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병원 앞 아파트에 사는, 갓 18개월을 지난 여자아기가 감기로 엄마와 함께 찾아왔다.
엄마말에 따르면 그 아이는 병원만 들어서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 울어대는 아기였기 때문에
여러 소아과를 다녀봤지만, 너무 울어 어디서도 진료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고 했다.
나는 가정의학과로 개원했지만 소아 환자의 비율이 높았다.
처음 내과에서 근무한 이후 몇 차례 소아과병원에서 일을 하며 소아 진료도 해왔기 때문이고
영유아 검진과 소아대상 국가 예방접종을 했던 것도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아이 엄마들은 가정의학과 임에도 우리 병원을 소아과처럼 여기며 아이들을 데리고 왔고
지역맘 커뮤니티에서 좋은 후기가 올라오면서 개원 초기임에도 소아 환자가 급격히 늘었다.
그리고 그 아이 엄마도 병원 후기를 보고 내원하였으며
그 아이가 진료를 받는 동안 기특하게도 울지 않자 아이 엄마가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그 이후로, 그 가족은 우리 병원을 믿고 계속 찾아왔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난 토요일 오후, 아이가 감기로 내원했다.
그날도 울지 않고 진료를 잘 받았다. 아이 진료가 끝나고 아이 엄마가 비만 관련 상담에
관심을 보이며 다음 주 월요일 다시 상담하러 오겠다고 웃으며 병원을 나섰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
병원 앞 저층 아파트 단지 한동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일요일 밤 화재가 있었다는 소식을 나중에 전해 들었다.
그 뒤로 몇 주가 지난 뒤, 아이가 진료를 보러 왔다. 그 날은 아빠와 같이 왔다.
울지 않았던 아이가 그날따라 울기 시작했고 아이 아빠의 표정은 진료내내 어두웠다.
그리고 진료가 끝나고 그에게서
아이 엄마가 화재로 사망했다는 믿기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아빠와 친할머니가 번갈아 가며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왔다.
시간이 흘러 18개월이었던 아기는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또 시간이 흘러 어느새 3학년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진료실에서 아이 앞에서 진료 중에 무심결에 나오는 '엄마'라는 말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진료 중 무심코 나오는 말조차, 아이에게 상처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간호사들도 나름대로 그 아이 앞에서는 말조심을 하는 것 같았다.
이제 아이에게는 엄마의 얼굴, 엄마의 목소리, 엄마의 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아이가 엄마라는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엄마라는 존재가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안쓰러움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아이가 병원에 올 때마다
한 번 더 손길을 건네고, 한 번 더 청진기를 대고 더 꼼꼼하게 살펴주는 것 그뿐이었다.
앞으로도 아이는 커가며 여자아이로서 경험해야 할 많은 '처음'을 엄마 없이 맞이해야 한다.
초경, 사춘기, 결혼식, 그리고 친정이라는 둥지 속에서 느낄 사랑.
그 아이는 지금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거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사를 가면서 더 이상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그 아이가 씩씩하게 자라기를 바란다.
엄마의 부재를 딛고, 자신만의 세상에서 꿋꿋하게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을 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