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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 Jan 24. 2018

책이야기15 -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일본 근세의 재발견 <에도시대>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위안부 할머니 문제를 비롯하여 일본의 강압적 통치를 받던 치욕의 역사를 떠올리면 정서적으로 절대 가까워질 수 없는 나라 일본.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오사카 식도락, 후쿠오카 온천투어 한번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향하게 하는 일본.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인들의 질서정연함, 몸둘 바를 모르게 하는 친절한 서비스에 한번 놀랐고, 지역마다 색다른 관광 상품들과 수많은 외국인 여행객(특히 서양인들)들에 두번 놀랐다.


내가 배운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서 세계를 주름잡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 문화의 근간은 임진왜란 당시 우리 문화를 약탈해 가 어깨너머로 카피한 것들이었고, 우리보다 조금 일찍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기에(메이지 유신) 야만적인 제국주의의 발톱을 식민통치로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다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의 빠른 성장을 탐구하기 위해 메이지 유신 무렵의 일본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또는 임진왜란 무렵 일본의 전국시대 상황 정도?


그런데.

2~300년 간 명맥을 이어온 맛집들과 일본 전역의 특색있는 관광 상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일본을 너무 가벼운 상대로 본 것이 아닌지, 잘 안다고 생각한 일본이 사실은 굉장히 먼 상대라는 생각이 들더라.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는

그동안 소홀했던 일본의 근세(중세와 근대의 사이 - 17세기 초 에도 막부 성립에서 19세기 중 메이지 유신 전까지 260여년에 이르는 일본의 에도 시대)를 재조명하였고,

새로운 관점에서 일본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어 일단! 너무나 재미있다.

하루만에 완독!


물을 다스리는 자가 천하를 다스린다.

로마인 이야기, 또는 로마의 역사를 돌아보면 물을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한 예로 목욕탕! 수로를 통해 물을 다스리는 기술이 탁월했던 로마는 공중 목욕탕을 만들어 시민들이 목욕이란 걸 할 수 있었다. 지금의 기준에선 너무나 당연한 목욕 문화이지만, 프랑스의 절대왕정에서조차 공중 목욕탕을 만들 기술이 없어 당시 귀족을 비롯한 왕족들까지 목욕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것을 미루어 본다면 로마의 패권에 감탄할 수밖에!


그렇다면, 에도시대에는 왜 물이 중요했을까?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에도(지금의 도쿄)로 쫓겨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람이 살기 적합하지 않은 질펀한 토질의 에도에 도착하자마자 에도의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특히 사람이 먹고 농사에 사용할 물을 확보하기 위해 무려 40Km가 떨어진 지역에서부터 물을 대어 오는 수로를 만들 만큼 수로 만들기에 집중한다.(전기가 없던 시절 수로의 높낮이를 이용하여 원거리에서 물을 이동시킨 것이다!)

그 후 본격적인 에도 시대를 맞이한 후에는 천하보청과 참근교대제를 통해 성곽 건설, 수로, 도로 정비를 완성하게 된다.

(*천하보청은 쇼군이 다이묘에게 부과하는 공공사업 역무이고, 참근교대제는 우리나라의 기인제도와 유사한 제도로, 다이묘들이 1년을 에도에서 지내고 그 다음해에는 각 영지로 복귀해서 지내는 일종의 인질제도이다.)


천하보청? 우리나라의 중앙집권 정책과 다른점은?

일본의 쇼군과 다이묘들은 주종 관계를 이루고 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무사이다. 그렇다보니 '힘'의 견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했고, 그밖의 부분에 대해서는 각 번(다이묘들의 영지)의 자율성을 높게 인정해 주어 지방분권 또한 발달했다. 특히 쇼군이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용한 정책이 바로 천하보청과 참근교대제이다.

우리나라는 일본에 비해 중앙집권화가 잘 된 케이스로, 군역을 비롯한 각 종 부역을 국가가 개인에게 직접 부과를 하였다. 그래서 성을 짓는 등의 노역에 동원되는 것은 결국 힘없고 나약한 백성들이 그 대상이 될 수밖에!

하지만 일본은 천하보청의 역무를 각 다이묘들에게 부과하였고, 정해진 시일 내에 역무를 완성하지 못하면 큰 벌금과 제재를 다이묘들에게 부과하였다. 즉, 다이묘의 등골을 빼 각종 인프라를 구축한 셈!



돈이 돌고 도시가 발달하다.

에도는 18세기 중반에 인구 100만의 세계 최대 도시로 성장한다.

뿐만 아니라 오사카, 교토 등 중심지들은 무려 인구 30만의 도시로.


참근교대제? 넘나 좋은 것~


1. 모든 길은 에도로 통한다!

참근교대제는 다이묘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정실부인과 적자를 에도에 두고 각 다이묘들은 1년은 에도에, 그리고 다음해에는 영지로 복귀하는 일종의 인질제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참근교대제에 드는 비용이 만만찮다. 다이묘가 번에서 에도로 이동할 때 수행인원이 대략 300~500명 정도이고 이들이 오고가는 길, 그리고 에도에서 체류하며 사용하는 비용이 각 번의 재정의 반절이 넘어설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정해진 날짜보다 하루라도 늦으면 막대한 벌금을 다이묘들에게 물렸기 때문에 빠른 이동을 위해 다이묘들은 각 번에서 에도로 향하는 길을 곱게 닦았다. 일본 전역의 도로 인프라 구축, 성공!


2. 지방의 내노라할 유력가들이 모두 모인 에도!

장거리 이동과 원거리 유통이 이루어지면서 다이묘들은 수많은 비용을 미곡을 짊어지고 지불할 수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보관과 지불이 용이한 화폐경제가 자극을 받게 되었고, 에도까지 향하는 주요 길목(식도락의 오사카, 고급 전문점들이 즐비한 교토), 나아가 에도에서는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지방의 유력가들이 모두 모여든 에도는 그야말로 소비의 도시였다. 백의 민족으로 흰 옷을 즐겨입던 우리와는 다르게, 남색 하나에도 그라디에이션을 주고, 미세한 펀칭 무늬로 색의 차이를 만드는 등 에도에서 "내가 제일 잘나가~"를 자랑했던 것이다. 특히 도자기와 관련해서도 차 문화가 발전하면서 유력가들이 너나없이 고급진 다기류에 관심을 보이고 예술 후원을 아끼지 않아 도자기 문화 또한 쉬이 발전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의 독특한 중앙집권 - 지방분권 스타일   

일본의 소울 푸드는 뭘까?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초밥? No! 바로 미소다! 상하지 않게 오랜시간 보관이 가능하고 영양도 풍부하기 때문에 전시에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는 미소. 미소는 바로 일본 정치경제학에 있어 경쟁과 자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에도시대에 이미 도시 거주자들은 다양한 직역에서 생업에 종사하며 수익을 창출하였고, 신분제 사회이지만 임금생활을 하였으며, 이를 재원으로 소비하면서 삶을 영위하는 마치 현대인의 생활양식의 원형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경제적으로는 맛있고 상품성 있는 미소를 만들어 판매하기 위해 번과 번은 서로 치열한 경쟁을 하였다.(번이 위치한 각 지역 특성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다른 미소 생산 가능)

특히 이러한 상품 생산과 판매 경쟁이 가능했던 것은 일본의 독특한 중앙집권 - 지방분권 스타일 때문이었는데, 막부에 일정한 의무만 이행하면(천하보청, 참근교대제 등 각 다이묘들의 의무) 그밖의 부문에 대해서는 자치권 행사가 가능했기 때문에(특히 재정적으로!) 각 번에서는 정치적인 자율을 바탕으로 경제으로 활발한 경쟁을 했던 것이다.



에도시대의 교육? 지식 시장이 가능했던 시대!

들어봤니, 주쿠?!

에도시대는 무가교육인 공교육(번교, 막부의 직할교육기관), 그리고 서민교육인 사교육(데라코야)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부분은 우리나라의 교육제도와 큰 차이는 없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 주쿠이다.

학식과 명망이 높은 지식인이 개인적으로 문하생을 모집하고, 신분과 지위에 구애받지 않고 문호를 개방하여 배움에 정진할 수 있도록 한 공간이 바로 주쿠이다.

소위 신지식인들이 자신의 전문성에 입각한 강연을 펼치면 해당 지식이 필요한 사람 누구나 참여하여 지식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는 지식인들이 자신의 지식을 통해 기본적인 생활을 해소할 수 있는 지식 시장이 가능한 시대가 바로 에도 시대였다는 것, 이를 바탕으로 일본 계몽사회의 정신적 토대가 이미 메이지 유신 전 에도 시대에 구축되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만국박람회 참가? 실화냐.

일본은 차 문화가 지배층에서 유행하면서 다도로 격식을 갖춰가고 있었다. 하지만 익히 알다시피 임진왜란 전까지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조선에 비해 턱도 없어, 이삼평을 비롯 수많은 도공들이 일본에서 도자기 기술을 널리 전파시킨 것은 사실이다.(도자기에 적합한 흙 고르기부터 광택내기, 문양넣기까지!)

그러나. 우리나라가 중앙에서 도공들을 직접 관리하며 다양한 문화적 발전은 제한했다면, 지방 분권적이었던 일본에서는 예술에 대한 활발한 후원에서 비롯하여 도자기 문화가 점차 다채롭게 발달해간다. 특히 서양(네덜란드)과의 교역이 활발했던 일본은 일본풍을 가미한 채색 도자기들을 서양에 판매하면서 더욱 도자기의 이름을 알리게 되는데...

개항 이후 만국박람회에 참가하여 일본 도자기의 매력을 뽐냈을 정도이니, 박람회 참가를 결정한 것부터 외국인들이 필요로하는 도자기 스타일(국내 보급용 도자기 타입과 서양 수출용 타입이 달랐음)의 브로셔를 제작하는 아이디어까지 놀라움의 연속이랄 수밖에.



이 책을 읽고 새롭게 알게된 내용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보니 정리해서 소개하기도 벅찬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한국인이기에 분하고 안타까웠다.


조선이 지배층의 당파 싸움과 자기 배불리기에 집중하던 사이 일본은 아래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사회 변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특히 막부의 의도와는 달리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실시했던 제도들이 결국 신의 한 수로서 에도시대 일본 사회를 점진적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서민(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반 백성들을 서민이라고 통칭)들이 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상업을 발달시키고, 자유롭게 교육에 참가하면서 신분제 사회를 서서히 무너뜨린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E.H 카는 역사란 지평선의 확대로, 즉 역사의 주체가 모든 인민들이 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고 했다. 그리고 이 책,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를 읽으며 확인했다. 창의적이고 리더십있는 지도자의 혜안도 중요하지만, 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다수가 참여하여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 놓인 정치적 역사적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 상대를 좀더 깊이있게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감정적인 대응만으로는 부족하다. 좀 더 영리하게 일본을 바라보고 상대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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