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찾아올 때
원래 이 글은 2월 퇴사를 앞두고 쓰려던 글이었다. 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않은 채 퇴사 예정이었어서, ‘소속 없는 불안감’을 헤쳐나갔어야 했다. 상담 선생님이 말하길, 내 인생 전체로 보았을 때 이번 퇴사는 나로서 온전히 서있는 연습을 할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했다. 그래서 바로 회사를 찾기보다, 이 기회에 어디에 소속되지 않아도 덜 불안해하는 나를 만들어보자고 했었다. (물론 커리어적으로는 좋은 선택은 아니겠지만) 회사에 남게 되면서 혼자 서는 연습을 할 기회가 사라지기는 했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트랙 밖에 설 때의 두려움
그동안 늘 트랙 위에 있었다. 반수를 할 때도 수능 당일만 결석하고 1년을 다 다녔다. 원하던 학교를 붙고 나서야 예전 학교를 떠났고, 취업이 될 때까지는 졸업하지 않았고, 이직처가 확정되지 않고서는 퇴사하지 않았다.
단 한 번, 트랙 밖에 있었다고 하기에도 애매하지만, 일주일간 소속이 없었던 적이 있다. 26살 때 첫 회사를 다닌 지 5개월이 되었을까, 대학생 때 인턴으로 함께 했던 스타트업에서 합류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봤었다. 그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나라는 사람은 곧 죽어도 마케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던 터라 합류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퇴사까지 했는데, 갑자기 회사가 확정은 아니었다며 기다려달라는 통에 갑자기 일주일 붕 뜨게 됐었다. (결국 입사하긴 했지만)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막막했던 시간이었는데, 태어나 처음으로 아무 소속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내가 무슨 일을 벌인 것인지, 이 무서운 세상에 겁도 없이 그냥 퇴사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날 밤 잠들지 못했다. 밤늦게까지 남자친구에게 불안하다며 전화를 했고, 남자친구는 다음날 출근하려면 이제 전화를 끊고 자야 하는데, 나는 전화가 끊기면 내 인생도 끝날 것 같은 느낌에 전화를 쉬이 끊지 못했다. 다음날도 늦잠을 자면서 즐겨도 될련만, 불안한 마음에 새벽같이 일어나서, 신림 자취방에서, 불안감에 압도당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남자친구도 내 친구들도 모두 회사를 가고 열심히 살아가는데 나는 뭐 하지? 어떡하지? 26살, 한창 일해야 할 나이인데, 갑자기 넘쳐나는 시간에, 남들과 달라진 시간에 압도되어 버렸다. 집에서는 답답한 마음에 질식할 것 같아서 밖으로 나왔는데 쨍한 햇빛 아래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라서 하릴없이 신림을 걸었던 그 일주일, 세상의 틈으로 나만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다시 이때를 돌아보면, 지금보다 불안이 훨씬 심했던 것 같다. 취업준비가 쉽지도 않았고, 겨우 취업이 되어 이제 막 사회에 나왔는데, 앞으로 뭘 하면서 살아가야 할지 그려지지는 않고, 나를 책임져주는 회사까지 없으니 불안할 수밖에.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여전히 내게 소속감은 생존처럼 큰 크기로 다가온다. 회사 소속이 단순히 회사를 다닌다를 넘어서, 이 세상에서의 나의 생존, 연결성, 집에만 있으면 세상과 단절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소속이 없는 상황을 상상하면 망망대해에 튜브도 없이 혼자 내던져진 느낌인데, 심리상담 선생님이 말하길 나는 회사에 소속된 나보다 훨씬 큰데, 소속의 크기만큼만 나를 받아들인다고 했다.
26살 이후 내 삶은 1) 일이 빡세서 불안이 찾아올 틈이 없거나 2) 여유로워지면 불안해하거나 둘 중 하나가 되었다. 불안한 상황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하고, 결국 내가 지칠 만큼 일하는 상황에서는 불안이 찾아오지 않으니 만족하며 살았다. 불안 덕분에 내 미래는 탄탄해졌을지 모르나, 소속에 대한 의존성은 더 커졌을지도 모른다.
심리상담을 받다.
내가 불안감에 대해 이야기 나누게 된 것은 가치관 재정립에 대한 고민이 시작이었다. 아기를 키우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는데, 그 와중에 회사까지 빡센 곳을 다니는 것이 쉽지 않아서 가치관을 재정립하려 했다. 그동안은 성장이라는 가치관이 중요했는데 예전 상담에서 내가 무너지면 성장이 무슨 소용인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무너지지 않고 오래 일하고 싶었고 그래서 성장 중심의 가치관을 재정립하려 했다. 그렇지만 나는 내려놓고 싶지만 내려놓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갑자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무 곳이나 갈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이게 남들의 시선 때문인가 싶어, 나는 왜 그렇게 남들의 시선이 중요할까 고민하다, 내 타고난 성향인가 싶어 TCI 검사를 받게 되었다. 이 검사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향과 후천적으로 얻게 된 성격을 알려준다길래, 내 타고난 성향을 파악해서, 가치관을 재정립할 때 어떤 부분을 고려해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검사를 통해 더 주요하게 알게 된 것은 나는 자극추구와 예기불안이 높은데, 그 말은 엑셀과 브레이크가 동시에 걸리는 상황이라고 했다. 26살 때 내가 남긴 메모를 보면 ‘내 성격은 참 지랄 맞아서 네임밸류 있고 내가 성장한다는 느낌도 주어야 하고, 일도 재미있어야 한다.‘는 메모가 있다.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하고, 그러면서 그 회사가 안정성도 있었으면 좋겠고, 그러면서도 남들이 보기에도 그럴싸한 회사였으면 좋겠고, 그런데 이런 기준을 모두 충족하는 회사는 없으니 자극 추구하는 곳에서 이 회사가 망해버리지는 않을까 불안해하거나, 안정적인 곳에서는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고 괴로워하거나 두 개의 모순적인 상황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가 내린 선택들을 봐도 어떤 때는 안정성을 택했다가 어떤 때는 자극추구를 택한다. 그 덕분에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생기기는 했지만, 그리고 몇 년의 경험 끝에 나는 안정적이지는 않아도 성장할 수 있는 곳에서 일에 집중하는 것이 맞겠다는 것까지는 깨달았는데, 아기 엄마가 되면서 또 다른 선택을 내려야 하는 상황을 만나게 된 것이다.
불안감을 낮추는 방법
그래서 나를 알아보려고 했던 상담의 방향이, 엑셀과 브레이크가 동시에 걸리는 상황은 불안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으니 불안감을 낮추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불안감은 소속감에서 오는데, 나는 커리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했고, 실제 크기보다 더 크게 받아들였다. 심리상담 선생님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도 나로서도 충분하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나
내게 가장 무서워하는 상황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리고 가장 피하고자 하는 상황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경력단절’이다. 내 친구들은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불안해하냐며 의아해한다. 예전 글에도 썼었는데, 결혼하면서 일을 그만둔 엄마는 나를 키우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의 업을 찾고자 했고, 나는 그 노력이 끊임없이 좌절되는 것 또한 옆에서 보았다. 그러면서 사회에서 밥벌이를 하고 산다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배워버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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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감을 느끼는 순간에서부터 시작하기
결국 퇴사를 앞둔 어느 주말, 아이는 평소처럼 새벽 3시쯤 깼고 나는 비몽사몽으로 아이를 달래다 갑자기 불안해져 버렸다. 지금 내가 힘든 이유가 크게 2개인데, 하나는 회사가 힘든 것, 또 하나는 어린아이를 키우는 것에서 오는 힘듦인데, 둘 다 해결될 기미가 없다는 것에서 불안감이 시작되었다. 회사를 그만두는 것으로 회사의 문제는 해결이 아니라 보류가 되었고, 오히려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 하는 일로 더 커져버렸다. 그리고 육아는 여전히 힘든 한 축으로 남아있구나 생각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간 낮에는 남들과 다르게 흐르는 시간에 괴로워할 것이고, 밤에는 잠도 못 자며 아이를 달래다가 이렇게 경력단절이 되어버릴까 하는 생각에 괴로워하겠다 생각했다.
이름 붙이기
나 혼자 서는 법을 배워보기로 했기에, 상담 선생님과 지난밤의 불안한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 나눴었다. 상담 선생님은 내게 카드를 건넸었다. 그날밤 느꼈던 감정을 보이는 카드가 있다면 다 내려놓아보라고 했다. 나는 그날밤 불안하다고 생각했는데, 카드를 한 장씩 내려놓다 보니 그날밤 나는 13개 정도의 감정을 느꼈었고, 5개로 추려보았을 때는 지쳤고, 걱정스러웠으며, 외로웠고, 무서웠고, 불안했다. 내가 불안이라고 느꼈던 감정이 얼마나 다양한 감정의 조합이었는지 깨달았고, 불안이라는 단어가 모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니즈가 충족되지 않을 때 감정은 생겨난다.
그리고 니즈 카드를 받아, 5개로 추린 그 감정이 어떤 니즈가 충족되지 않아서 생긴 것 같은지 이유를 찾아보았다. 휴식, 혼자만의 시간, 여유가 없어 나는 지쳤었고, 이제 소속감이 없어지는 상황 때문에 자기 보호가 되지 않을 것 같고 존재감이 사라질까 걱정스러웠다. 그날밤에 나를 이해해 주거나 공감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외로웠다. 그리고 안정감이 사라지는 상황이 무서웠다. 마지막으로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도태될까 봐 무서웠다.
아이를 돌보듯 나를 돌보기
감정이 생겨난 이유까지 보고 나서, 선생님은 내가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거라 했다. 아이가 울면 어떻게 하는지 물으셨다.
아이는 이유 없이 울지 않는다. 우는 이유를 찾아서 해결해줘야 한다. 배가 고픈 것 같으면 밥을 챙겨주고, 졸린 것 같으면 재워준다. 그냥 이유 없이 우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그냥 꼭 안아주고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준다.
선생님이 그걸 나에게 하면 된다고 했다. 내가 어떤 감정은 느꼈다는 건, 특정 니즈가 채워지지 않아서 생기는 거라고, 그 이유에 해당하는 니즈를 충족시켜 주면 감정은 해소된다고.
그리고 엄마가 아이에게 하듯, 정서적으로도 채워주기 위해, 힘든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를 만들어 공동 조절을 할 수도 있고, self-talk처럼 자기 조절도 중요한데,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가 자기 조절을 도와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그날밤 느꼈던 불안감에 대해서는 매슬로우의 피라미드 순으로 제일 아래에서부터 해결되어야 한다고 했다. 잠을 충분히 자고, 내가 나를 챙겨야 한다고 했다.
소속감 없이도 존재감을 느끼는 것
그리고 나는 소속감을 충족시키는 것보다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커리어에 너무 많은 의미 부여해서, 실제 크기보다 더 크게 받아들이는 것. 소속이 필요한 것도 맞고, 소속이 없어서 불안할 수도 있지만 그전에 소속감 없이도 존재감을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또 바로 어디에 소속되어 일하기보다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하면서, 어디에 소속되지 않더라도 충분히 만족감을 느끼는 것을 배워보면 좋겠다 했다. 그래서 쉬는 동안 정말 실컷 글이나 쓰려고 했었다.
다시 회사에 남게 되면서 소속감이 충족되면서 불안한 상황은 사라졌지만, 불안감을 느끼는 내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불안을 느낄 상황만 사라진 것이라는 것을 안다. 인생은 길고 내가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하는 시간도 분명 올 테니, 소속은 딱 그만큼의 크기로만, 실제 나를 더 크게 생각하는 연습을 계속해보려 한다.
‘소속이 없어도 나로서 온전해야 한다고, 아이 달래듯 나를 달래야 한다는 것.’ 해결책을 되새기고, 소속과 상관없이 나의 베이스캠프가 되는 글을 더 열심히 남기기로 했다.
https://brunch.co.kr/@236project/110
마지막으로, 아이를 돌보다 불안감을 느꼈던 그 주말에 스스로 했던 생각들을 잊지 않으려 정리해 두면, 이미 내 안에 답이 있었다.
‘내가 할머니가 되어 죽기 직전의 순간에 지금 이 시간을 보면 무엇을 후회할지만 생각하자. 빨리 일을 찾지 않은 것을 후회할지, 이 시간에 조바심을 낸 것을 후회할지. 답이 너무 명확했다.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간, 아이를 직접 하원시키고 같이 간식을 챙겨 먹으면서, 글을 충분히 쓰는 이 시간을 즐기지 않으면 이 순간을 후회할 것이 너무 분명했다. 글이든 뭐든 뭐라도 남기면 된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생각하고, 이게 또 기회가 되어 어떤 길이 열릴지 모른다. 내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보자.’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