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과 논픽션의 사이에서...
“어쩌면 명문대를 가는 것보다 마음이 맞는 사람을 동반자로 만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진짜네.”
새파란 가을 구름 아래서 외로움을 호소하던 L이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는지 물었더니, 고3 때란다. EBS 수능 문제집을 집중해서 풀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교실엔 빠박머리 친구들의 뒤통수가 가득하고, 왠지 그리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더란다. 19살이라기엔 빼어난 통찰이라며 웃었다.
“근데 남자들은, 명문대 버프로 예쁜 여친이 생길 거란 기대를 품고 열심히 공부하는 거 아니었어?”
그런 허황된 기대를 품기에, 토박이 서울 남자 L의 주변엔 지나치게 여자란 존재가 없었다고. 남중을 졸업하고 기껏 공학을 진학했더니 그해부터 분반을 했단다.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인기남의 냄새를 풍기는 외모를 가지지 못한 L은 그렇게 10대 내내 어떤 시그널도 주고받지 못한 채 ‘그 상태 그대로’ 명문대를 진학하고, 또 십여 년이 흐르는 기간 동안 그의 뛰어난 통찰을 몸소 입증한 셈이다. L은 정말, 매사에 성실하고 진중한 사람인데 유독 그 시그널에 취약했던 셈이다.
‘신호와 소음’ 이후부터였는지, 트와이스의 ‘시그널’부터였는지, 아니면 채널A의 ‘하트 시그널’부터였는지 요즘들어 시그널이라는 단어가 난무한다. 내가 경험한 이 3가지 시그널의 공통점을 뽑아보자면, 주변 잡다한 것들(소위, 소음?)은 분별있게 제쳐 버리고 엑기스인 시그널을 뽑아내어 적절한 타이밍에 잡아라, 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특히, 연애에서. 요 며칠 온 사지의 안테나를 곤두세우고 얄팍한 시그널에도 고개를 까닥거리며 반응하는 피곤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뭣이 중한디! 내 마음이 중하지!”라는 깨달음을 얻고, 결말까지 다 나버린 하트 시그널을 뒤늦게 쫓으며 감정선 쫓기 놀음에 빠져버렸다. 이런 내 행동을 합리적인 이성으로는 설명이 불가한데, 여하튼 내 문제로 고민하자니 머리가 아파 남의 상황을 통해 성찰이라도 해보자하는 심정으로.
그래서 시작한 채널A의 방송판 하트 시그널.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中 2-10반 아이들의 현실판 하트 시그널. 결론부터 말하자면 10대의 용기와 패기, 그리고 몰랑몰랑한 하트에 박수를.
방송판 하트 시그널은 플레이어들이 누구를 선택하게 되는지 최종 결정을 먼저 확인하고 보기 시작했다. 여러 커뮤니티에서 그들의(스토리라인의 주축을 이룬 주인공들 - 서주원, 배윤경, 장천, 추가하자면 서지혜) 선택에 대해 갑론을박이 이어지던데 보는 내내 나의 고개도 갸우뚱했다. 1회부터 11회에 이르는 비디오(방송사가 편집해서 보여주는 장면들)만 두고 보자면, 서주원과 배윤경은 이미 연인이 되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둘만의 시그널 상자 속에 넣어둔 것만 같았다. 다만 방송이라 매일 밤 마음이 가는 이성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익명’으로만 보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개인적인 연락처를 주고받지 못하고 시그널 하우스에서 대면해야지만 이야기도 나누고 약속도 잡을 수 있다는 것. 이런 제약들로 인해 둘만의 시간 동안 대놓고 감정표현을 하지 않으면 상대는 충분히 헷갈릴 수 있다는 것. 물론 그 둘을 관찰하는 시청자 및 스튜디오에서는 충분히 시그널이 가득한데 왜 플레이어들은 눈치를 못 채나 속이 터지는 뭐 그런 전개다.
그 와중에 서주원은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하고 승부욕 있는 연하남, 배윤경은 어여쁘고 성격도 털털한데 표현력이 약한 부산 여자, 치고 들어온 장천은 전문직답게 자기 감정에 대한 확신과 안정감을 상대에게 어필하는 틈새 전략가, 굳이 추가하자면 서지혜는 귀여운 막내로 장천에겐 마냥 어리지만 서주원에겐 편안한 상대역이라는 절묘한 캐릭터 설정이 있었다. 그리고 결과는, 언젠가 압력밥솥으로 밥을 짓다가 휘리릭 하며 압이 다 빠지기도 전에 콘센트를 뺀 적이 있었는데(따라하면 절대 안 되는 위험한 행동임) 그 결과 밥솥은 뚜껑조차 열리지 않아 아주 식겁을 하게 되었는데, 마치 이 경험처럼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방법도 다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배윤경, 장천 커플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지만 설렘은 없다고 말해오던 서지혜를 선택하는 서주원의 뒤끝.
이 즈음에서 현실판 하트 시그널과 비교를 해 보자면, 플레이어 수는 일단 비슷하다.
매사 적당한 의욕과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싱거운 소리를 잘 던지는 A, A의 청소 당번까지 바꿔주면서 대놓고 A 바라기를 해온지 어언 4개월 차에 접어든 활발한데 자존감이 낮은 여자 B, 돌아이 기질을 가졌으나 관심 있는 과목은 선생님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잘해내는 ‘알고 보면 천재일지도’ 라는 말을 듣는 B 바라기 남자 C, 그리고 굳이 추가하자면, B의 절친이나 누가 보면 A와 무슨 사이인가 싶게 잘 붙어 지내는 별 생각 없는 타입의 여자 D라는 캐릭터들이 있다.
그리고 방송판 하트 시그널이 마무리 될 즈음, 현실판 하트 시그널도 그동안의 균형을 깨뜨리는 일종의 선택이 발생했다. 더 이상 감정을 숨길 수 없는(어쩌면 이미 들통난 감정) 여자 B가 남자 A에게 대놓고 고백하는 페메(페북 메신저)를 보냈고, “나랑 사귈래?”라는 그녀의 물음에 B가 “놉!” 이라고 대답을 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전후하여 C 또한 더욱 열정에 박차를 가했는데, 수준별 분반 수업을 진행하는 영어 수업 시간에 본인의 친한 친구들 및 본인이 속한 반(Rose반)이 아닌, B가 속한 반(Iris반)에 들어가서 떡하니 B 근처에 앉아 삐급 개그로 그녀를 웃게 한다는 것. 덕분에 교무실에서 잘 쉬고 있던 담임이 직접 영어 수업 시간에 들어가 C를 원래 반으로 보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돌아서는 담임의 뒤통수에 대놓고 C가 하는 원망은 덤으로. 여자 B의 메시지에 단칼에 놉을 외친 남자 A는 지나치게 자연스럽게 여자 D와 사이좋게 지내는가 하면, 이 모든 사태를 지켜보기 싫은 여자 B는 담임과 눈만 마주치면 자리를 바꿔달라, 반을 바꿔달라, 그냥 다 싫다는 식의 마음 전개를 내비치고, 이러한 B의 대놓고 해대는 감정표현을 일단은 바라보고 있는 남자 C. 알고 보니 B를 향한 남자 C의 감정 또한 방학 전부터 키워왔던 것으로, 여름방학 동안도 줄어들지 않고 계속 커져왔던 것. 내 입장에선 좀, 수고스러운 순애보다.(자꾸 모시러 가야해서...)
두 타입의 하트 시그널을 관찰해오면서, 10대의 하트는 아직 굳은살이 박이지 않은 몰랑몰랑한 하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느끼는 ‘지금의’ 감정들에는 그들이 살아온 시간 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신박함이 녹아있고, 재고 따지기엔 ‘지금의’ 감정이 중요하므로 일단은 직진. 그리고 굳이 신호와 소음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도 몰랑몰랑한 하트의 특징이다. 내가 관심 가지는 대상이 발산하는 것이면 그것이 유의미한 시그널이든, 천에 쓸모없는 소음이든 그냥 마냥 좋은 상태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방송판 하트 시그널은 명백한 시그널을 소음이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플레이어들 때문에 관찰자로서는 안타까움에 탄식이 절로 나온다. 물론 비디오만 보았기 때문에 실제로 시그널 하우스에서 얼마나 많은 대화와 눈빛 교환들이 오고갔는지 알 길이 없다. 사실 방송사 입장에서는 주요한 사건이랍시고 비디오로 편집해서 방송을 해 주는 것이지만, 감정이라는 것은 사소한 부분에서 변화가 시작되는 법이니깐 말이다.
이런 쓸데없는 관찰을 해 온 나 자신에게 한심함을 표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방송판 하트 시그널에서 조금은 위안을 얻게 되었다. 두 타입의 하트 시그널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방송판 하트 시그널은 상대방의 감정에, 현실판 하트 시그널은 본인의 감정에 더욱 충실하다. 분명 예전에는 내가 상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중요했고, 그래서 내가 상대에게 어떤 행동을 취할지를 고민하고 판단하면 되는 문제였는데, 언제부터였는지 상대방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대의 감정에 기대어 모든 판단을 유보하는 소극적인 모습을 발견한다. 나이가 들수록 이토록 내밀한 ‘감정’이라는 사적인 영역에서조차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는 것과 소득 없는 수고로움을 경험하고 싶지 않은 귀차니즘의 적절한 조화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쩐지 아쉬움이 남는 가을밤이다.
갓 나온 커피잔에 담긴 카푸치노는 정말 몰랑몰랑한 거품으로 풍성한 상태였는데, 주인장이 이리저리 흔들며 커피를 저어 마시는 통에 그 거품들은 이제 질척거리며 부유하고 있는, 마치 조금은 지쳐버린 나의 감정선 같다. 한번쯤은 그 시절처럼 몰랑몰랑한, 굳은살이 배지 않은 마음을 가져볼 기회가 남아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루어지지 못했던 배윤경과 서주원, 시그널의 핵심은 타이밍인데 말이지, 그래도 아직 창창한 이십대니깐 아무렴 어떤가.
“샘, 9월 15일이 고백데이였잖아요. 고백하셨어요? 아님 고백 받으셨어요?”
“얘들아, 어른들은, 굳이 그런 ‘데이’라고 그날을 잡고 뭔가를 하거나 그러진 않아.”(실은 고백데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음)
과연 현실판 하트 시그널의 최종 결말은 어떻게 될는지.
우리 반은 현재 몰랑몰랑한 하트들이 난무하는, 사랑이 꽃피는 가을 하늘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