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7화. 필름처럼 흐르던 날들

by 완작가
2-7. 햇살 가득한 주말 데이트.png


EP 7. 필름처럼 흐르던 날들


세상의 모든 가로등이

우리에게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같아

거리의 소음마저 배경음악으로 들리던

총천연색의 계절이 있었다.


코끝을 간지럽히던 길거리 음식의 향기

처음 마주 잡고 걷던 합성동 뒷골목의 온기

코트 주머니 속에서 얽힌 두 손의 무게는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연인임을 증명했고

우리는 매일 다른 장르의 로맨스를 찍으며

영원이라는 단어를 가장 가벼운 마음으로 발음했다.


친구들의 환호 속에 당신을 소개하던 밤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내보이는 아이처럼

세상 모든 부러움을 가슴 가득 품고서

우리는 내일의 태양을 지연 없이 믿었다.


기약 없는 약속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쏟아져도

그중 어느 하나 빛바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행복이 영원할 거라 믿는 것

그 눈부신 착각이 청춘의 특권이자

결말을 예감하지 못한 우리의 오만이었음을

그때는 차마 알지 못했다.


필름의 끝에 기다리는 암전의 순간보다

지금 당장 서로의 눈동자에 맺힌 빛이 더 중요했으므로.




그날 밤의 고백 이후,


우리의 시간은 초당 24프레임으로 끊어지는 필름이 아니라 마치 거침없이 흐르는 투명한 물줄기처럼 매끄러워졌다.


더 이상 2층 난간에서 1층의 사각지대를 훔쳐보며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려 애쓸 필요도,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건조한 업무 멘트에 가슴 졸일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이제 극장의 그늘 속에 숨어 지내던 이름 없는 유령이 아니라,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현실이라는 거대한 무대의 당당한 주인공이 되어 거리를 활보했다.


연애의 전성기는 모든 감각이 유독 예민하게 살아나는 총천연색의 축제와 같았다.


주말이면 우리는 극장의 노란 셔츠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서로의 사복 차림을 처음 마주할 때의 그 신선한 설렘을 만끽했다.


합성동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걷다 우연히 들어간 낡은 떡볶이집에서 풍기던 고춧가루의 매콤한 향기, 처음으로 맞춰 낀 커플링의 서늘하면서도 묵직한 금속의 촉감이 손가락에 감길 때의 그 경이로움은 우리가 진짜 '우리'가 되었음을 실감케 하는 증거였다.


길거리 지나다 들리는 기타 선율에 맞춰 나란히 발을 구르던 그 모든 순간이 영화의 정교한 몽타주 기법처럼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인화되었다.


특히 친구들에게 그녀를 처음 소개하던 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어깨에 힘이 들어갔던, 마치 훈장이라도 받은 듯한 순간이었다.


"오늘 내 여자친구 올 거야."


라는 말을 내뱉을 때의 그 짧지만 강렬한 떨림.


북적이는 술집의 낡은 문을 열고 그녀가 들어왔을 때, 친구들의 눈에 서린 부러움과 경탄의 시선을 나는 온몸으로 받아냈다.


그녀는 여전히 내가 선물한 그 투박한 곰 인형 머리핀을 꽂고 있었고, 그 작은 장식 하나가 우리가 공유하는 비밀스럽고 애틋한 역사를 증명해 주는 표식 같아 나는 테이블 아래에서 남몰래 그녀의 손을 더욱 꽉 맞잡았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드는 그 소란함 속에서, 나는 세상 모든 로맨스 영화의 시나리오가 오직 우리 두 사람을 모델로 쓰인 것이 아닐까 하는 거만하고도 행복한 착각에 빠져 지냈다.


우리는 영원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참으로 가볍고도 빈번하게 소비했다.


"우리 10년 뒤에는 어떤 모습일까?"


"나중에도 꼭 이 합성동 뒷골목을 같이 걷자." 같은,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는 미래의 약속들을 마치 내일의 날씨를 묻듯 태연하게 주고받았다.


청춘이라는 시기는 마치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을 가진 것처럼 시간과 감정을 풍요롭게 허락했고, 우리는 그 샘물을 아낌없이 낭비하며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만끽했다.


결말이 예정되어 있지 않은 무한 연재물처럼, 우리의 이야기는 매일매일이 클라이맥스였고 권태로운 엔딩 크레딧 따위는 절대로 올라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행복이 영원할 거라 믿는 것, 그것은 돌이켜보면 청춘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눈부신 특권이었지만, 동시에 다가올 현실의 거대한 무게를 무시했던 치기 어린 오만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저 눈앞의 스크린이 영원히 꺼지지 않기만을 바라는 철없는 관객들처럼, 언젠가 찾아올 암전의 순간을 전혀 예감하지 못한 채 서로의 눈동자 속에 담긴 자신의 빛나는 모습만을 사랑했다.


우리는 서로의 불우한 가정사나 미래에 대한 불안 같은 무거운 주제들은 영화의 NG 컷처럼 잘라내어 버렸다. 그저 마주 잡은 손의 온기와 합성동 가로등 아래 겹쳐진 그림자의 모양에만 열광했다.


그 시절의 우리는 너무나 밝게 빛나서, 그 빛 뒤로 소리 없이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의 존재를 보지 못했다.


필름처럼 매끄럽게 흐르던 그 아름다운 날들이 사실은 조금씩 마모되며 마지막 프레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엔, 그때의 우리는 너무나 행복했고 세상은 온통 총천연색으로만 보였다.


우리는 우리가 영원히 이 극장의 문지기이자 매표소의 연인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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