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알게 된 DIY 그림 그리기 키트가 있다.
캔버스에는 작은 숫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고, 그 번호에 대응하는 물감 대로 칠해 넣으면
그럴싸한 한 점의 그림이 완성되는 제품이다.
복잡하다면 복잡하고 단순하다면 단순할 수 있는 이것을 처음 본 순간
부모님 생각이 났다.
서울살이를 마무리하고 고향 근처로 내려가 사신 지 벌써 8년.
이제 아흔한 살과 여든아홉 살이 되신 두 분은 다행히 건강하게 지내신다.
무료한 오후가 있을까 걱정이 들기도 하고, 그 연세에 머리를 써야 치매 예방에도 좋을 것도 같았다.
이전에도 한때 두 분이 꽤 많은 조각의 퍼즐을 맞추신 적도 있었다.
그때도 두 분은 작은 조각들을 정성스레 맞추며 한동안 열중하셨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색다른 시간을 보내실 수 있을 것 같아 DIY 그림 그리기 중
해바라기와 수국 그림을 한 세트씩 골라 부모님께 보내드렸다.
며칠 뒤, 어머니에게서 사진을 찍어 보내주셨다.
먼저 완성된 것은 수국이었다. 수백 개의 작은 면적 속에 파랑과 하늘빛이 촘촘히 들어차 있어
나름 제법 수국꽃처럼 보였다.
이어서 해바라기 그림도 완성해 보내주셨다.
아버지는 처음 며칠 동안 몇 칸을 색칠해 보시더니 금세 지루해지셨다고 했다.
"애들 오면 내가 했다고 해."
농담처럼 말을 하셨고 결국은 어머니께서 남은 부분을 모두 채우셨다고 한다.
어머니의 그림을 보면서 아내와 나는 같은 생각을 했다.
"우리도 한번 해볼까?"
각자 그리고 싶은 그림을 선택해 주문했고, 그림이 도착한 이후로는 저녁을 먹은 뒤 식탁에
마주 앉아 색칠 삼매경에 빠졌다. 캔버스에 적혀있는 숫자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작았고
면적은 쉽게 지루해질 만큼 빽빽했다.
노안으로 보이지 않는 숫자는 결국 휴대폰으로 확대하며 보며 칠해야 했다.
얼핏 보면 단순한 취미 같지만, 이 과정은 상상 외로 눈이 빠질 듯했고 상당한 집중을 요구했다.
덕분에 부모님께서 완성하신 그림이 연세 드신 두 분이 하기엔 너무 세밀해 어려우셨을 텐데
정말 잘 칠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엔 훨씬 그림이 큼직한 것으로 다시 보내드렸다.
내가 칠하기 시작한 그림이 슬슬 모양이 나오기 시작한 건 일주일쯤 지나서였다.
처음엔 숫자들의 어지럽게 있는 밑그림이었지만, 하루에 조금씩 시간을 들여 물감을 칠하다 보니
어느 순간 그림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모든 결과물은 결국 시간이 투자되는 만큼 모습을 보이는 정직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그림도 마찬가지.
지루함을 견디고 피로한 눈으로 작은 붓으로 같은 동작을 무한히 반복하는 시간이 지나
비로소 그림은 그림다워졌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마지막 칸을 칠하고 그림이 완성되었다.
완성된 그림은 이제 더 이상 번호의 집합이 아니었다.
색칠한 자리엔 색이 남은 것뿐이지만, 색은 결국 그림이 되었고,
그림 안에는 그걸 그린 우리 시간의 기억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완성된 그림 속의 기억은 오래도록 벽에 걸려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