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 자네는 기독교로 위장된 공산주의 혁명분자일 뿐이야. 어쩔 수 없지. 나는 자네의 위장된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낼 것이야!
철수의 뒤에 있던 5명의 청년들이 당장 요한 일행을 덮칠 기세를 보였다. 철수가 그들을 제지했다.
- 요한, 내 경고하지. 세상을 바꾸려는 우리의 목적은 선명해. 프롤레타리아의 세상, 오클로스의 세상은 기필코 올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몸 조심해라. 다음에 보면 우린 적으로 만나게 될 거야.
철수가 일행과 함께 골목길로 사라졌다.
장요한은 동아시아연구로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인 '70학번 신학과 졸업생 명단'과 71학번 이후의 졸업생들 명단을 응시했다. 그것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그가 선별해야 할 명단들의 지도였다.
요한은 볼펜으로 이름 옆에 자신만의 기호를 기입했다.
○ (포섭 대상): 가난하지만 신념이 약한 동기.
△ (감시 대상): 시골 교회에서 조용히 목회 중이나 언제든 운동권에 장소를 제공할 인물.
× (제거 및 구속): 이미 강철수의 노선에 깊이 발을 들인 자들.
- 박형식, 너는 전남 보성에서 목회를 하고 있구나. 네 성격에 분명 수배자들을 숨겨주고 있겠지. 이성수, 너는 인천 공단에서 위장 취업 중이군.
요한은 수유리 시절의 일기장을 펼쳤다. 그는 동기와 후배 명단 위에 손을 얹고, 단 한 번도 보내지 못할 사죄의 편지를 마음속으로 썼다.
"박형식에게."
너를 구출하던 날, 네 피가 내 옷에 묻었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지키려던 질서가 네 살점을 뜯어 세운 것이었음을. 너를 감옥으로 보낼 내 보고서는 이제 내 심장을 찌르는 칼날이 되었다. 미안하다, 형식아.
"이성수에게."
너를 역시 '제거 대상'으로 분류하던 날, 나는 네가 야학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던 그 맑은 눈망울을 일부러 잊으려 했다. 너를 유령으로 만든 건 철수가 아니라, 공포에 질려 방패 뒤로 숨어버린 나였다.
"강철수에게."
철수야, 우리는 같은 우물물을 마시며 같은 하나님을 불렀다. 그런데 왜 너는 불이 되고 나는 얼음이 되었을까. 너를 죽여야만 이 전쟁이 끝난다는 사실이, 사실은 나 자신을 죽여야 한다는 말처럼 들려 괴롭구나.
요한은 명단 마지막 줄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 철수의 이름 아래에 '유다'라고 썼다. 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 일기장 위에 떨어졌다. 요한의 눈물은 70년대의 순수했던 수유리 노을처럼 붉게 번져갔다.
요한은 이성수의 이름 위에 굵은 가위표를 그었다. 그는 이들을 잡아넣는 것이 그들의 영혼을 빨간색으로 물들지 않게 하는 유일한 '구공(救共)'이라 믿으며 스스로를 위악(僞惡)으로 무장했다. 하지만 명단 마지막에 적힌 '강철수'라는 세 글자 앞에서 요한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그에게 포섭되어 그와 활동하고 있는 73학번 김강산, 박충구의 이름에 굵게 표기된 × 기호를 보았다. 이미 강철수의 노선에 깊이 발을 들여 강철수를 따라 북한을 2번 방문한 자들.
그는 동아시아 연구소의 조직을 새롭게 강화하고, 신변 경호를 위해 믿을 만한 측근 4명을 추가, 선별했다.
요한은 강철수가 배포한 기독교 서적으로 위장된 공산주의 서적에 심각하게 영향을 받은 기독교 운동권 여대생의 예를 떠올렸다.
여대생 ‘강민주’는 강철수의 교재 『갈릴리의 목수』를 보고 독후감을 남겼다.
… 촛불 하나에 의지해 읽어 내려가는 이 책의 문장들은 내가 평생 교회에서 배웠던 ‘순한 양’의 복음을 난폭하게 뒤흔들었다.
나는 책장을 넘기며 전율한다. 교재 속에 묘사된 예수는 성전 정화의 채찍을 든 투사이며, 골고다의 언덕은 로마 제국주의에 맞선 프롤레타리아의 최전선이다. 내게 기도는 정적인 간구가 아니라, 이제 거리로 나가 돌을 던지는 행위가 되었다.
나는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다. 내 머리카락이 방바닥에 떨어질 때, 나는 그것을 구습(舊習)의 탈피이자 부르주아적 자아의 죽음이라 정의한다. 내일 아침, 나는 가방에 화염병 재료를 채울 것이다. 나의 눈에 비친 십자가는 이제 가련한 구원의 상징이 아니라, 압제자의 심장을 찌르는 붉은 창(槍)이다. 죽음은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죽음은 곧 영원한 해방이자 역사로의 편입이라는 확신이 나의 혈관을 타고 흐른다…
강철수의 치밀한 사상 공작은 요한의 예리한 분석에 의해 모두 그 꼬리가 밟히기 시작할 것이다.
요한은 현재 한국 대학 운동권과 다양한 노동자 조직에서 치열하게 '민중파'와 '민족파'의 사상투쟁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조만간 사상의 체계를 정립하고 자체 내의 사상과 세력투쟁을 거쳐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할 것이다. 독재권력과 반미가 버무려져 한국에 거대한 위기가 조성될 것이다.
조만간 나라에 위기가 얼마나, 어느 정도로 덮칠 것인지는 요한도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커다란 위기는 갖가지 사건으로 한반도를 덮칠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무고한 청년들이 각기 다른 신념을 품고 사지로 뛰어들게 됨을 안다. 얼마나 많은 젊은 청춘들이 희생될까. 얼마나 많은 청춘의 시간들이 불타오를 것인가. 그는 최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 최연, 나는 기필코 그대와 인생을 함께 할 것이다. 이 길이 아무리 어렵고 험할지라도.
같은 시기, 일본 도쿄의 조총련 본부 근처. 강철수는 동기와 후배 50여 명의 명단을 펼쳐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요한과 달랐다. 그는 '신앙'과 '가족'이라는 가장 약한 고리를 파고들었다.
철수는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명단 중에 4년 후배인 '최 전도사'의 어린 딸이 심장병을 앓고 있으나 수술비가 부족하여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교포 사업가로 위장해 최 전도사에게 접근했다.
- 최 전도사, 하나님의 일도 돈이 있어야 하는 법 아닌가? 이 돈으로 아이부터 살리시게. 보답은 천천히, 그저 교회 게시판에 우리가 주는 유인물 몇 장만 꽂아두면 되네.
그것은 자비의 탈을 쓴 악마와의 계약의 시작이었다. 철수는 일본 뿐 아니라 한국 한신대 출신의 빚, 과거의 작은 실수, 자녀의 교육 문제 등을 낱낱이 파악하고 선별하여 그들을 서서히 혁명의 소모품으로 잡아나가고 있었다.
철수는 웃으며 명단에 '포섭 긍정 진행'을 뜻하는 붉은 별을 그렸다.
- 요한, 네가 공권력으로 누를 때 나는 사랑으로 옭아맨다. 누가 더 무서운지 곧 알게 될 거야.
강철수는 조총련 지도부와의 만남을 위해 신주쿠의 한 고풍스러운 찻집 뒤편, 굳게 닫힌 밀실의 문을 열었다.
그는 조총련 대남 공작 지도원인 ‘박 동지’와 마주 앉았다. 탁자 위에는 방금 인쇄된 교재의 견본이 놓여 있다.
- 강 동지, 왜 하필 ‘신학’입니까? 더 직설적인 혁명 이론서들이 많지 않습니까?
박 동지의 회의적인 물음에 강철수는 찻잔을 만지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 박 동지, 남조선은 거대한 교회입니다. 그들에게 마르크스를 주면 거부하지만, 예수를 마르크스로 분장시켜 주면 환호하며 받아먹습니다. 신앙이라는 필터는 공안 당국의 검열을 마비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강철수는 교재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 이것은 책이 아닙니다. 남조선 청년들의 영혼 속에 심는 바이러스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읽으며 혁명을 꿈꾸게 만드는 순간, 남조선의 체제는 안쪽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질 것입니다. 신의 이름을 빌려 신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그것이 제가 설계한 이 전쟁의 본질입니다.
그는 이 교재 시리즈를 읽은 한국의 좌파 운동권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의 동향을 몇가지의 예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의 말은 자신감이 넘쳤다.
지도원은 교재를 다시한번 들춰보았다.
- 좋소. 내 강 동지의 계획을 기대하겠소. 내 상부에 강 동지의 활동을 보고하겠소.
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철수의 눈은 이미 해협 너머 불타오르는 서울의 대학가를 향해 있었다. 그에게 신은 도구일 뿐이며, 해방은 그 도구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파괴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