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영화 ‘무명 無名’_밟힌 다리 위의 복음

by 고요한 낙하

1. 프롤로그 – 영화관에서 시작된 물음

조용히 꺼지는 조명, 낯선 제목.
*무명(無名)*이라는 영화를 보기 시작할 때만 해도, 내가 이렇게 깊은 물음 속으로 빠질 줄은 몰랐다.
그날, 어두운 영화관 안에서 나는 시간을 거슬러 조선 말의 땅 위에 서 있었다.
을사늑약으로 신음하던 그 시대.
그 땅에 찾아온, 이름 모를 일본인 선교사 부부.

왜 그들은 일본에서 누릴 수 있었던 안락함과 부귀를 포기하고 이 땅을 선택했을까?
왜, 고통받는 조선의 백성들을 위해 자신을 그렇게까지 낮출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나는 지금, 누구를 위해 살고 있는가?


2. 일본 선교사의 모습에서 본 ‘예수님의 다리’

영화는 일본에서 온 두 명의 선교사와 그들의 아내를 중심으로 흘러갔다.
그들은 단지 복음을 전하러 온 사람이 아니었다.
기꺼이 밟히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선교사의 아내가 전도자들을 먹이고 재우고 돌보다 쌀이 떨어지자,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쌀과 바꿨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일본 여성에게 머리는 단순한 미(美)가 아니었다. 존엄이자, 생명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녀는, 조선 사람들을 위한 식탁을 차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잘라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간 이름이 있었다.
스데반.
바울.
그리고 예수님.

한 일본 선교사의 삶이 내게 복음서의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조선과 일본 사이를 잇는, 예수님이라는 다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영화 속 누군가의 대사가 가슴 깊이 박혔다.

“우리를 하나님과 이어주는 다리가 예수님이듯, 일본과 한국을 잇는 다리도 예수님입니다.”


그 말은 단지 나라와 나라 사이의 화해를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나와 세상 사이에도, 예수님이 다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3. 신앙의 열정에서 현실의 모순으로

영화를 보며 내 안에서 오래된 질문이 깨어났다.
"하나님은 왜 일본에 먼저 복음을 주셨고, 지금은 왜 한국에서 복음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가?"
하나님은 일본과 한국에 어떤 계획을 품고 계셨을까?

한국은 한때, 복음을 붙든 나라였다.
조선이 가장 암울했던 때, 복음은 빛이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천국의 소망이 되었고,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생명의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기독교 대학이 세워졌던 그 거룩한 터 위에, ‘인서울 4년제’라는 간판만 남아 있다.
복음을 전하는 통로였던 대학은, 이제는 성공을 위한 입구가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보다 ‘스카이’라는 나라를 꿈꾸게 된 것이다.


4. 우리 다음세대와 잊혀진 복음의 현장

올해, 나는 고등부 교사를 맡게 되었다.
아이들의 대화는 익숙한 단어로 가득하다.
“못 들어가면 인생 망해요.”
“주말에도 도서관 가야 해요.”
“학원 빠지면 불안해서 잠이 안 와요.”

그들에게 복음은 낯설고, 대학은 구원이다.
물론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우리가 그런 시대를 만들었다.
나조차도, 신앙보다 안정을 택했던 적이 많았으니까.
어쩌면 나는, 복음의 다리 위에서 내려와 성공의 길을 걷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들을 보며 다시 그 다리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무명으로 사라져간 선교사 부부처럼,
예수님처럼,
세상 속에서 밟히는 존재가 되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5. 다시 그 다리 위에 서기까지

나는 IMF가 터진 해에 태어났다.
그 시절, 모두가 어려웠지만, 함께 이겨내려는 마음은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 깊은 곳엔, 복음이 있었다.
하나님을 의지했고, 함께 기도했다.

그렇기에 이 나라가 회복될 수 있었던 거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지금은?
풍요로워졌지만, 더 공허해졌다.
성공했지만, 더 불행해졌다.
왜일까?

나는 그 해답을 무명에서 찾는다.
밟히는 다리가 되어도, 복음이라는 이유 하나로 이 땅을 선택한 이들.
그 이름 없는 헌신들이 이 땅에 복음을 심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다시 그 다리 위에 서고 싶다.
예수님이라는 다리.
하나님과 나를,
사람과 사람을,
그리고 일본과 한국을 이을 수 있는,
그 복음의 다리 위에.



25.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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