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다 보면 화려한 겉모습에 취하게 된다. 반짝이는 조명과 그 아래에서 자신을 과장하는 몸짓들 사이로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다니는 것을 보면 나는 종종 이상한 피로감을 느낀다. 다들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저기 있어야만 할 것 같고 저렇게 보여야만 할 것 같다는 강박에 휘말려 있다. 그 장면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으면 이 세상은 본질보다 껍데기를 더 사랑하도록 길들여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껍데기가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속은 텅 비어 있어도 괜찮다는 식의 무언의 합의. 나는 그 합의에 기꺼이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이라서 때때로 이 세상에서 약간의 이방인처럼 느껴진다.
음악회에서도 그 느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음악을 사랑해서 간 자리인데도 공연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여러 겹의 포장을 마주하게 된다. 잘 다림질된 정장과 예식장에 나가도 손색없을 드레스들, 그 사이에서 서로의 격을 확인하듯 흘깃거리는 시선들, 기침 한 번도 조심해야 할 것 같은 공기. 자리에 앉아 팜플렛을 펼쳐보면 나는 종종 아연실색하곤 했다. 음악보다 설명이 더 소란스럽고 연주보다 문장이 더 앞서 있었다. 과장된 찬사와 헐거운 철학이 엉켜 있는 그 종이 뭉치를 보는 순간 나는 내가 무엇을 들으러 이 자리에 왔는지 잠시 잊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팜플렛을 보지 않게 되었다. 화려한 말들과 유혹의 기술들이 내가 귀하게 느낄 그 시간을 덮어버리는 것 같아 불쾌해질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음악회도 마찬가지다. 나는 종종 화려한 드레스에 압도당해 나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정말 음악을 듣고 있는가. 이 무대 위에서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기교가, 의상이, 그리고 학예회 같은 에티튜드가 음악을 넘어 버리는 순간 나는 고개를 떨구고 만다. 손이 먼저 보이고 치맛자락이 먼저 보이고 표정 연기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그 순간 소리는 뒤로 밀려난다. 내가 들으려 했던 것은 소리였고 그 소리가 품고 있을 어떤 진실이었는데 눈앞의 장면들은 끊임없이 나를 겉으로 끌어낸다. 나는 그럴 때마다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어지러워지고 이 공연장에 나와 있는 나 자신이 우스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묻게 된다. 내가 듣고 싶었던 음악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무대에서 들려 나와 내 마음을 울리고 그 공간 전체를 흔드는 배음(倍音), 나는 그 배음(倍音)을 열렬히 원한다. 어떤 음은 그 자체보다도 그 음이 사라진 뒤에 남는 떨림으로 오래 기억된다. 악기의 몸통 깊은 곳에서 시작된 떨림이 공기와 벽과 사람의 몸을 통과해 마지막에는 내 가슴뼈를 살짝 두드릴 때 나는 비로소 음악을 들었다고 느낀다. 그때는 화려한 옷도 기교적인 손놀림도 상관없다. 오직 하나의 진동만이 나를 통과하고 지나간다. 나는 그 하나를 위해 오래 앉아 있고 그 하나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어준다. 배음(倍音)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그 진동 하나가 있는 공연과 없는 공연은 끝나고 난 뒤의 침묵이 다르다. 나는 그 침묵을 듣는 사람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장식과 연출이 붙어 있다. 누구나 조금 더 그럴듯해 보이고 싶어 하고 조금 더 인정받고 싶어 하고 조금 더 안전해 보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설명하는 말들을 덕지덕지 붙이고 다양한 역할과 이미지로 자신을 감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어떤 사람의 말에서 오래 남는 것은 그가 자신을 어떻게 포장했는지가 아니라 말끝에 남는 배음(倍音)이라는 것을. 그 사람이 떠나간 자리의 공기가 어떤 온도로 남아 있는지, 그 사람의 손을 떠난 이야기들이 내 안에서 어떤 떨림으로 되살아나는지, 그것이 그 사람의 진짜 실력이다.
나는 화려한 인생담보다 어딘가 비어 있는 듯 보이지만 묵묵히 버텨 온 사람들의 배음(倍音)을 더 신뢰하게 되었다. 기가 막힌 성공담을 늘어놓지 않아도 되고 자신을 대단하게 포장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말에는 설명되지 않는 무게가 있다. 표정은 담담한데 그 뒤에 지나온 계절들이 빽빽이 숨어 있는 것 같은 얼굴이 있다. 나는 그런 얼굴들을 기억한다. 그들의 배음(倍음)이 나를 오래 붙든다. 그 배음(倍音)은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약간 거칠고 때로는 어둡기까지 하지만 그 어둠이 거짓되지 않다는 사실이 나에게 이상한 위로를 준다.
내 삶을 돌아보면 나 역시 배음(倍音)을 좇아 여기까지 걸어온 사람 같다. 남들이 보기에는 이렇다 할 업적도 없고 눈에 띄는 성취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 안쪽 어딘가에서는 수없이 많은 소리들이 부딪치고 흩어지고 다시 모여 하나의 떨림으로 남아 있다. 생존을 위해 버텨야 했던 날들, 설명할 수 없는 상실들과 바닥까지 떨어지는 경험들, 다 버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한 걸음 더 걸어야 했던 순간들, 그 모든 것들이 내 안에 배음(倍音)으로 남아 내 문장을 만들고 내 선택을 만든다. 나는 어느 날부터 숫자와 성과로 내 삶을 증명하는 일에 흥미를 잃었다. 대신 내가 어떤 배음(倍音)을 남기며 살고 있는지에 관심이 생겼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보여주라고 말한다. 증명하라고 말한다. 성과를 내놓으라고 재촉한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들은 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사랑도 그렇고 믿음도 그렇다. 고독도 그렇다. 눈앞에서 번쩍이는 것들은 금방 눈을 피곤하게 만들고 시간이 지나면 쉽게 잊힌다. 반대로 아무 말 없이 곁을 지켜준 사람, 근사한 조언 대신 조용한 침묵으로 옆에 서 있었던 사람, 보여줄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지만 자존심 하나만으로 버텨준 사람, 그런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그들은 내 안에 배음(倍音)으로 남아 있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약간 어둡게 본다. 그것은 비관이라기보다 어쩌면 정직에 가깝다. 인간의 마음에는 누구나 그림자가 있고 그 그림자를 보지 못하게 하는 온갖 장치들이 사회 곳곳에 깔려 있다. 그러나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그 그림자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배음(倍音)이 있다고 믿는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의 삶에서만 나오는 진동, 실패와 후회와 부끄러움이 뒤섞인 자리에서만 울리는 소리, 그 소리가 나는 좋다. 거짓으로 반짝이는 소리보다 진실로 탁해진 소리가 더 믿을 만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나는 점점 더 조용한 것들을 향해 걸어가게 된다. 사람들 사이의 소음이 잦아들고 내 호흡만 또렷하게 들리는 순간에 비로소 세상의 다른 얼굴이 드러나는 것 같다. 누군가는 그 시간을 외로움이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나에게 그것은 고독에 가깝다. 외로움이 결핍에서 시작된다면 고독은 충만에서 출발한다. 나는 충분히 상처받았고 충분히 실망했고 충분히 무너졌기 때문에 더 이상 번쩍이는 것들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 그 대신 내 안에 남은 작은 배음(倍音)을 어루만지며 오늘을 견딘다.
결국 내가 믿는 세상은 이런 곳이다. 화려함이 진실을 대신하는 세상이 아니라 배음(倍音)이 사람을 증명하는 세상. 누가 더 많이 가졌는지가 아니라 누가 더 깊이 울렸는지가 중요한 세계. 말의 개수보다 침묵의 밀도가, 박수 소리보다 공연이 끝나고 난 뒤의 숨소리가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자리. 나는 그런 세상을 향해 마음을 기울인다. 설령 실제의 세상이 그러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내 작은 세계만큼은 그렇게 꾸리고 싶다.
나는 이제 안다. 이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화려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무대 중앙을 차지할 것이고 배음(倍音)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뒤쪽 어두운 자리에서 조용히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기둥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기둥들 사이 어딘가에 서서 묵묵히 내 배음(倍音)을 만들어가려 한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그리고 이렇게 답한다. 화려함이 주인이 아니라 배음(倍音)이 주인이 되는 세상, 그 배음을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진 사람들이 조금은 더 많아지는 세상. 나는 그 세상을 아직 본 적은 없지만 오늘도 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 언젠가 내가 이 무대를 떠난 뒤에라도 누군가의 가슴 어딘가에서 아주 작게나마 울려 남을 수 있다면, 그 정도면 내가 살았던 세상과 나의 삶은 서로에게 충분한 배음(倍音)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