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세계적인 명품 패션브랜드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전시회를 개최한 적이 있다. 마침 초대권을 얻어서 주말을 이용하여 다녀왔다. 두 달 간 진행된 전시의 끝물에 방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회장을 찾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특히 앳된 얼굴의 20대들이 많아서 놀라웠다. 브랜드의 역사나 상품 가격을 생각 해 본다면 누구에게나 대중적인 브랜드는 아니기 때문이다.
'디올 정신'이라는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이 전시회는 브랜드의 철학과 성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작 쇼윈도에 걸린 핸드백 하나에도 숨겨진 뒷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고전 스타일부터 현대 트렌드에 맞춰 거듭나는 패션의 흐름이 전시 공간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1954년 FW뉴욕컬렉션에서 발표했던 칵테일 드레스를 보며 2015년 서울의 나는 묘한 감상에 빠졌다. 시대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역사 속 유행을 바라보는 일에는 패션과 디자인 이상의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가.
역사가 만들어 준 고급스러운 가치
전시장을 빠져나와 나는 DDP를 둘러 보았다. 완공된지 일 년이 갓 지난 이곳은 디자인 서울의 표상이기도 하다. 영국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를 맡았다. 현대의 조형미를 한껏 드러내는 하이테크 건축물로 서울시는 이 곳을 문화·패션 융성의 기반으로 활용 중이었다. 나와 일행은 DDP 내의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요기를 떼우고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이 곳의 유명한 LED장미 조경을 보기 위해서였다. 꽃잎 모양의 전구에 불빛이 들어오면 아름다운 꽃밭이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이를 볼 생각에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어둑해진 DDP에서 내 심장을 멎게 만든 것은 따로 있다. 옛 동대문야구장의 조명탑이었다. DDP와 어울리지 않는 구닥다리 타워는 대체 뭐지, 하는 순간 이 자리가 무엇이었음이 퍼뜩 떠올랐다. 여기가 바로 동대문야구장을 비워낸 서울시의 노른자 땅이로구나. 수 년 전, 서울시는 낡고 허름한 동대문야구장을 헐어버리겠다고 발표하였다. 도심 한 가운데 위치한 골칫덩어리같은 야구장 대신 첨단 서울의 표상이 될 세련됨을 시는 원하였다. 일각에서 야구장 철거에 대한 반발을 드러냈으나 서울시는 수 천 억원의 예산을 들여 대규모 복합문화시설을 지었다. 바로 DDP였다.
홀대받은 빛바랜 기억들
동대문야구장은 어떤 곳일까. 완공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이지만 국내에서 본격 활용한 건 해방 이후 1958년 부터다. 그 시절에는 조명 시설이 갖춰진 야외 경기장이 없었다. 동대문야구장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주간 경기만 진행되었다. 허나 1963년 제5회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대표팀 선수들이 귀국 후 환영 만찬에서 '서울에서도 야간 경기를 치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면서 조명 설비가 세워졌다. 이윽고 이 곳에서는 국내 최초로 어두운 밤에도 야구 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
고교 야구가 인기를 끌면서 동대문야구장은 국내 야구 메카로 우뚝 솟았다. 매년 한국 고교야구 4개 대회의 최강자를 가리는 무대가 펼쳐지는 곳이었다. 그 만큼 고교 야구의 진기록과 명장면은 모두 여기서 쏟아져 나왔다. 비단 학생 선수들의 추억뿐일까. 아는 선배는 고교 시절을 회상하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모교 야구부가 창단 처음으로 황금사자기 결승에 진출하여 전교생이 새벽부터 버스를 타고 마산에서 동대문야구장으로 응원하러 다녀 왔다고. 수 십 년도 지난 과거지만 학창 시절의 기억이 어릴 때 본 영화처럼 조각 조각으로 어렴풋이 떠오르고는 한단다.
비슷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바라며
1946년 프랑스 파리의 어느 골목에 크리스티안 디올은 자신의 이름을 딴 매장을 오픈한다. 이후 매 시즌 컬렉션마다 뉴 룩을 선보이며 전 세계 여성의 사랑과 선망을 얻었다. 그리고 70여 년 간의 우아함(브랜드의 신념)을 끌어 모아 서울 동대문구의 DDP에 한껏 펼쳐 놓았다. 발자취를 따라 가며 디올의 향기에 흠뻑 취한 내 얼굴은, 몇 시간 뒤 행인들의 도보를 밝히고 있는 옛 동대문야구장 조명탑을 발견하고 창백해졌다. 그저 이 메마른 기둥 하나만 남겨두는 것으로 90년의 가치를 보존 해 내었다고 봐줄 수 있을까. 이 곳에서 가로등의 역할을 하려고 세워진 조명탑이 아닐 텐데 말이다. '동대문의 정신'은 어디서 찾으면 좋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