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커리어골에 대해
한 번도 회사 생활이 쉬웠던 적은 없지만,
10년 차쯤 되면 수월해질 거라 생각했지만 단단히 틀렸다. 지금 회사는 새롭게 접하는 것도 많고, 나를 증명해야 하는 일도 많고, 업무의 복잡성, 난이도, 강도 모두 높아서, 작년 9월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질문이 들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가끔은 재밌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밤늦게까지 일하느라 아이를 며칠째 보지 못하는 날이 반복되거나, 퇴근하고 아무것도 할 힘이 없는데 아이를 돌보면서, ‘이렇게 성장해서 so what?’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무엇을 하고 싶나? 몇 년 뒤에 나는 무엇이 되고 싶어서 이 시간들을 버티고 있는 것인가?’ 처음에는 내가 목적지가 없어서 이런 질문들이 생기는가 했다. 그래서 원하는 목적지를 정하고 나면, 지금의 빡셈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몇 년 후 모습을 그려보려 했지만, 회사 안에 더는 부러운 사람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명확했다. 회사 밖에서 작더라도 자기 것을 하는 사람들, 자기 이야기를 꾸준히 하는 사람들, 시간을 자기 계획대로 쓸 수 있는 사람들.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언제인지 생각해 봐도, 육아휴직 기간 동안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아이가 잠들면 글을 쓰고, 그 글들을 엮어 책을 내고,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하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일과 육아만으로도 이미 벅찼고, 글을 쓰거나 내 것을 고민할 여유는 생기지 않았다. 지금 다니는 회사의 특징도 있겠지만 그보다 마케터 직무 특성에 기반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장만이 유일한 커리어 의사결정 기준이던 예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균형이라는 가치관도 중요한데, 균형이라는 가치관이 마케터라는 직무와 공존 가능한 가치관인가 고민했고, 그래서 마케터로 오래 일하는 것이 쉽지 않겠다 생각했다. 마케터라는 직무를 보면, 보통 2~3년에 한 번씩 이직을 하고(내가 스타트업 씬에 있어서 더 그랬을 수도 있다.), 마케팅 환경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트렌드도 바뀌는데, 나의 바뀐 가치관과 맞는 직업일까 고민했다.
그래서 완전히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하나 고민도 했다. 시험공부를 한 번 해놓고 나면, 그 전문성을 바탕으로 몇십 년간 할 수 있는 직업으로 바꾸어야 하나 고민도 했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로 고민은 멈췄는데, 먼저 힘들게 전문직이 된다고 한들, 다시 직장인이 된다는 사실에서 고민을 멈췄다. 어차피 돌고 돌아 직장인이라면, 마케터로 일하는 것이 내가 제일 잘하고 좋아하는 일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전문직으로서의 안정성도 아니고, ‘더는 남의 밑에서 일하지 않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내가 새로운 일을 찾고자 하는 것은 남의 집 잔디가 더 푸르러 보이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내 일이 가장 어렵고 남들이 하는 일은 멀리서 보면 쉬워 보이니까, 하지만 내가 이미 10년간 쌓아놓은 것 위에서 이를 더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다른 것을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보다는 무조건 쉽고, 더 오래 일을 해나갈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새로운 일에 흥미가 생겨서 업을 바꾸려 한 것이 아니고, 지금 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떠난 것이라면, 도피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을 다시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도피가 아니라 할 만큼 했고 더는 미련도 없는 그 시점이 와야 떠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포기할 용기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내 업의 가치관이 ‘성장’에서 ‘균형’으로 바뀐 것은 알았으나, 어려운 상황에 지고 싶지는 않았다.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는데, 떠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균형을 찾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 문득, 그냥 오늘의 내가 그만두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회사 얼마나 다닐 수 있을까, 마케터 얼마나 할 수 있을까’ 같은 질문에 압도되지 말고, 오늘만 잘 보내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오늘을 버티고 나면 내일이 오고, 내일을 버티면 모레가 오고, 그러다 보면 좀 수월해지는 시점도 오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다 보면 몇십 년 차 연륜이 쌓인 어른이 되어있지 않을까. 나는 종종 오늘의 내가 미래의 나를 위해 지금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는데, 오늘의 내가 할 일은 오늘을 잘 보내는 것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 그냥 하자 이런 주문을 외웠다.
내 커리어 골에 대해
그리고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오늘을 버텼나에 대해, 내게 명확한 커리어 목적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첫 번째 커리어골은 ‘아이에게 멋진 엄마, 나중에 아이가 원할 때 조언을 줄 수 있는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아이가 나중에 삶을 살아가면서 어려운 상황, 막막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우리 엄마는 ‘비슷한 경험을 했던 적이 있고 어떻게 헤쳐나갔는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할 때 엄마한테 물어보면 방향을 찾을 질문들을 던져준다고 아이가 생각하면 좋겠다 생각했다.
육아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면 좋은 학교를 보내기 위한 교육 이야기들도 많지만, 나는 대학을 가기 전보다 대학을 졸업한 후 인생이 더 어려웠고, 밥벌이를 하면서부터 사회 구성원으로서 잘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생각했다. 그리고 갈수록 내가 풀어야 하는 문제는 어려워지는 듯했다. 회사에서는 연차가 차고 직위가 오를수록 더 어렵고 더 복잡한 문제들을 풀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듯했다. 아이가 겪을 세상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아이를 좋은 대학교에 보내는 것이 육아의 끝이 아니라, 그 이후의 삶에 있어서도 아이에게 잘 살아가는 것을 알려주고 보여주는 것이 육아라고 생각하고, 아이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 지금의 나도 계속 키워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커리어골은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쓰는 것이었다. 내가 그동안 쓴 글들을 보면, 과거의 내가, 반발짝 앞에서 이 내용들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서 고군분투했던 경험에 대한 이야기였다. 마케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싶은데 이걸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힘들었던 기억 덕분에 책을 쓰게 됐고, 회사는 다들 이렇게 마음 힘들게 다니는가 하는 고민에 대해서는 지금도 글을 남기는 중이고. 그리고 이 글들은 공짜로 나오지 않았다. 몸으로 부딪히며 괴로워하는 몇 년의 시간들이 먼저 쌓여야 했고, 그러고 나서 전혀 다른 일을 하다가 힌트를 얻기도 하고, 내가 겪었던 고민과 똑같은 고민을 하는 누군가를 볼 때 갑자기 깨닫게 되면서, 그제야 글이 써지는 것을 배웠다.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쓰려면, 먼저 지금의 내가 10년 차가 겪어야만 하는 어려움, 워킹맘으로서 어려움도 겪어야만 쓸 수 있을 거라고. 그만두지 않고 괴로워하더라도 배워야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커리어골은, 언젠가 내 이름을 걸고 사업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방송에 잘린 송은이가, 우리가 그만두기 전까지는 없어지지 않는 방송국을 만들자 했고, VIVO라는 회사를 만들어 지금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잘리지 않는 회사, 베이스캠프가 되는 회사를 만들기 위해, 지금의 과정이 사업의 준비라고 생각하고, ‘버텨야 하는 시기’를 잘 버텨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더 잘하는 법은 배울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드는 날들도 있지만, 오늘의 나는 지치지 않고 버텨보기로 했다. 모르는 것은 하나씩 공부해 나가고,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곳에서 더 열심히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내 일을 그만둘 수 있는 선택의 영역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몇 달에 걸쳐 퇴근길에 핸드폰으로 쓰던 커리어골에 대한 글도 드디어 오늘 마무리했다. 그렇게 계속하기만 하면 된다고 다시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