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하는 인간
결과적으로 남편은 유희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치매인데 취미를 즐기는 것인지. 취미를 즐기는데 치매가 있는 것인지.
근로능력상실 이후 남편은 취미로 버티고 있다. 일은 못한다. 남편은 알츠하이머다.
알츠하이머병 진단받고 우리는 착수했다. 지금의 이 상태를 길게 유지하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쇼생크' 감옥에 가자마자 '탈출' 실행에 착수한 앤디 듀프레인처럼. 치매 진단받자마자 우리도 그래야 했다.
다른 방법은 없다. 앤디에게 오직 탈출만 살길이듯, 우리의 치매 탈출은 오직 현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옛날 김수현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에서 배종옥의 시아버지는 치매다. 부자다.
'차 대기 시켜' '어디든 먹으러 가' '어디든 구경가' '당장' 그 정도 재력에 그 정도 나이면 치매가 그렇게 비극은 아니다. 하지만 웬만하면 질병과 가난은 한패다. 누가 먼저건 간에.
배 타고 일본에 갔었다. 보름이었다. 배에서 보름달을 봤다. 망망대해라더니.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라더니.
그랬다. 칠흑같이 어두운 망망대해의 보름달. 의지할 오직 하나. 달.
치매는 칠흑의 어두운 망망대해에서 달이 사라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남편도 결과적으로 나름 노년을 준비했던 것이다.
공부하는 인간이지만, 진정 유희하는 인간이 되었다.
남편의 일과는 언뜻 학교 다니는 학생 같다. 국영수 예체능 위주로 사는 것도 같다.
제시간에 먹고 제시간에 잔다. 책 읽고 글 쓰고, 영어, 수학, 한자 공부하고. 걷고 뛰고 헬스 하고.
피아노와 시낭송은 과외활동? 2학기 취미반은 두 개 더 늘었다. 가곡합창반과 사군자 문인화.
그래서 피아노는 당분간 쉬겠다고 했다.
왼손과 오른손을 헷갈려하며 내내 스트레스받았다고 선생님이 말했다. 그랬겠지.
일 년 만에 시계를 그려 보랬더니 확연히 치매환자가 그린 시계다.
숫자도 없는 엉성한 4시 25분을 그리면서, 남편이 말한다.
"낮 네시하고 새벽 4시는 달라."
누가 봐도. 치매는 진행되고 있다.
글씨체도 완전히 달라졌다. 언젠가는 글자도 잊겠지. 서서히 그렇게 되겠지.
과목이 바뀌고 수준이 달라지겠지. 그러니 지금 실컷 더 바쁘게 놀아야 한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공부가 곧 놀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