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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내 탓인 이유

<삶이란 부조리극>

by 스테르담

세상이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 같은 때가 있다.

내가 무슨 죄인가. 영문도 모르게 태어나, 눈을 떠 울고, 먹고 싸다 어른이 되었는데 당최 내 뜻 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누가 생명을 달라고 했나, 몸이 커지고 사회에 발을 들여놓게 해달라고 했나.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톺아보기 전에, 나는 왜 생각이란 걸 해야 하며 그로 인해 존재해야 하는가.


그 누구도 저마다의 존재를 바란 적이 없다.

존재하기에 살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는 것이지, 존재 자체가 시작되지 않았다면 우리에겐 그러한 생존의 욕구는 티끌만큼도 없었을 것이다.


존재 자체가 고통이다.

완전하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는 건, 그리 곤욕이다.


앞 차가 느릿느릿 간다.

답답하다. 차선을 바꾸려 옆을 보니, 옆 차도 굼뜨다. 고로, 나는 차선을 바꿀 수가 없다. 아니, 아침부터 두 차가 짜고 나를 괴롭히려 하는가. 분노가 끓어오르고, 욕이 입술 언저리까지 차올랐다.


도로 위에서, 내 주변의 차를 내가 고를 순 없다.

두 차는 그저 저들의 길을 가고 있었을 뿐. 사실, 분노가 끓어올랐던 순간은 채 1분 여가 넘지 않았다. 자연스레 차들의 속도는 차이를 냈고, 잠시 후 나는 얼마든 차선을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

돌아보면 왜 그랬나 싶지만, 당시의 상황은 내 주변이 모두 적으로 변하는 암울한 기적(?)과도 같았기에 스스로를 이해하기로 한다.


분노는 세상과 타인을 탓하게 한다.

그러나 분노가 사그라들면 나를 돌아보게 된다. 그러한 나를 꾸짖진 않으려 한다. 감정은 내가 느끼는 것이고, 감정에 대한 반응 또한 내 몫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잘못을 혀를 끌끌 차며 '좀 참지...'라고 말하는 사람의 가식을 나는 증오한다. 그들은 타인의 감정을 '생각'하기 때문인데, 저들이 감정을 '느끼기'시작하면 혀를 끌끌 차던 여유는 온데간데 사라질 것이 뻔하다.


솔직해지기로 한다.

세상 탓, 남 탓. 해도 좋다.


그러나 결국, 내가 존재하기에 일어나는 이러한 마찰들은.

내가 받아들여야 할 것들임이 분명하다.


내가 숨 쉬는 탓.

내가 존재하는 탓.

내가 살아 있는 탓.


'탓'이란 말을 슬쩍 '덕'으로 바꿔 본다.

아주 조금은, 덜 억울해지는 순간이다.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

왜 존재해야 하는지.

왜 언젠간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알진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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