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확하게 모호한 병, 알츠하이머
삶은 명확하고 모호하다. 태어나고 죽는다. 명확하다.
그러나, 태어나서 죽기까지. 처음과 끝, 그 사이는 모호하다.
명확하게 태어나서 모호하게 살다가 명확하게 죽음으로 끝나는, 인간의 삶. 인생.
태어나고 죽는다는 사실은 객관적으로 명확하다. 하지만 확실한가?
누구도 태어난 순간을 인식하지 못한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을 때 죽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죽는 사람이 있을까. 무수히 많은 방식의 죽음. 또 명확히 인식한다 쳐도 지극히 개인의 영역이다. 주사 바늘의 따끔함은 맞는 사람만 알듯이. 죽는 순간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사후세계 체험, 임사체험 종종 듣지만, 그것도 알 수 없다. 과연 그런지. 그러니 삶은 그저 모호함 뿐인 것 같다.
그런데, 치매는 지극히 명확하게 모호하다. 모호함이 명확한 병. 태어나고 죽는다는 사실. 그 하나만큼은 명확하듯이, 치매도 그렇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처럼. 어떻게 이렇게 아이러니의 연속일까. 브레인 포그. 뇌에 안개가 낀 듯 늘 침침한 상태. 다가오는 저 것이 개인지 늑대인지 모른다는 그 시간 같은. 안갯속의 풍경.
치매는 인생의 지각변동이다. 이전의 모든 것은 무너지고 파묻혀버린다. 뒤틀리고 왜곡된다. 인생이 파괴되는 병, 알츠하이머. 자연스러운 노화가 아니다. 노화는 병이 아니다. 하지만 뇌의 노화라고 하는 알츠하이머는 엄연히 질병이다. 질병분류코드, G30. 하지만 아직 약은 없다. 치매는 때로는 명확하게 때로는 모호하게 극단을 밟고 다닌다. 운신의 폭이 줄어든다. 삶의 영역도 좁아진다. 선택지도 좁아진다. 물심양면으로 그렇게 된다. 치매. 치매에, 치매에 의한, 치매를 위한. 삶의 기준은 명확해진다. 관건은 오직 '유지'.
기대수명이 백 살을 넘겼다나. 따라서 노년의 시작나이는 칠팔십이라야 한다나. 그야말로 인생은 환갑부터 준비하라 야단이다. 그러니 오십 대인 나는 아직 사십 대 초반이란다. 지금부터 십 년을 준비해서 미래 노년을 확실히 대비하라 한다. 이 야단법석에서 나는 예외다. 내가 뭘 할 수 있지. 치매의 척박한 땅에 한 쌍으로 묶여 있는 내가. 묶여 있는 염소가 둥글게 돌아간다. 줄을 풀어 줘도 못 떠난다지. 떠날 때를 대비해서 뭔가 준비하라고 사회는 명령한다. 하지만 떠날 곳도 없다. 내일 당장, 지금 당장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게 인생이다.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다. 뭘 자꾸 대비하래.
치매는 유전자, 생활습관, 몸의 상태. 원인을 찾자면 많다. 지금의 평소 습관을 잘 들여야 치매도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평소 습관이 잘 되어 있으면 치매가 와도 초기는 달라지지 않는다.
남편을 보면 그렇다. <치매에 걸린 뇌과학자>라는 책의 저자 대니얼 깁스는 신경과의사였다고 한다. 30년간 치매환자를 봐왔다고 한다. 십여 년 넘은 지금까지 유지를 잘하고 있다고 한다. 식단과 운동과 독서 그리고 사회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삶은 하루의 습관을 얼마나 잘 유지하느냐에 따라 다르기는 하다. 병이 걸렸어도 유지를 한다는 것. 그것은 중요하다. 남편이 이만큼 유지하는 것도 평소 습관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치매 게시판에도 경도인지장애 초기인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평소에도 책 읽기나 공부는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은 평소에도 책을 많이 읽어 왔다. 일 년에 백 권은 평균이었던 거 같다. 그 치매 걸린 의사도 그랬다고 한다. 남편은 이제 초로기 마의 구간, 3년 차 진입하고 있다.
오뉴월 땡볕. 반나절 차이도 차이라던데. 남편의 치매 테스트용 시계 그림이 확연히 바뀌고 있다.
일 년 전에는 치매가 아닌 언니와 내가 오히려 치매인가 싶을 정도로 시계그림이 단순했고, 남편의 시계는 세밀하고 꼼꼼하고 장식도 화려했다. 그런데 최근에 그린 시계는 누가 봐도 엉성하다. 게다가 낮 4시와 새벽 4는 다르다는 말까지 해서 나는 또 가슴이 철렁했다. 꼬투리 잡는 눈으로 보면 끝도 없다.
그럼에도, 아직은 여전히 꾸준하다. 글 쓰고, 책 읽고, 운동하고, 식단 하고, 취미활동한다. 이 습관은 지금까지는 유지되고 있다. 이대로만 지켜나간다면 할 만하지 않을까. 모호하지만, 기대하는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학습하는 인간'이었던 남편은, 치매 후 '유희하는 인간'으로 변용되고 있다.
남편은 결과적으로 준비된 노년이었는지 모른다. 치매라는 변수를 만났지만... 누가 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