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두모악
삶을 이끄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꿈을 좇는 줄 알았던 날들조차 욕망이 배어 있었고 욕망을 손에 쥐고 있다고 믿었던 순간들마저 사실은 두려움에 쫓겨 허겁지겁 달린 시간들이었다. 사람은 왜 이렇게까지 흔들리며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은 오래된 돌처럼 내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누구도 답을 알려주지 않았고 나조차 피하려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질문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무엇이 나를 이끌고 무엇이 나를 주저앉히며 무엇이 나를 다시 일으키는가 나는 알고 싶었다.
오늘 나는 한 남자의 서재에서 서 있었다. 빛이 머물지 않는 시간의 틈 같은 공간이었다. 오래된 종이 냄새와 죽은 화가의 침묵이 나무결 사이를 빈틈 없이 채우고 있었다. 붓이 아닌 렌즈로 세상을 그리다 간 사람. 사람은 언제 이렇게 조용해지는가 언제 이렇게 깊어지는가 언제 이렇게 사라지는가 그의 서재를 마주한 순간 나는 그 질문들을 다시 올려다보아야 했다. 그를 이해하기 전에 밀려온 건 ‘나는 왜 이렇게까지 어둡지’라는 자기혐오의 한 문장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이해하기 전에 나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나는 나를 미화했고 나는 나를 속였고 나는 나를 피했다. 그런 내가 누군가의 삶 앞에서 견자가 된다는 건 스스로를 향한 잔혹한 폭로였다.
그 화가는 제주의 결을 평생 들여다보다 갔다. 그러나 내가 본 제주 풍경은 그가 남긴 사진 속 바람이나 나무나 구름이 아니라 그의 사진에 스며든 절망의 잔결이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에서 그의 고독이 들렸고 구름이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그림자에서 그의 아픔이 보였고 비가 내린 사진 앞에서는 그가 감당하지 못한 슬픔이 방 한가득 울리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내 안에도 저와 같은 어둠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 선명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암흑을 숨긴 채 살아간다. 나는 그 사실을 평생 부정해왔지만 오늘은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나는 인정해야 했다. 사람의 삶은 빛보다 어둠으로 채워져 있고 희망보다 절망으로 얼룩져 있고 사랑보다 상처를 오래 품고 산다는 것을.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빛을 보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의 어둠을 자신의 어둠에 겹쳐보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내 어둠을 본 순간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멈추고 여기에서 무너지고 여기에서 묻힐 것 같았다. 숨은 무거워졌고 가슴은 내려앉았고 발끝은 차가웠다. 나는 나를 지나치게 많이 목격해버렸다. 너무 많이 너무 깊게.
그러나 그때 바람이 스쳤다. 아주 작고 미세한 흔들림이었지만 오래 닫힌 창문이 한 번 열리는 것 같은 기척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움직임이었는데 그 움직임이 내 안의 아주 오래된 빛 하나를 건드렸다. 아주 작게 아주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삶은 어둠으로 시작하지만 끝까지 어둠으로 남지는 않는다는 것. 절망은 오래되지만 절망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 사람은 무너져도 어딘가에 남아 있는 작은 빛 하나가 다시 숨을 불어넣는다는 것. 그 미약한 떨림을 나는 외면할 수 없었다.
서재를 나서며 나는 깨달았다. 내 어둠이 나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강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작은 빛 하나가 그 어둠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희망이라 부르기엔 너무 작고 믿음이라 하기엔 너무 연약했지만 그래도 분명히 있었다. 제주에 오신다면 그의 사진 앞에서 당신도 당신의 어둠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는 마지막 남은 따뜻함 마지막 남은 숨 마지막 남은 생의 의지가 있다. 사람은 그 작은 것 하나로 다시 살아간다.
삶은 결국 어둠에서 시작해 어둠을 지나 어둠을 품은 채 빛으로 나아가는 조용한 순례다. 그래서 나는 오늘보다 조금 더 무거운 사람으로 그러나 어제보다 조금 더 밝은 마음으로 서재를 나왔다. 절망과 한숨은 아직 내 안에 남아 있었지만 그 위에 떠오르는 아주 작은 빛 하나가 있었다. 그 작은 희망 하나 때문에 나는 또 내일을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