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철학관>
세상은 부조리와 역설로 똘똘 뭉쳐 있다.
아마도 뭉쳐 있는 그 범위를 가리켜 우주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그렇다면 우주는 아마도 역설과 부조리를 창조한 누군가의 '나와바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의 밖은 누구의 것인가. 생각하고 싶지 않다. 우주를 논하는 것도 무지하고 피곤하다. 우주는 지금도 팽창하고 있으니, 절대자는 또 다른 절대자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있는지도.
부조리와 역설을 언급하려다 서두가 길었고 우주 밖까지 다녀오는 수고를 했다.
내 삶은 늘 평범했고, 평범함이라는 평균을 오가기 위해선 평범하지 않음과 특별한 날들이 어느 범위를 그리 튀지 않게 오가며 이어져왔다. 삶이 어려울 땐, 때론... 아니 그보다 자주 나는 '기적'을 원했다. 지금 이 상황을 한 번에 바꿔 버릴, 180도 달라진 새로운 삶을 기대하곤 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내 삶엔 기적이란 없었다. 혹자가, 지금 누리는 그 자체가... 살아 숨 쉬는 게 기적 자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정하진 않겠다. 그러나 솔직해보자. 우리가 바라는 기적은 그게 아님을 알지 않는가. 가족의 실수로 사회에 나오기도 전에 신용불량자가 될 뻔한 적이 있다. 취업조차 못하면 돈도 못 갚을 것이고. 돈을 갚지 못하면 그렇게 허덕이다 예상보다는 짧은 생을 맞이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던 적이 있다. 있는 돈을 탈탈 털어 복권 10장을 샀다. 신이 있다면, 내 억울함을 안다면, 기적이 있다면. 지금 이런 나를 돕겠지.
이러한 간절함과 절박함을 마다하고 복권은 어느 한 장 당첨되지 않았다.
단 한 장도. 신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억울함을 토로할 데가 없었다. '그냥 죽어버릴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정도의 상황이었다. 잘 살고 있는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때의 감정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때 나는 알았다.
앞으로도 내 삶엔 기적이란 없겠구나. 왜? 기적이란 건, 일어나지 않을 걸 알고서 바라는 것이니까. '기적'이란 말 자체가 떠오르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나만 절박하고 세상은 함구하는... 아니 내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얼음보다 냉정한 시간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때 정말로 복권 1등에 당첨되었다 하더라도, 그건 기적이 아니라 우연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들은 우연을 '기적'이나 '인연'으로 포장하는 가여운 본능이 있다. 신이 무얼 한 것도 아니고, 사실은 우연은 어쩌면 신의 계산 밖 현상인데 그걸 기적이나 인연 그리고 신의 뜻이라 생각하는 그 자체가 정말 불쌍한 존재의 불쌍한 현실이다. 신은 자신의 우주를 팽창하는데만 열을 올리지, 우리 삶엔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
이게, '부조리'와 '역설'의 현실이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건 우연이고, 누군가의 의도 따윈 없다. 우연 또한 우연적인 것의 우연이다. 세상은 인과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지만, 그건 모두 해석에 따른 것이며 인과를 통해 사람들은 의미를 찾고, 그래야 숨을 쉴 수 있다. 의미와 해석, 이유를 규명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궁금증과 영문을 알지 못하는 현실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존재다.
'유토피아'는 없는 곳을 의미하는 역설적인 단어다.
'기적'또한 그러하다. '기적(奇跡)'의 '적'자는 '발자취'를 말한다. 우리는 '기적'을 앞으로 일어날 '미래' 시제로 생각하는데, 말의 뜻을 보면 이미 찍힌 자취를 말하므로 그것은 '과거'에 국한한다. 고로, 우리가 아는 기적은 유토피아와 같이 있을 수 없는 말이다.
돌아보는 모든 것이 기적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앞으로 보려고 애쓰지 말고, 지나간 것을 기이하게 여기는 마음.
기적은.
지나간 것들에 있다.
부조리.
역설.
이 괘씸한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