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설명 없이 어떻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을까
1. 조부 (1904-1958)
일찍이 조상 대대로 살던 경북 영덕을 떠나 상경, 고학으로 수원농업전문 (서울농대 전신) 졸업. 일제시대에 농림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하셨다. 해방 후 건국정부 농림부(농촌진흥청 전신)에 계시다가, 지방으로 좌천되어 포항여고 교장으로 발령. 이후 세상을 원망하시며 술에 찌들어 살다가 비교적 젊은 연세에 소천하셨다. 권력 라인에 있는 사람들, 그들의 따까리들을 잘 봐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잠시 옥살이도 하셨다. 조부님을 필두로 우리 집안 어른들은 하나 같이 대쪽 같은 성품을 지녔다는 얘기를 자라면서 많이 들었고 한 때 그런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 팩트체크를 할 수 없는 관계로, 사실은 알 수 없다. 정말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맞서서 싸웠던 것인지, 현실감각이 무디고 사회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미화시킨 것인지.
2. 종조부 (작은할아버지) (190? - 1974)
금수저가 아니더라도 구한말, 일제시대 당시 뜻이 있는 똑똑한 청년들은 그냥 객지로 나와 고학했다. 종조부님은 조부님보다 한술 더 떠서 일본으로 가셨다. 유학을 절대 반대하셨던 증조부님을 뒤로하고 가출하셨다.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셨는데, 관동대지진과 그 이후 벌어진 난리통에 간신히 조선으로 돌아오셨다. 몇 년간 만주에서 활동하시다가, 이후 경성제대에서 학업을 계속. 졸업 후 원산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부인과 1남1녀 단란한 가족을 꾸미셨는데, 1945년 6월 24일 잠깐 갔다 올게 하며 남쪽에 내려가셨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 평생 북쪽을 향해 그리워하시며 술에 찌들어 사셨다. 소위 엘리트임에도 불구하고 북으로부터 월남한 인사인 관계로, 이후 남한에서의 삶이 결코 쉽지는 않았으리라. 조부님과 종조부님은 만주에서 큰 농장을 개척하셨다. 울 아버지 왈, 농장이 하도 커서 트럭을 타고 한 바퀴 도는데 반나절이 걸렸다는데, 지금 잣대로 짐작하면, 기껏 몇십 에이커 정도일 것이다. 당시 트럭은 조악했고 도로 사정도 여의치 않을 테니, 별로 멀지 않은 거리를 이동하는데 몇 시간이 걸렸을 게다. 한 가지 의문점: 그럼 그분들은 한창 장년기 때 만주에서 활동하셨다는 건가? 그 시대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의식이 있고 진취적인 젊은이들은 맨날 중국, 만주, 러시아, 일본으로 왔다 갔다 했으니 아마 그분들도 그런 부류이지 않았나 싶다. 농장에서 번 돈으로 광복군, 독립운동 자금도 대고, 지역 만주인들도 많이 돌봤다고 했는데, 이것 역시 지금 팩트체크를 할 수 없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 이 "우리 안방 금송아지" 아니 "만주땅에 박아놓은 우리 집안 재산"은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는데, 1930년대 만주사변과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고 어수선해진 틈 속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도적들이 낫과 도끼로 습격을 해와서, 두 분 돈은커녕 옷도 변변히 못 입고 도망쳐 나와 조선으로 복귀하셨다.
3. 조모 (1900-1982)
할머니는 평양태생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이대 나온 여자”다. 류관순 누나랑 같이 이화학당에서 공부하셨다. 꼬마 시절, 3.1 운동 같이 하신 거예요? 물었던 기억이 나는데 대답이 신통치 않았다. 안 하신 건지, 아직 철도 안 든 놈한테 얘기해 봤자 못 알아들을 거 같아서인지 잘 모르겠다. 특이 사항으로, 조부님 조모님은 연애결혼을 하셨다 (시대적 선구자!). 교회 풍금 반주를 하던 조모님에게 반해서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조부님이 대시하셨다고 (하여간 교회가 문제여, 그때나 지금이나). 나중에 듣기로, 상당히 까탈스러운 시어머니셨고 고집이 엄청 세셨다고 한다. 밑에서 얘기하겠지만 맏며느리(백모님)와의 갈등이 심했다. 두 분 다 대학 교육까지 받은 소위 신여성이었는데, 결고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 둘 다 똑똑해서 그런 거다. 그 불똥이 우리 부모님으로 튀어서, 차남임에도 울 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했고, 그것이 음으로 양으로 내 운명에 영향을 주었다.
4. 백부 (1927-1991)
백부님도 철들자마자 집을 나가서 (집 나가는 게 집안의 내력인가 보다) 경성제대가 서울대로 바뀌는 시점에 철을, 아니 금속공학을 공부하셨다. 그땐 제련과 라고 불렸단다. 해군 장교로 군 복무, 준수한 외모, 공학 지식과 외국어 실력으로 무장하셨던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 누가 봐도 한눈에 딱 띄는 엘리트다. 철강 관련 전문가로 한국, 일본, 미국을 넘나들면서 활동을 하셨다. Westinghouse (그 당시 잘 나갔던 미국의 대기업) 출장, 파견을 자주 가셨다. 무슨 기계를 미국에서 차관으로 들여오는데 장비를 운영할 수 있는 유일한 한국인이었다나 뭐라나. 60년대 포항제철이 생기기도 한참 전 이야기이다. 잘 나가는 것 같던 백부님의 운명의 암초는 바로 백모님이다. 백부님은 엘리트답게 지역 유지(아니면 알부자?) 정도 되는 집안의 여성과 결혼하셨다. 문제는 이 맏며느리가 너무 똑똑하신 탓에 고부갈등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했다. 마누라를 포기하냐 자식임을 포기하냐 갈림길에서, 결국 자식임을 포기하고 60년대 말 남미로 이민, 거의 소식을 끊으셨다. 우리 아버지가 이후 노모 봉양의 책임을 졌다. 난 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고, 우리 아버지가 장남 노릇을 하는 것을 어릴 적부터 보아왔다. 아버지는 이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형님에 대해서 언제나 존경과 경의를 표하셨다. "네 큰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분이냐면"으로 시작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나중에 할머니가 치매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 술 취한 아버지가 할머니 기저귀를 갈면서, "아이고 어머니 이게 뭡니까" 하며 우셨던 걸 본 기억이 있는데 그게 유일한 불평이었다. 1982년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큰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한때 그들이 괘씸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역시 많이 힘드셨을 거다. 맏며느리도 아닌데 졸지에 책임감 덩어리 자리에 앉게 되었다. 책임만 있고 권리는 없다. 부모 봉양,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것 아니다.
5. 부 (1935-2011)
한국 민주주의 공적 민정당 TK들과 학교를 같이 다니셨다. 5공 시절 아버지와의 대화:
아버지 이 사람들 알아요?
그럼 알지.
이 사람들도 아버지 알아요?
...
알아요?
조용히 해라 이 자식아.
서울대 약대 특차 합격(요즘 말로 수시). 그러나 철학과 신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장래희망으로 선교사를 꿈꾸던 아버지는 연세대 철학과에 할아버지 몰래 합격하고, 그 길로 고집을 부렸다. 대로하신 할아버지를 설득 (부모 속 썩이는 게 집안 내력인 것 같은데 난 그런 적이 별로 없어 억울하다). 철학 공부한 걸로 밥 먹고 사는 건 지금도 힘든데, 해방과 전쟁을 거친 50년대 한국에서 말도 안 되었다. 하고 싶은 공부 하겠다고 호기를 부린 것도 잠시, 재산과 권력은 없고 오로지 자존심만 남은 선비 집안의 후예로서 경쟁사회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술만 드시면, "내가 그때 서울대 약대를 갔었어야지, 그럼 너희들 고생 안 시켰을 텐데, 꺼이꺼이~" 귀가 닳도록 들었다.
6. 숙부 (1938-1989)
이런 집안에서 공부 잘하는 게 뭐 대단한가 모르겠는데, 아무튼 작은아버지도 공부로 이름을 꽤나 날리셨다. 일제고사에서 (요즘 말로 모의고사) 전국 1위도 여러 번. 서울대 화공과로 진학했다 (60년대에는 화공과가 최고로 떴다지 아마). 공부를 잘하는 운명과, 선택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이어나가며 행복하게 일을 하는 운명은 다른 라인에 있다. 졸업 군복무 후 대기업에서 (3세 경영으로 욕을 실컷 먹고 있는 재벌그룹 중 하나로 해두자) 사회생활을 시작하셨고, 초반에는 엘리트로 승승장구했지만, 7, 80년대 간부급이 되자 파벌 싸움, 권력 다툼에서 점점 힘에 달렸다. 결국 임원자리에 올라가긴 했지만 그건 목숨과 맞바꾼 자리였다 (밑에 나온다) 우리 아버지 취하셨을 때 레퍼토리가 "그때 약대를 갔었다면!"이라면 작은 아버지의 레퍼토리는 "그때 의대를 갔었야 되는데!"이다. 작은 아버지 같은 분들은 대한민국을 지금 자리에 올려놓은 진정한 산업역군이다.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는데 큰 공헌을 한 것에 비해, 한국 사회에서 그들에 대한 칭찬은 너무 인색하다. 작은 아버지는 한이 맺혀서 평생 나와 아들(내 사촌동생)에게 "너희는 의대를 가야 돼"라고 되뇌셨다. 그게 80년대인데, 4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은 아이들 의대 보내려고 안달이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다시 작은 아버지 얘기로 돌아가서, 옛날 친구들 중 공부는 잘 못했는데 집에서 밀어줘서 의대를 간 양반들이 닥터로서 중년의 여유를 즐기는 동안, 작은 아버지는 자타 공인 최고 능력 인재였고, 평생 뭐 빠지게 일했음에도 결국 오너 뒤치다꺼리 하는 신세. 그 괴리감을 극복하지 못한 채, 51세의 젊은 나이에 과로 과음 스트레스로 쓰러지셨고, 결국 못 일어나셨다.
7. 모계
외할아버지는 (191?-1996) 경북 청송 근처, 작은 마을 서당 훈장의 아들로 태어나 집에서 한문을 익혔다. 일제강점기, 보통학교에 한두 번 나가고 말았는데, 졸업장은 받았다고 한다. 정규학력은 요즘 기준으로 국졸이 전부였지만, 한문에 조예가 깊었고 일본어도 능통해서 (자세한 건 묻지 마라 왠지 대답하기 곤란할 것 같다) 관청에서 체신업무 보조로 일을 시작했는데 나중에 청송군 진보면 우체국장까지 하셨다. 외할아버지의 수려한 문장력은 그 지역에 꽤 알려졌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편지 쓰기를 좋아하셔서, 장녀인 내 어머니에게 거의 2-3주에 한번 꼬박꼬박 편지를 보냈던 것을, 내 70년대 국민학교 시절 생생히 기억한다. 편지는 세로 쓰기로 (그땐 세로 쓰기가 일반적이었다), 一, 二, 三, 四, 숫자를 붙여가며 문단이 이어지는 편지들에 익숙해지다 보니 나중 국어시간에 서간문 형식을 배웠을 때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一, 권서방 내외와 아이들 추위에 잘 지내는가? 네 어미와 나도 잘 지낸다. 二, 네 동생(내 외삼촌)이 벌여놓았던 일 (중략) 이젠 해결되었으니 걱정 마라. 三. 다음 달 중순께 서울 올라갈 테니 그때 보자) 외할아버지가 썼던 그 수많은 국한문혼용체의 편지와 엽서들, 애석하게도 현재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외가에도 친가 쪽만큼이나 삶의 드라마가 있는 것 같은데, 자세한 건 밝히지 않겠다 (잘 모르기도 하고, 현재 외가 쪽 식구들 생각도 해야 하니). 외할아버지는 선한 성품에 매우 고지식한 분이었는데 그게 후손들에게는 별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8. 집안 총평
외할아버지를 한마디로 평가한다면, '무능한 선비'라고 할 수 있겠다. 친가 쪽은 대단한가? 물론 그렇지 않다. 나는 어린 시절 한때 우리 집안에 자부심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제대로 보게 되었다. 우리는 몰락한 선비 집안의 전형이다. 학식은 쌓았지만 지혜를 쌓지 못했고, 격변하는 세상에서 생존력은 바닥을 기었고, 재물운이 가끔 따라올라치면 그로부터 일부러 도망 다닌 듯하다.
공부 잘한 거 말고는 내세울 게 별로 없는 집안. 내 대에서 이 저주가 끊어지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