신의 공백은 모든 정권이 공동으로 만들어 낸 한국의 감정 구조다. 한국 재난영화에서 사라진 것은 군인도, 과학자도, 대통령도 아니다. 사라진 것은 '신뢰'이며, 그 신뢰의 빈자리를 우리는 감정과 눈물, 분노로 채우고 있을 뿐이다.
# 개인의 감정과 재난 그 지점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해운대〉 이후 본격화된 한국형 재난영화에는 하나의 뚜렷한 특징이 있다.
재난이 중심이 아니라, 개인의 감정 서사가 중심이라는 점이다.
국가 시스템의 작동이 아닌, 인간관계의 단절과 복원이 재난의 배경 위에 그려진다.
즉, ‘재난의 체험’보다 ‘감정의 눈물’이 우선한다. 왜 이런 흐름이 만들어졌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재난 장르의 블록버스터화는 할리우드에서 시작되었고, 한국은 그 서사를 수입해왔다. 하지만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를 구현할 만큼의 자본력은 한국 영화 산업에 없었다. 그래서 거대한 파괴보다 가족 드라마와 같은 소규모 감정선으로 중심을 이동시킨 것이다.
<해운대> 는 그나마 감정과 재난의 균형을 잡은 작품이었다. 가족을 중심에 두었지만, 쓰나미의 시각적 위력도 상당한 비중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그 이후의 후속 재난영화들은 점점 재난의 스케일보다 인물의 서사에만 집중하기 시작한다. 재난영화란 본래 모든 시스템이 붕괴되고, 문명이 리셋되는 카타르시스를 다룬다. 관객이 이 장르를 찾는 이유는 파괴의 쾌감이다. 눈물보다 무너지는 도시를 보고 싶어 극장을 찾는다.
그러나 감정만 강조하는 한국형 재난영화는 이 쾌감을 충족시키지 못하며,
결국 관객의 외면을 받는다. 자본의 한계가 장르적 쾌감을 억누르기 시작한 시점, 한국 재난영화는 갈피를 잃는다.
<기생충>이나 <판도라>처럼 재난의 형식을 빌려 감정을 부각시키려 한 영화들은 대중성은 어느정도 확보했더라도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작품성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감정과 재난의 접점을 정확히 찾아낸 작품이 <부산행> 이다.
KTX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좀비라는 재난과 가족 서사가 효과적으로 조화를 이루었다.
장르적 쾌감과 감정의 서사가 충돌하지 않고 공존한 유일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절묘한 균형은 속편인 <반도> 에서 무너지고 만다.
<반도> 는 감정도, 재난도 설득력을 잃은 채 실패하고 말았다.
최근 개봉한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도 비슷한 문제를 겪으며 대중성과 비평 모두에서 고배를 마셨다.
지금, 우리 영화계는 끊임없이 사이렌을 울리고 있다. 영화계의 투자자들은 점차 등을 돌리고 있고, 심지어 독점 회사인 멀티플렉스 영화 회사들이 회사를 팔거나, 합병하는 등 몸을 비틀며 구제방안을 찾고 있다.
자본이 부족한 지금, 재난영화는 더 이상 한국 영화계가 감당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게 된 것이다.
넷플릭스가 투자한 <대홍수> 의 결과는 아직 미지수이다.
이 작품마저 실패한다면, 한국형 재난 장르는 장르 생존 자체가 위태로울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