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자기 계발의 정석>
카타르시스는 마음의 정화
카타르시스(katharsis)는 그리스어로 '정화'를 의미한다.
마음속 억압된 감정이나 응어리가 언어나 행동을 통해 외부에 표출됨으로써 정신적, 정서적으로 안정을 되찾아 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2년마다 열린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비극을 관람할 때의 체험을 카타르시스의 주된 내용으로 삼았다.
그는 인간을 한계까지 몰고 감으로써 오히려 그로부터 벗어나 환희에 이르게 되는 점을 관찰했는데, 비극적이고 부정적인 체험 속에서 인간은 한계와 무력함을 느끼지만 바로 그 순간 오히려 인간은 이성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초월을 경험하게 되면서 인간의 영혼은 한 차원 더 고양된다고 보았다.
그리스어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해서 어려운 개념으로 여길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희극(Comedy)을 보며 한바탕 웃거나 비극(Tragedy)을 보며 펑펑 운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순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평정심을 되찾는다. 우리 마음이 '정화'되는 순간이다. 나 대신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 인물을 보며, 버림받은 주인공과 함께 울고 우는 바로 그 순간. 감정이란 이입이 가능해서, 함께 울며 우리네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을 겪으면, 말 그대로 무언가 뻥 뚫린 기분이 든다.
감정은 물리적이지 않지만, 물리적 속성을 지닌다.
억압된 것은 언젠가 폭발하거나 어느 사이를 삐져나온다. 그것이 소멸된다면 그것은 존재의 사라짐을 뜻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폭발하기 직전의 마음을 안고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분에 못 이겨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거나 원치 않는 소비를 하고 후회한다.
어질러진 방을 청소하듯,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정화' 해줘야 한다.
이러한 정화의 과정은 몰았다 한 번에 하는 것보단, 주기적으로 해주는 것이 좋다. 주기적으로 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일상에 녹여내는 것이다.
일상 속 카타르시스 찾기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기능을 '관객의 연민과 두려움 같은 부정적 감정들을 배설시키고 정화하는 카타르시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니체가 이해한 비극은 이와 좀 달랐다. 그는 이러한 비극을 '감정적 설사'로 규정한 듯하다. 니체 이전의 비극은 셰익스피어나 괴테의 비극을 제외하면 관객의 부정 감정들을 설사시켜 초췌하고 탈진하게 만드는 것으로 변질되어 왔기 때문이다. 현대에도 소위 말해 '막장 드라마'라는 것을 보며 우리는 미간을 찌푸리지만 또 이내 우리 영혼은 탈진하고 초췌해져 다시 그것을 찾는 중독을 반복하고 있다.
니체가 읽은 고대 그리스 비극은 그런 악순환을 조장하는 게 아니라, 비극을 인지함으로써 그것을 돌파하고 수용함으로써 종내에는 삶을 긍정할 수 있는 고뇌였다.
그렇다면 감정을 설사하는 게 아니라, 정화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앞서 말했듯, 우리네 감정은 물리적 속성을 따르며 동시에 이입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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