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세계, 침묵의 세계

나는 너를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21회

by 전영칠


1. 영성(靈性)의 시작



나는 20대 후반에 세상을 떠나 20여 년을 수도승과도 같은 삶을 살았다. 46세에 자본주의 세계에서 처음으로 '직장'이라는 세상을 경험했다.

나의 삶은 태어나서부터 '나도 모르게 이미 던져진 선험의 세계'였다.

나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내 생이 시작되는 줄 알았었다. 인생이라는 것이 그저 '나'만 사는 것인 줄 알았었다. 내 마음대로 자율과 자유의지에 의해 사는 것이 내 인생인 줄 알았었다.


그러나 그 게 아니었다. '나'는 '나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정해진 것들이 내 앞에서 나를 이끌었다. 이미 정해진 씨줄과 날줄의 길이 내 인생에 계속적으로 이어졌다.

조상의 선업과 악업 그리고 현생의 업이라는 계산서와, 그 보다 큰 전생의 업으로 계산된 인생이 내가 태어나자마자 정해진 길로 나를 끌고 다녔다.

운명, 그보다 더 큰 숙명은 분명히 존재했다.

이 모든 것은 도의 길을 따라가면서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다.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내 개인적인 인생의 체험담을 써 볼 생각이다.



말했듯이 46세에 낯선 자본주의 세계에 들어가 첫 직장을 찾았다.

도만 닦았지 세상에 아무런 쓸모없는 게 나라는 존재였다. 여기저기 맨 땅에 헤딩하듯 도시를 돌아다녀보니 이미 세상은 각 처소처소마다 '선수'들로 가득한 세상이었다. 알바 등으로 총 17가지를 해보았다.

건물 경비원부터 시작하여 건물 영선, 기계기사를 거쳐 관리소장으로 직장생활이 이어졌다.


도의 세계에서 세상으로 들어간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세상에서 떨어져 도를 닦는 것은 세상 속에서 써먹기 어렵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성속(聖俗)이 따로 없으니 세상에 살면서 도의 생활을 공부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건물 경비원, 기사로 근무하던 시절을 떠올려 본다. 그때 나는 인간 군상의 밑바닥을 보았다. 사소한 일로 고성을 지르는 입주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시를 일삼던 이들, 그리고 정당한 노력을 폄훼하던 순간들.


생의 어느 길목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억울함’이라는 돌덩이를 만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악의,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 수고, 그리고 가슴 깊이 박힌 배신의 파편들. 그것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퇴적되어 단단한 ‘매듭’이 된다. 우리는 이를 ‘카르마’라 부른다.

사람들은 흔히 카르마를 전생의 죄에 대한 벌이나 피할 수 없는 운명론적 굴레로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진정한 영성의 관점에서 카르마는 처벌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아직 풀어내지 못한 ‘에너지의 정체’이자 ‘기억의 습관’ 일뿐이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갈등 구조. 그 속에서 '나'를 죽이는 생활들.


사람을 통해서 닦아야 사람에게 써먹을 수 있는 도가 나온다.

남 밑에서 비천한 입장에 처할지라도 사람을 존중할 줄 안다면 그 인생의 기준은 어떨까? 어느 정도일까?

한국에는 1만 6천 개 정도의 직업이 있다고 한다. '다양한 인간'을 공부한다는 면에서 건물관리업도 도 닦기 좋은 직업이다.

시간이 흐르고, 양자역학적 통찰과 영성적 각성을 통해 나는 그 사건들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2. 용서의 세계



사람이 사람을 용서한다는 차원은 무엇일까?


타인을 용서한다는 것은 그가 저지른 잘못에 면죄부를 주는 도덕적 시혜가 아니다.

무슨 말인가?

용서하지 못해 상대를 미워하는 동안, 나의 에너지는 상대라는 좌표에 단단히 묶여 버린다. 미워하는 대상과 나는 ‘양자 얽힘’ 상태가 되어, 내가 그를 떠올릴 때마다 나의 생명 에너지는 그에게로 흘러 들어가 고갈된다. 상처를 준 사람은 이미 내 곁을 떠났을지 모르나, 용서하지 못한 나는 여전히 그 상처의 현장에 머물며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고 있는 것이다.


카르마의 매듭을 푸는 첫 번째 단계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을 해체하는 일이다.

영혼의 차원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하나의 거대한 의식이 펼치는 연극 속 배우들이다. 어떤 영혼은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 기꺼이 ‘악역’을 자처한다. 그 무거운 배역을 맡아 나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내가 내 안의 빛을 발견하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이 거대한 우주적 농담을 깨닫는 순간, 분노는 경이로움으로 바뀐다.

“저 사람이 저토록 지독한 연기를 하며 나에게 가르침을 주려 하는구나”라는 자각이 들 때, 비로소 분리의 벽은 허물어진다.

남탓을 하면 성장이 멈추고, 자기탓을 하면 발전한다.


용서는 영어로 'Forgive'다. 이는 '먼저(For) 주다(Give)'라는 뜻을 품고 있다. 무엇을 주는가? 그것은 바로 내 안에 갇혀 있던 나 자신에게 '자유'라는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상대를 용서하는 순간,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타인의 형상은 힘을 잃고 흩어진다. 그리고 내가 보는 것은 상처 입은 채 웅크리고 있던 조금 전의 나다.



너를 용서하는 순간, 나는 내 안에 갇혀 있던 나를 구출한다.


이 문장은 내 생을 관통하는 고백 중 하나이다. 내가 건물 관리 경비, 기사, 소장 시절 나를 무시하던 이들을 용서했을 때, 비로소 나는 ‘관리소장이라는 역할’에 갇혀 괴로워하던 나를 구출할 수 있었다. 그들을 내 마음의 감옥에서 방생하는 순간, 정작 감옥 문을 열고 걸어 나온 것은 나 자신이었다.

용서는 나를 향한 ‘환대’이다. 내 안에 엉키고 설킨 부정적 에너지의 매듭을 하나하나 풀어내어, 우주의 본래 흐름인 사랑과 평온으로 복원하는 신성한 의식이다.

우리는 모두 근원에서 온 빛의 존재들이다. 카르마라는 매듭은 그 빛이 잠시 굴절되어 나타난 그림자일 뿐이다.

매듭이 풀린 자리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분다. 더 이상 누구를 탓할 필요도, 스스로를 자책할 필요도 없는 완벽한 정적의 상태. 그것이 바로 내가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단 한 번도 너를 버린 적 없는’ 우주의 진심이다. 우리가 겪는 고통은 결국 나라는 존재의 광활함을 깨닫기 위한 정교한 장치이다.

고통이 없으면 진정한 기쁨과 해방의 맛을 모른다.


오늘도 나는 걷는다. 발걸음마다 카르마의 잔해들이 흩어지고, 그 빈자리에는 나 자신을 향한 따뜻한 환대의 꽃이 피어난다. 용서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내 안의 우주가 다시금 조화롭게 박동하기 시작하는, 생의 복원이다.



3. 침묵(沈默)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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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세계는 어떤가?


올해 1월의 강화도 폭설 속의 염하에서 보았던 고요함(나는 너를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12회 '삶이 곧 사마디이다' 참조)이 사실은 근원과의 가장 뜨거웠던 대화였음을 고찰한다.

소음이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들리는 존재의 소리.


침묵의 세계는 용서의 세계보다 한 차원 더 깊다.



세상에 대해 침묵을 하든 침묵을 하지 않든 하늘이 정한 뜻은 변함이 없다. 그 뜻은 물 흐르듯 강을 따라 흐르며 마침내 목적지인 바다에 도착한다.

그대는 뭇 별들처럼 많은 세상 인간들의 소리로 바다가 역류하여 강으로 흐르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100억 명의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켜도 침묵은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침묵은 소리의 반대말이 아니며, 모든 소리를 품어 안는 근원의 바다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대답이 이미 들어 있는 충만한 상태이다.

침묵의 세계는 용서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다.

오늘도 나는 근원의 자리에 스위치를 꽂은 채, 그 소리 없는 거대한 흐름 속에 나를 맡긴다.

(2026.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