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를 그릴 때 내게 던져야 하는 질문
대표님과의 커피챗
사실 며칠 전 퇴사를 결정했었다. 과거형으로 쓰는 이유는 다시 남기로 결정했기 때문인데, 퇴사를 이틀 앞두고 나눈 대표님과의 커피챗 덕분이었다. 퇴사 전, 그래도 많이 배웠고 감사했다는 말씀도 드리고 커리어 조언도 얻고자 찾아뵀었다. 지금 회사에서 이커머스를 경험하면서 내가 이커머스와 잘 맞지 않나 고민을 했었다. 나는 브랜드를 키우는 일을 좋아하고 잘해서 브랜드 파트로 다시 나가지 않을까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대표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나의 일을 찾을 때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는지, 잘하는 일을 해야 하는지 여러 이야기들이 있고, 현숙님의 경우는 내가 무엇을 좋아해서 잘하는지 명확히 아는 것 같아서, 현숙님이 말씀해주시지 않은 영역에 대해 이야기해드리고 싶다. 물론 어떤 일을 좋아하다 보면 잘하게 되고, 또 잘하다 보면 좋아하게 되는 것처럼 마치 파도가 치듯 왔다 갔다 하며 서로 영향을 주는 것도 맞는데, 지금 내가 현재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앞으로 내가 잘하고 싶은 영역’이 있는지 물으셨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예를 들어 40대 중반 전까지는 내 주머니에 ‘잘하고 싶은’ 영역을 계속 키우는 것도 방법이라고.
내가 잘하고 싶고, 이 조직에서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데이터를 보고 의사결정을 내린다’였다. 물론 이 회사 전에도 데이터를 보고 의사결정을 내려왔지만, 이 회사는 더 넓게, 더 깊게, 더 빠르게 데이터를 보면서 의사결정 내리는 환경과 기대치, 그에 따른 압박감 모든 것이 주어졌고, 이건 ‘내가 앞으로도 잘하고 싶은 영역’이고, 이 회사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 중 하나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회사라는 곳은 ‘내가 잘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는 남을 수 없고, 나 역시 회사에 도움이 되어야 하다 보니 퇴사를 고민했던 것도 맞았다.
내가 퇴사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는데, 대표님은 그것을 보면서 내가 이곳에서 함께 ‘내가 잘하고 싶은 영역’을 키워나갈 수 있을 거라 판단하셨는지,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성격의 일을 제안 주시면서 회사에 남게 되었다. 이 커피챗이 없었다면, 아니 마지막 프로젝트를 열심히 하지 않았더라면 이 기회는 없었는데, 이 경험으로는,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라는 김동진 평론가가가 말했던 것처럼, 한 문장을 얻었다. 플랜 B 없이 퇴사를 결정했던 것도 처음이었는데, 그래도 내 스스로 명확했던 것은 이러나저러나 이건 내 일이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 라는 생각이었는데, 그게 회사에 남는 옵션으로 이어질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커리어를 그릴 때 내게 던져야 하는 질문
대표님과 대화가 끝나고서 내가 1년 전부터 쓰고 싶었으나 내 스스로 정리되지 못해 쓰지 못했던 이야기를 이제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차가 쌓이면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명확해졌던 것 같다. 내가 어떤 성격의 일을 할 때 물만난 고기처럼 날아다니는지, 그런데 내가 이 회사에서 초반에 맡았던 일은 그런 성격의 일이 아니었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부정적 피드백을 받는 것이나, 계속되는 야근은 지칠 수 밖에 없는데, 좋아하지도 않고 잘하지도 못하는 것 같은 일을 하면서 부정적 피드백을 받고, 야근을 하면 ‘내가 왜 굳이?’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모를 때라면 뭐든 배워야 한다는 기조 하에 버티겠지만, 나는 다시 이직하더라도 이런 형태의 일을 할 것 같지 않고, 브랜드사로 나가면 바로 해결될 것이 보여서 고민이 생겼었다.
물론 이 곳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명확했다. 데이터를 보고 의사결정 내리는 것, 그리고 내가 꾸까에 있을 때 마케팅팀만 매출액을 총괄하다 보니, scale up을 위해서는 각 조직이 어떻게 매출액을 쪼개서 보아야할지 등에 대한 갈증이 있었는데, 더 큰 규모로 돌아가는 회사에 있다보니 scale-up에 대한 전략들을 배울 수도 있었던 것도 맞았다. 그래서 이 시간들이 몇 년 뒤의 나에게 큰 도움이 될 시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때 내가 들었던 고민은, ‘언제까지 성장해야 하나?’, ‘성장을 위해 못하더라도 버티는 시간과 잘하는 것을 더 강화하는 시간 적절한 배분은 어떻게 될까? 내가 적당히 성장한 시점과 그래서 일을 펼칠 시점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였다.
오늘을 사세요.
위와 같은 고민을 더 하게 된 것은, 조승연님이 911 테러를 목격하고서 남긴 글과 나 역시 비슷한 경험으로 앞으로는 오늘을 살겠다고 스스로도 다짐했던 기억들 때문이었다.
“그 당시 경영대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던 형들이 있는데 항상 하는 말이 뭐였냐면, 월스트리트 은행에서 일하면 매일 죽고 싶대요. 근데 자기는 버틸거래요. 거기서 10년만 버티면, 나중에 중소기업 CEO로 스카우트 될 수도 있고, 나중에 그 돈 가지고 나와서 조그만 사업도 할 수 있대요. 나 서핑하러 가겠다, 비행기 조종하는 거 배우러 가겠다. 그 형들 중에 8년, 9년 채운 형들이 그 건물 안에 있었어요. 1년, 2년만 남은 형들이. 10년 뒤에 나한테 도움 될게 뭘지 어차피 모른다고 그랬죠. 그러면 뭘 하는게 맞을까요? 당연히 내가 끌리는 거를 하는게 맞겠죠. 인생이 어떻게 될 지 모르기 때문에, 그 시간들을 채우고서 내가 인생을 살려고 그랬을 때, 내 인생이 10년동안 날 기다려줄지 아닐지 몰라요.”
나 역시 월스트리트 은행가의 형들처럼, 미래의 나를 위해 피앤지를 몇 년 버텼던 기억이 있다. 마케팅이 앞으로 내가 성장하고 싶은 영역인 것은 맞고, 이 회사를 적어도 3년은 다니면 어디가서 피앤지 출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그러면 어디를 가든 내가 마케팅을 잘 배우긴 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3년을 버텼고, 그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대체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시간들 덕분에 내가 크게 성장했던 것도 맞고, 피앤지를 겪고 나서 그 다음 회사에서는 정말 물만난 고기마냥 신나게 일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또 한 번의 큰 성장을 위해서는 한 번 더 이런 시간을 가져야 하나 고민과, 아니면 오늘이라도 행복을 찾아 물만난 고기처럼 일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나야 하는지 두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했던 것 같다. (성장은 이렇게 힘들 수 밖에 없나 생각도 했었고 - 이건 다음에 풀어봐야겠다.)
"오늘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래서 ‘끌리는 일은 지금부터 해야하는지’, ‘성장이든 성공을 위해 얼마간의 시간 투자는 필요한지’에 대해 스스로 정리되지 않았는데, 이번 커피챗을 통해 깨달았다. 미래의 나를 위해 오늘을 저당잡을 것도 아니고, 오늘의 나만 생각할 것도 아니었다. "오늘 나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먼저 기본 조건은 내가 좋아하고 잘하고 싶은 방향과 지금의 일은 맞아야 하고 (월스트리트에 다니는데 파일럿이 되고 싶다면 이건 바로 파일럿이 되기 위해 떠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큰 카테고리 안에서 맞다면, 거기서부터는 오늘 내가 배우는 것에 집중하며 오늘을 살아야 한다고.
피앤지 때가 힘들었던 이유 중 큰 하나는, 내 스스로 오늘 무엇을 배웠는지 초점보다, 피앤지 출신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몇 년 뒤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미래를 담보잡고 오늘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이런 것을 배웠네, 다음에는 이렇게 써먹어야겠다 등등처럼 ‘오늘의 나는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나는 그래서 무엇을 잘하고 싶은가’에 집중하면서, 일하는 즐거움을 오늘부터라도 느껴야 한다고 깨달았다.
내가 이 곳에 이직할 때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는 알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만 선택한다면 똑같은 일을 반복하게 될 것, 그래서 몇 십년 후 경쟁력이 없어질 상황을 두려워했던 것도 이유였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여기서 배우는 것이 도움이 될거라 생각했다면 그 시점에는 ‘내가 무엇을 잘하고 싶은가’에 집중해야한다고. 물론 오늘이 너무 괴로워서는 안되겠지만. 다행인 것은 지금 회사에서 잘하고 싶은 것을 배우면서도, 오늘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내게 더 맞는 일을 제안해주었다는 것. 그렇게 ‘무엇을 잘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