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셀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가운데, 영문도 모르고 태어나 무언가의 힘에 등 떠밀려 앞으로 나아가는 가혹한 어느 하나의 운명이다.
행복보다 불행이 더 큰 이유가 첫 문장에 모두 들어가 있다.
첫째, 불확실성
둘째, 영문도 모르고 태어난 우리
셋째, 등 떠밀려 앞으로 나가는 메커니즘
나는 이 모든 것을 '부조리'로 봉합한다.
'부조리'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불합리하며, 무의미한 상태를 말한다. 단어 자체가 아주 불쾌하다. 그러나 단어엔 죄가 없다. 우리네 삶과 부조리를 잘 표현해 내었을 뿐이다.
내가 더 불쾌하게 여기는 건, 누구인지 모를 절대자의 횡포다.
앞서 말 한 세 가지 모두, 그가 우리에게 강제적으로 주입시킨 삶의 기제 아닌가. 여기, 태어나고 싶어 스스로 삶을 선택한 사람이 있다면 손들어 보라. 자신의 운명을 100%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소리쳐 보라. 원하는 대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은 일어나 보라. 분명 없을 것이다. 있다면 절대자와 내통한 자로 여기고, 나는 그의 멱살을 잡아 그 의도를 말하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내 불행해야 하는가?
영문을 모르고 방황해야 하는가?
아니다.
분명, 삶에는 순간이지만 행복이 있다. 거듭되는 불행에 잠시의 순간이라도 행복함을 느끼는 게 불공평하고 처절하긴 하지만... 그리하여 부조리에 대해 말하는 알베르 카뮈와 장 폴 사르트르는 '저항', '책임', '의미'를 강조했다. 영원히 굴러 떨어지는 돌을 다시 올려야 하는 시지프는 지겨운 삶에 저항할 권리가 있고, 저항한 것에 대한 결과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일련의 과정을 통해 깨달은 것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저항', '책임', '의미'를 아울러 나는 주문을 하나 만들었다.
이 주문은 위 세 가지 단어를 함축하여, 가슴에 담아 부조리 가득한 험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용기의 에너지로 삼기 위함이다. 영문도 모르고, 돌아갈 수도 없고, 내내 불안에 영혼을 잠식당한 존재이지만. 속으로든, 겉으로든. 이 주문을 위해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