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철학관>
'오류'와 '저주'는 삶의 역설을 나타내는 말이다.
'지식의 오류'는 알고 있는 것이라 착각하는 것들로 인해 오히려 더 모르는 것이 있다는 걸 깨우치는 말이고, '승자의 저주'는 경쟁에서는 이겼으나 경쟁 이후에 오히려 남는 게 없거나 오히려 파멸에 다다르는 현상을 뜻한다.
'오류'와 '저주'라는 말을 상기할 때, 나는 '행복'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행복'엔 '오류'와 '저주'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행복'을 비하하거나 비난하는 건 아니다. '행복'은 그 자체로 죄가 없다. 순수하며 무결하다. 다만, 그것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걸고 본래의 의미를 오염시키는 건 다름 아닌 사람이다.
행복은 가면을 쓰고 있다.
불행이라는 가면이다. 행복은 순간에 지나지 않으며, 어떠한 면에서는 잠시 잠깐의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행복함을 느낀다고 해서 모두가 평안한 건 아니고, 평안하지 않다고 해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도파민이 수직 상승하여 행복의 최고조를 맛본 사람은, 이내 불안과 같은 불행한 기운을 맞이하고 만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의 예를 들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불행의 가면을 쓴 행복의 저주는 비단 약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보통 사람인 우리네에게도 행복의 오류와 저주는 작동한다. 잠시 느끼는 행복뒤에, 오히려 행복이 깨질까 봐 불안해하거나 잠시 잠깐 느낀 행복을 다시 맛보기 위해 부단히 발버둥 치는 삶을 돌이켜 보자. 행복의 노예가 된 우리는, 행복이라는 가면을 쓴 불행에 의해 비웃음을 사고 있을지 모른다.
반대로, 불행도 가면을 쓰고 있다.
행복이라는 가면이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한 줌의 빛도 없다. 눈을 떠도 캄캄하다. 그러나 저기 실낱같은 빛줄기가 보이면, 시야는 확장되며 어디로 가야 할지 우리는 그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평소의 햇살에 눈을 찌푸리고, 혹여나 얼굴이 탈까 빛을 거부하지만 어둠에서의 작은 빛은 구원과도 같다. 즉, 절망 속에서 우리는 작은 희망을 찾게 된다. 절망이 있어야 희망이 생긴다는 삶의 아이러니. 마찬가지로 불행이 지속되면, 작은 것 하나에도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행복의 역치, 행복의 임계점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불행이라는 가면을 쓴 행복이라 표현한다. 불행의 오류, 불행의 저주라 말해도 재밌지 않을까? 부정과 부정이 만나면 긍정을 만들어내는 참으로 우스운 삶의 부조리.
나는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고 불행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있는 그대로 모든 걸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무 느낌 없는 사이코 패스가 되자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느낀다면 미련을 가지지 말고 순간을 만끽하자는 것이고, 불행을 마주했다면 그것에 압도당하기보단 불행의 근원과 그 뒤에 올 덜 불행함의 미학을 느껴보자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은 멈추지 않는 그 어떠한 기운이다.
기운은 마음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외부로부터 전해져 마음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가면 뒤에 있는 오류와 저주를 살핀다면.
어쩌면 우리는 오류와 저주에 덜 걸려들지 모른다.
중요한 건, 무엇에든 걸려들지 않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