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드리면 열린다 _돌고 돌아, 결국 영국 박사까지
"전생에 공부를 너무 하고 싶었는데 못해서 한이 맺혔던 거 아니니?"
엄마가 어느 날 내게 웃으며 했던 말이다.
농담이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말이 일리가 있는 것도 같다.
나의 학창 시절은 평범하게 시작했다.
특출 나게 똑똑하진 않았지만, 성실한 성격 덕분에 내신이 괜찮아 특목고에 진학했다. 고지식하게 "공부 외에 한눈팔면 안 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고, 진짜로 별로 한눈 안 팔았다. (그래서 학창 시절 남자친구도 거의 없다. 지금 생각하면 두루두루 친구 사귀는 것도 참 중요한데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 캐나다 자매학교로 짧게 연수를 다녀온 경험이 있다. 그 짧은 시간이 내게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심어줬다. 새로운 문화, 새로운 언어, 다양한 사람들… 그 모든 게 내게 신선하고 자극적이었다.
성실하게 내신 관리를 해 수시로 대학에 진학했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당시 내가 다닌 특목고는 정원이 적어 내신 등급 받기가 일반고보다 더 불리했다.
그걸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선택권으로 주어진 영어교육과처럼 안정적인 길 대신, 그때 눈에 더 반짝였던 계열을 선택했다. 돌아보면 그냥, 단순히 ‘마음 가는 대로’ 선택한 길이었다.
사실 외국 대학으로 편입하고 싶었지만, 재수는 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몇 달간 토플을 준비해 교환학생으로 1년 미국에 다녀오고, 돌아와 남은 학기를 마치며 졸업했다.
졸업 후엔 전공을 살려 해외 브랜드 머천다이저로 일했고, 그러다 결국 석사유학을 결심했다.
목표는 영국 런던.
회사에 다니며 아이엘츠를 준비했고, 다행히 좋은 결과를 받아 첫 영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20대의 나, 처음 밟은 영국 땅.
런던에서의 석사 과정은 짧고 치열했다. 방학 없이 이어지는 수업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았다.
한국과는 전혀 달랐던 수업 방식—교수는 흐름만 알려주고 디테일은 학생 스스로 채워야 했다. 챗GPT 같은 AI도 없던 시절, 직접 도서관을 뒤지고 온라인 저널을 찾아 헤매던 나날들이었다.
주말 하루, 간신히 짬을 내어 런던 시내를 걷던 기억이 난다. 논문을 준비하며 시내로 이사하고 나서야 런던의 아름다움에 푹 빠질 수 있었다. 템즈강, 고풍스러운 건물들,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거리들.
밤을 새우며 논문을 마무리했고, 다행히 좋은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이 성적이 훗날 박사과정 지원에 큰 도움이 될 줄은 그땐 몰랐다)
졸업 후 대부분의 친구들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상하게도 나는 더 머물고 싶었다.
부모님은 박사과정을 추천하셨지만, 나는 당시 갓 논문을 끝내고 정신적으로 방전된 상태였고, 당시 박사 선배들의 다크서클에 ‘피곤 그 자체’인 얼굴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공부대신 일, 그리고 또 다른 시작”
대신 런던에 남아 일해보고 싶었다.
전공과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진 않았지만, 템즈강이 내려다보이는 예쁜 사무실에서의 시간은 내 안의 또 다른 면을 성장시켜 주었다.
그렇게 조금씩 일상에 적응해 가던 어느 날,
친했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본국으로 떠나고,
익숙해졌던 업무에서도 더 나아갈 수 없다는 한계가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다시 움직여야 할 시기라는 생각이 들 무렵,
운명처럼 한국기업 입사 기회가 찾아왔고,
나는 다시 짐을 싸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상하이에서의 도전, 다시 혼자”
그리고 몇 년 뒤, 상하이의 한 명문대학에서 전액장학금(학비와 생활비지원)으로 석·박사 과정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낯선 중국에서 혼자 4년을 버틴다는 건 그때의 나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박사 대신 석사과정을 선택했고, 다시 한번 낯선 나라에서 혼자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그런 나를 보고 친구들은 “여자 홍길동”이라고 불렀다.
당시 많은 친구들이 한국에서 결혼을 하거나 안정적인 삶을 선택할 때, 돌아보면 나는 조금… 유별난 쪽에 가까웠던 것 같다.
중국 생활은 여행과는 전혀 달랐다. 언어도, 문화도, 일상도 모두 도전이었지만, 긍정적인 마인드로 꿋꿋이 버텼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풀어볼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상하이에서 졸업할 즈음, 현지 테크 스타트업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게 되었고, 그 직후 코로나가 터졌다. 회사는 기약 없는 중지, 나는 혼자 아파트에 갇힌 채 지내게 되었다. 가족들의 권유로 결국 귀국하게 된다.
“코로나와 탈모걱정, 다시 간절해지다”
이 시기, ‘박사과정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첫 번째 석사는 영국, 두 번째는 중국. 박사는 꼭 다시 영국에서 하고 싶었다.
코로나 시국, 노트북과만 대화하며 리서치 프로포절을 준비했다. 영국 내 장학금 기회가 있는 대학과 교수님들에게 매일같이 메일을 보내고, 모든 서류를 혼자서 꼼꼼히 준비했다.
쉽지는 않은 과정이었다. 샴푸 할 때마다 한 줌씩 빠지는 머리카락을 보며, 혹시 탈모가 오는 건 아닐까 걱정한 적도 있었다. 몇몇 교수님들로부터는 긍정적인 피드백이 왔지만, 정작 장학금 보장은 어렵다는 대답뿐이었다.
부모님께는 손을 벌리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기대를 내려놓고, 출근 예정이던 새로운 직장에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두드리면 열린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 예정일을 3주 앞두고 한 학교에서 전액장학금 (학비와 함께 박사과정 동안 생활비 지원) 합격 이메일이 왔다.
"We are very happy to inform you that you have been awarded the Vice Chancellor's PhD Studentship"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왠지 모르게 간절했기 때문에,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새 직장도 좋은 기회였지만, 부모님은 흔치 않은 기회라며 박사과정을 적극 추천해 주셨다.
‘이 나이에 이제 시집이나 가라’는 말 대신, 끝까지 내 선택을 응원해 주셨다.
그래서 지금, 나는 다시 영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정말 전생에 공부를 너무 하고 싶었는데 못했던 걸까.
웃기지만, 그 말이 자꾸 떠오른다.
진작에 시작했다면 시간을 아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확신이 없었고, 방황했을 수도 있다.
조금은 돌아왔지만,
그 시간 덕분에 이제는 더 길게, 더 단단하게 걸어갈 수 있는 방향을 찾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심으로 원하고, 포기하지 않고 두드리다 보면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문은 열린다는 걸
나는 몸으로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