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이자, 바로 그 김지영.
노회찬 의원이 문재인 대통령께 추천한 책 <82년생 김지영>.
지난 대선으로 젊은 층의 지지를 많이 이끌어낸 정의당의 원내대표 노회찬 의원이 추천한 책은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그가 바라는 대통령의 모습은 과연 무엇일지 궁금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85년생인 나의 어린시절 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여자 친구들의 이야기가 마치 한 편의 일기처럼 고스란히 적혀 있는,
지나치게 익숙한 책이어서 그 익숙함을 경계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내용이었다.
85년 3월 22일, 나는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바로 아래의 여동생이 태어났을 때 할머니는 '또 딸을 낳고 미역국 먹을 생각도 하지말라.'며 여동생의 얼굴도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셨단다. 오랜 세월 몸이 편찮으셨던 할아버지는 아픈 몸을 이끌고 새벽마다 냉수를 떠다 손자의 탄생을 기도하셨는데, 할아버지의 절절한 마음에 하늘도 감동을 했는지 엄마는 '다행스럽게' 남동생을 낳으셨다. 그리고 남동생은 할아버지 할머니 댁만 가면 볼을 꼬집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을 만큼 절대적인 존재로 아장아장 커갔다. (웃음)
나와 여동생의 성장에 있어 김지영씨와 달리 정말로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권위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닮지 않고자 내내 노력하신 아빠의 존재였다. 아들 딸 구별없이 실력과 능력을 중시하셨고, 가정 내 의사결정도 민주적으로 이끌어내셨기에 '딸'이라는 설움을 집 안에서 겪는 불편함은 없었다.
딸이라 겪은 한 가지 이벤트가 있었다면...여동생이 대학에 진학할 즈음 할머니께서 노발대발을 하시게 되었는데, 이유인즉 본인의 아들이 고생스럽게 '딸'을 왜 서울에 있는 대학까지 진학시키냐는 것이었다. 그 성적이면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지방대 교대나 사대에 진학하면 되지 않느냐며 역정을 내셨다. 돌이켜보면 그때까지 자라면서 겪은 명절 대소사 중 가장 흉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건이었다. 아빠는 자기 딸의 인생이니깐 더이상 뭐라 하지 마시라고 본인 어머니께 큰 소리를 한번 내셨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살아가는 요령을 재빠르게 터득한 여동생은 국립대학을 다닌 언니보다 더 저렴한 비용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고, 누구보다 멋진 커리어 우먼으로 성장했다.
현행 헌법 제11조①항 :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현행 헌법에서 제시한 차별 금지 사유인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
<82년생 김지영>은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어 왔던 사람들 중 하나인 '여성'의 삶, 특히 82년생이라면 현재 36살인,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이자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존재하며 사회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는 모든 '김지영'의 삶을 요약해준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쉽게 지나치게 되는, 너무나 익숙하게 여겨져온 그녀들의 성장과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책이다.
"나도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데."
엄마는 그냥 엄마만 되는 줄 알았던 김지영 씨는 왠지 말도 안되는 소리 같아 웃어 버렸다.
"진짜야. 국민학교 때는 오 남매 중에서 엄마가 제일 공부 잘했다. 큰외삼촌보다 더 잘했어."
"근데 왜 선생님 안 했어?"
"돈 벌어서 오빠들 학교 보내야 했으니까. 다 그랬어. 그때 여자들은 다 그러고 살았어."
"그럼 선생님 지금 하면 되잖아."
"지금은, 돈 벌어서 너희들 학교 보내야 하니까. 다 그래. 요즘 애 엄마들은 다 이러고 살아."
김지영씨의 어머니 오미숙씨의 이야기. 위로 오빠가 둘, 아래로 하나 있는 남동생의 학업을 위해 언니와 오미숙씨는 공장에 취직해서 가계에 보탬이 되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사랑하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는 자신들에게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뒤늦게 산업체 부설 학교에 다니며 주경야독으로 중학교 졸업장을 받게 된다.
김지영 씨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 그러니까 출산 이후에도 직장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과 벌써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죄책감을 남편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정대현 씨는 차분히 아내의 말을 듣고 적절한 순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지영아,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게 되는 걸 생각해봐. 부모가 된다는 게 얼마나 의미있고 감동적인 일이야. 그리고 정말 애 맡길 데가 없어서, 최악의 경우에, 네가 회사를 그만두게 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책임질게. 너보고 돈 벌어 오라고 안 해."
"그래서 오빠가 잃는 건 뭔데?"
"응?"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라며. 나는 지금의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
비단 김지영씨의 고민만이 아닐 것이다. 모든 여성들이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바로 '출산' 아닐까.
충분한 육아휴직이 가능하고, 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있는 직장이 얼마나 될까. 출산과 함께 여성들은 슈퍼우먼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남성은 육아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출산과 함께 어쩐지 손해보는 느낌이 드는 것은 지울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부실해서 빚어지는 문제들을 오롯이 여성들이 떠안고 감내해야만 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처해있다는 것.
너무나 익숙해서, 김지영 씨의 삶이 우리 주변의 그녀들의 삶과 너무 비슷해서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 즈음엔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바라건대 내일의 대한민국에는
헌법 11조 1항에 명시된 '성별'이 차별 금지 사유에서 빠질 수 있기를.
결혼과 출산으로 '잃는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축복과 함께 여성들이 자신의 커리어를 펼쳐나갈 수 있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