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시작하는, 나의 처음

조용한 시작

by OVO

무대에서 시작을 기다리는 연주자들,

정해진 위치에 놓인 악기들,

들리지 않는 소리가 보이는 것 같은 고요한 분위기.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이미 시작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게 정확히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조화, 균형, 고요, 평화.

그런 감각들을 처음으로 느낀 건, TV에서 본 오케스트라 연주 장면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고,

악기를 만드는 장인이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꿈은 추억과 비슷한 무엇이었지만,

장인이 되고 싶은 꿈은 기억과 같은 무엇으로 제 삶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기억은 꽤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고, 그 무언가는 꽤 아름답고 조화로운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영을 잘하고 싶다.'

'악기를 다뤄보고 싶다.'

'기술을 배우고 싶다.'


그런 평범한 마음이 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실천, 아니 시작해 보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결핵성 뇌수막염이라는 병을 진단받았습니다.

사선을 넘나드는 병은 아닙니다.

꾸준히 약을 먹으면 낫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1년 동안 약을 성실히 복용하시면 됩니다.”


‘1년. 1년 동안 꼭 해야 하는 새로운 일이 하나 생겼구나.'


새로운 일! 그 말이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장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잠시 쉴 이유도 생겼겠다, 한번 해봐?’

‘그래 발 한 번 담가보자.’


지금까지 넘지 못했던 그 선을 이번엔 한번 넘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며칠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고,

회사 일을 당장 그만둘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의적으로 해석한 ‘안정가료‘를 방패 삼아 단축 근무를 신청했습니다.

일주일 중 이틀은 회사에, 나머지 다섯 날은 가구를 배우는 데 쓰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가구 제작자들 사이로 슬쩍 발을 내밀었습니다.

비좁은 온탕에 자리한 사람들 틈사이로 물 온도를 살피듯 슬며시 발을 담그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나무를 다뤄온 장인들, 저처럼 이제 막 시작한 사람들,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저는 아주 작은 길드의 일원이 된 것 같았습니다.

연주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공연은 이미 시작된 것처럼 저의 가구 제작은 그렇게 조용히 시작되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과 아이스크림 가게에 갔습니다.

아이스크림을 하나 고르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 아이스크림은 7년 인생에 처음 먹어보는 맛이야.”

그 말을 듣고 웃음이 났지만, 잠깐동안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그래, 맞아! 이렇게 시작하는 처음도 있지.'


처음 마주하는 일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시작하는 일은 신중해야 하고 많은 준비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처음이 그렇게 준비되진 않습니다.


그냥 '처음' 이 오기도 합니다.

그 처음이 중요한 ‘시작’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가볍게 발을 담그는 것.

40년 인생 처음 있는 일.

가구 제작은 그렇게 조용히 시작되었습니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