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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quaviT Aug 15. 2016

하울의 지저분한 성 - 2

프랑스 - 콜마르



  여전히 많이 남은 시간이 이제는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먼저 이야기했듯 콜마르의 예쁜 집들은 사실 다 상점이기에, 따로 들어가 볼 일이 없었고 따라서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장소도 한정적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돈이 없는데 굳이 들어가 볼 이유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이 여행기를 쓰면서 가장 후회하는 것도 사실 그거다. 좀 더 뻔뻔하게 - 좀 순화해서 말하자면 당당하게 행동할 걸 그랬나, 하는 것. 



  아직도 서너 시간을 더 때워야 하는 상황. 콜마르의 구시가지는 그다지 크지 않기에 이미 어지간한 구경은 다 했고, 뭔가 다른 걸 찾고 있던 내게 떠오른 건 콜마르의 관광안내소였다. 사실 가장 먼저 방문했어야 했겠지만, 일종의 반항심이라고 해야 할까,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보세요-하는 게 별로 맘에 들지 않았던 나는 어지간하면 관광안내소를 들르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이 많이 남은 날은 역시 예외.


이 부부는 서로 깨 볶으며 잘 살고 있으려나


  관광안내소로 가는 길을 꽤 헤매어서 갔던 기억이 난다. 시간도 남았기에 급하지 않아서 그냥 지도도 보지 않고 발길 가는 대로 걸은 탓이다. 바람이 좀 부는 날씨라 지도가 이리저리 휘날리는 게 짜증 나기도 했고.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덕분에 재미있는 건 더 많이 봤더랬다. 하객이나 주위에 친구들도 없이 신랑 신부 단 둘이서 턱시도에 웨딩드레스 입고 어디론가 가는 모습이나



  굉장히 예쁘게 만든 푸딩처럼 생긴 비누 같은 것 말이다. 특히 뒷줄에 보이는 오리모양 비누가 워낙 귀엽게 생긴 탓에 하나 사 오고 싶었는데, 여행 내내 캐리어 안에서 구르다 보면 모가지가 뚝 하고 꺾일 것 같아 그냥 사진에만 담아왔다. 보관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못 사 온 물건이 너무 많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만, 다시 갈 기회가 생긴다면 숫제 빈 캐리어 하나를 기념품 저장용으로 가져가야 할라나보다. 



  좀 더 걷다 보니, 음식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나왔다. 사진 찍힌 날짜를 보니 5월 4일 수요일, 그러니까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여유를 만끽하고 있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아마 대부분은 관광객이겠지만, 어느 한적한 오후의 풍경이 워낙 보기가 좋았다. 저 테이블에 앉아서 맥주라도 한 잔 할 걸 그랬나 보다.




  길거리를 메운 음악소리는 아담한 빈 공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메르헨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아코디언 연주 소리가 참 예뻤다. 잠시 기대어 서있고 싶은 풍경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유럽 여행의 클리셰적인 풍경이랄 수도 있겠지만, 이런 클리셰라면 몇백 번이나 맞닥뜨리고 싶다. 



  


  조금 더 걸어나가니, 드디어 관광안내소가 보였다. 관광안내소라고는 생각도 못할 만큼 멋진 건물이어서, 사실 좀 헤맸다. 좀 더 현대적인 건물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 관광안내소는 무슨 박물관 아니면 시장 공관 같은 건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기를 몇 분, 저 건물 안에서 관광객인 듯한 사람들이 지도를 들고 나오는 걸 보고는 혹시나 해서 들어가 봤더니 역시나. 조금 뻘쭘한 기분이 되어서 들어가 보니, 역시 콜마르 관광 지도가 있었다. 찬찬히 뜯어보니, 만화 박물관이 있다는 모양. 가보기로 했다.




  이 글을 쓰면서 사진을 다시 보면, 콜마르에서 찍은 사진은 못 나온 사진이 없다. 못 나온 사진도 여행의 흔적이다,라고 생각해서 지우지 않는데, 콜마르는 정말 예쁜 흔적만 남은 셈이다. 여길 봐도 예쁘고, 저길 봐도 예쁜 마을이니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 


  



  콜마르 만화박물관에 도착했다. 입구 사진은 찍어두지 못한 게 아쉽다. 들어가 보니, 의외로 일본의 고전 로봇 장난감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92년생인 나에게는 생소한 로봇들이 한가득이라, 일본 로봇 만화의 전통이 꽤나 길기는 하구나, 싶었다. 이런 오래된 장난감들을 보고 있노라면, <현태준, 이우일의 도쿄 여행기>에서 봤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딸의 선물을 사러 장난감 가게에 들른 이우일 씨가 어렸을 적 무지 갖고 싶었던 추억의 로봇을 보고는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사 와서는 집에 돌아와서 만들어보니 그 허접한 퀄리티에 실망하고 말았다는 이야기. 어렸을 때는 그렇게 멋져 보였는데, 그냥 만나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 듯했다는 표현이 꽤 인상적이었다. 이 로봇들도 누군가에겐 그런 존재일지도.




  보다 보니 낯이 익은 얼굴이 보인다. 철인 28호다. 어렸을 때 봤던 기억이 나는데, 물론 내가 어려서 봤던 건 개정판이었고, 철인 28호의 디자인도 저렇게 투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와서 보니 정의를 수호하는 로봇이라기엔 너무 친숙한 디자인이다.




  이런 아날로그 느낌 가득한 로봇들도 좋았지만, 사실 내가 콜마르에서 보고 싶었던 건 더 오래 전의, 그러니까 인형극에 쓰이는 마리오네트라던가, 구체 관절 인형이라던가 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클래식 장난감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게 실망스러웠다면 실망스러웠던 점. 뭐 결국은 박물관장 마음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도대체 하록 선장의 얼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박물관은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2층으로 가니 스머프 마을과 그 외 여러 가지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에 눈에 띄는 건 은하철도 999의 원작자인 마츠모토 레이지의 또 다른 걸작인 '캡틴 하록'의 피겨들이었다. 옛날 제품답게 다소 조악한 퀄리티가 매력적.




  그렇게 돌아다니고 있으려니, 직원이 와서 인형 오케스트라가 열린다고 가보란다. 어차피 볼 건 거의 다 본 후였기에, 미련 없이 가보니 꽤나 큰 인형들의 오케스트라가 있었다. 물론 저 인형들이 바이올린을 켜거나 하는 건 아니고, 그냥 녹음으로 나오는 음악에 맞춰서 연주하는 '척' 몸을 흔들거나 활을 켜는 것이다. 그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인형들이 쓸데없이 무섭게 생겼다는 것 정도. 당장이라도 '쏘우'에 나와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것처럼 생겼다.




 박물관들이 대개 그렇듯, 콜마르 만화 박물관도 기념품점을 마지막으로 관람이 끝나게 되어 있었다. 위에 보이는 피겨가 구매욕구를 상당히 부채질했는데, 가격을 보고 내 욕구도 짜게 식었다. 미안해요, 터미네이터.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슬슬 낙조가 들고 있었다. 카우치 서핑하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도 거의 다 되었기에, 그만 돌아가도 되는 시각이었다. 그렇게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는 내 발걸음을 멈추는 건, 역시 아쉬움이었다. 다 봤다고, 이 정도면 아쉬움이 없겠다고 생각해도 역시 떠날 때가 다가오면 아쉽다.  그래도 볼 건 다 봤다며 그 아쉬움을 달래며 버스정류장으로 향했지만, 역시 그냥 떠나기는 아쉬웠다. 발걸음을 돌렸다.




  사실 아쉬움을 달랜다고 해봤자, 할 수 있는 건 가기 전에 쁘띠 베니스를 한 번 더 눈에 담는 일 정도였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걸 그래도 한 번 더 봤다는 것. 아쉬움은 눌러두는 것이 아니라, 달래줘야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카우치서핑의 호스트가 배려해준 덕에, 콜마르의 야경을 찍으러 나올 수 있었다. 구시가지까지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한 이십 분 정도를 걸어나온 것 같은데, 그 사이 서로 재미있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카메라에 담긴 콜마르 구시가지의 사진은, 그냥 아련하게 남았다. 콜마르 만화박물관의 입구 부근에 전시되어 있던 옛날 로봇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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