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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 출신 변호사, 법정에서 길을 찾다

그날의 한 문장이 내 인생을 바꿨다

by 이일형 변호사

#시작은 우연히


약대 3학년 어느 봄날, 평범한 진로 특강에 무심코 발걸음을 옮겼다. 막연히 '뭔가 도움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들어선 강의실에서, 나는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될 줄 몰랐다.

연단에 선 분은 약사에서 변리사로서 성장한 선배였다. 그분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한 문장이 가슴 깊숙이 박혔다.

"기술을 이해하는 사람이 권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 순간, 지금까지 내가 공부해 온 신약 개발, 임상시험, 특허, 규제, 시장이라는 분리된 세계들이 하나의 큰 그림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약학이라는 '기술'과 법이라는 '권리'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경계를 넘는다는 것

약대 4학년이 되어 친구들이 실습으로 분주할 때, 나는 도서관에서 로스쿨 준비에 매진했다. 약학이라는 견고한 전문 영역에서 법학이라는 또 다른 전문 세계로 넘어가는 일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전혀 다른 언어와 사고의 틀을 익혀야 했고, 때로는 내가 정말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있는 건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주변인들도 모두 내 선택을 뜯어말렸다. 편하게 돈 벌 수 있는데 왜 사서 고생하냐고.

하지만 내 마음속 중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제약과 의료의 최전선에서, 법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


이 믿음 하나로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집요하게 공부했다.

그 결과 지금, 특허와 의료소송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가 되어 있다. 두 세계의 경계에서 중심을 잡고 서 있다.

#현실은 교과서보다 복잡하다

내가 만나는 사건들은 교과서 속 논리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어떤 밤에는 신약 특허의 핵심 기술자료를 분석하며 새벽을 맞는다. 분자구조 하나, 실험 데이터 한 줄이 특허 무효심판의 승부를 가르고, 그것이 곧 한 제약회사의 매출 수백억 원을 좌우한다. 약대에서 배운 유기화학과 약물동태학 지식이 법정에서 살아 숨 쉬는 순간이다.

또 다른 날에는 수술 후 예상치 못한 후유장애를 입은 환자와 마주 앉는다. 의료진의 설명의무 위반을 다루는 소송에서, 의사가 놓친 한 문장의 설명이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한다. 이때 내가 가진 의학적 지식은 단순한 전문성을 넘어, 한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이게 진짜 정당한 권리일까? 누가 더 보호받아야 하는가?'

매 사건마다 이런 질문과 마주한다. 그 무게를 견디는 일이, 지금 내가 하는 일이다.

#과거가 현재를 만든다

이따금 약대 시절 교과서를 보며 옛날 생각을 하곤 한다. 그때는 왜 그렇게 세포 하나하나, 분자 반응 하나하나에 집착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안다. 그 꼼꼼함과 집착이 결국 사건 기록 한 줄, 판례의 문장 하나를 놓치지 않는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약학도로서 기른 과학적 사고와 변호사로서 익힌 법적 논리가 만나는 지점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다. 기술을 이해하기 때문에 권리의 본질을 더 깊이 파악할 수 있고, 법을 알기 때문에 기술의 가치를 더 정확히 평가할 수 있다.

#여전히 경계에서

나는 여전히 경계에 서 있다. 약과 법 사이에서, 환자와 의료진 사이에서, 기술과 시장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지 않고 중심을 잡기 위해 오늘도 생각하고, 고민하고, 판례를 읽고, 글을 쓴다.

그리고 문득문득 떠오른다. 약대 3학년 그 봄날, 조용한 강의실에서 마주했던 선배님의 그 한 문장이.

"기술을 이해하는 사람이 권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 말이 지금 내 삶의 방향이 되었다. 때로는 험난하고 외로운 길이지만, 이 길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 하나로, 오늘도 나는 경계에서 중심을 잡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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