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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의 환기 Ep.2

by 김경훈


에피소드 2. 사라진 질량, 남겨진 시선


"보영 대리님, 괜찮아요? 다친 데 없어요?"


현우가 휴지를 뭉쳐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을 조심스럽게 쓸어 담았다. 보영은 멍하니 자신의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는 조금 전까지 쥐고 있던 우산 손잡이의 차가운 감촉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남색 3단 우산. 분명히 존재했던 그 물건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난 유리컵으로 변해버렸다.


"과장님... 저기, 제 우산 못 보셨어요?"


보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산이라니요? 보영 대리님 올 때 빈손이었잖아요. 비도 다 그쳤는데."


현우의 대답은 너무나 태연했다. 보영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기억의 오류일까? 아까 유치원 앞에서 바뀐 날씨, 손에 쥐어졌던 낯선 우산, 그리고 지금의 유리컵.


'내가 또... 미쳐가는 건가.'


보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보고 겪은 것이 현실인지 환각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공포가 목을 조여왔다.


"죄송해요. 제가 잠깐 졸았나 봐요. 컵을 깰 생각은 없었는데..."


"아니에요. 피곤해서 그럴 수 있죠. 일단 나가요. 여기 있으면 다칠 것 같아."


현우는 보영을 부축해 카페 밖으로 이끌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 길, 보영은 다시 한번 카페 유리창을 돌아보았다. 아까 현우의 아내가 서 있던 그 자리.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유리창 표면에 누군가 입김을 불어 낙서를 해놓은 듯한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 S ]


알파벳 S? 아니면 뱀이 똬리를 튼 모양? 보영이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을 때, 그 자국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현우가 차를 가져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보영은 민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아이의 작은 손은 따뜻하고 말랑했다.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현실의 감각이었다.


"이모,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


민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응, 이모가 좀 추워서 그래."


"우리 엄마 손도 차가운데."


민서의 무심한 한 마디에 보영의 심장이 덜컹했다.


"엄마? 엄마 손이 차가워?"


"응. 엄마가 안아주면... 음, 냉장고 문 열 때 같아. 그래서 엄마가 안아주는 거 싫어."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발끝으로 보도블록을 톡톡 찼다. 보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현우가 말했던 '별거'의 이유가 단순한 성격 차이는 아닐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곧 현우의 차가 도착했다. 보영은 뒷좌석에 민서를 태우고 조수석에 앉았다. 차 안은 따뜻했지만, 보영은 여전히 한기를 느꼈다.


"집까지 태워다 줄게요. 안 그래도 가는 길이니까."


"감사합니다. 번거롭게 해 드려서..."


"번거롭긴요. 제가 더 고맙죠."


현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핸들을 잡은 그의 손가락에 결혼반지는 없었다. 뺀 지 오래되었는지, 약지 부분에 하얀 자국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차는 밤거리를 부드럽게 달렸다. 라디오에서 나직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현우는 운전하며 틈틈이 보영의 눈치를 살폈다.


"저기, 보영 대리님. 혹시 아까... 창밖에 누구 봤어요?"


현우의 질문에 보영이 움찔했다.


"네? 아니요. 아무도 못 봤는데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아내를 봤다고, 그녀가 괴물 같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행이네요. 사실 아까 아내를 본 것 같아서... 요즘 좀 예민하거든요. 저를 미행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현우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집착이 좀 심해요. 처음엔 사랑인 줄 알았는데... 점점 숨이 막히더라고요. 밤에 자다가 눈을 뜨면, 침대 맡에 서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냥... 관찰하듯이."


그 말을 듣는 순간, 보영의 머릿속에 섬뜩한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마치 누군가의 목을 조르는 듯한 차가운 손길. 그것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현우가 느끼는 공포가 전이된 것일지도 몰랐다.


차가 보영의 오피스텔 앞에 멈췄다.


"조심히 들어가요. 내일 회사에서 봐요."


"네, 과장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민서야, 안녕."


보영이 차에서 내리자, 현우가 창문을 내리고 손을 흔들었다.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보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올라갔다. 복도 센서등이 깜빡거리며 켜졌다. 보영은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띠띠띠, 띠리릭.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보영은 멈칫했다.


집 안 공기가 낯설었다.


분명 아침에 나올 때 닫아두었던 베란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바람에 커튼이 유령처럼 펄럭거렸다. 그리고 거실 테이블 위에, 낯선 물건이 놓여 있었다.


남색 3단 우산.


아까 카페에서 유리컵으로 변해 사라졌던, 현우의 이니셜이 박힌 그 우산이었다.


우산은 물에 젖어 축축했다. 빗물인지, 아니면 다른 액체인지 모를 물기가 테이블보를 적시고 있었다.


보영은 뒷걸음질 쳤다. 공포가 발밑에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누군가 침입했다. 아니, 누군가 '다녀갔다'.


그때, 등 뒤에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쾅!


보영이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다시 거실을 보았을 때, 테이블 위의 우산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물로 쓴 글씨가 남아 있었다.


[ 돌려줘 ]


무엇을? 현우를? 아니면 우산을?


보영의 호흡이 다시 가빠지기 시작했다. 시야가 흔들리고 벽지가 일그러졌다. 또다시 발작이 시작되려는 전조였다. 보영은 주머니를 뒤져 약통을 찾았다.


하지만 손에 잡힌 것은 약통이 아니었다.


차가운 유리 조각이었다. 아까 카페에서 깨진 컵의 조각이 왜 지금 그녀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걸까.


보영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현실이 조각난 퍼즐처럼 뒤섞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시작이야.'


그것은 어린 시절, 체육관 창고에서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에피소드 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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