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햄버거 세 개, 그리고 카페에서 보낸 휴가

망친 하루가 회복이 되는 방식

by 느린 반보

번아웃을 겪고 나서
이상하게 ‘쉬는 날’이 더 어려워졌다.

회사에 휴가를 내고도
머릿속은 이렇게 속삭였다.

“이 귀한 날에 이러고 있어도 되나?”
“그래도 뭐 하나는 해야지. 책이라도 읽든가...”

몸은 분명 쉬고 싶은데,
마음은 “쉬는 것도 생산적으로 쉬어야 한다”며
계속 나를 다그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마음을 굳게 먹고 이렇게 정했다.

“오늘 휴가는, 제대로 망쳐보는 걸 목표로 하자.”

멋진 여행도, 알찬 계획도 없는
침대와 배달앱, 햄버거와 카페 정도로 충분한
그런 휴가.


침대와 배달앱이 전부인 오전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일상에 너무 지쳐서
한 번은 늘어지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다.

처음 계획은 이랬다.

“아침에 푹 자고 일어나서,
집 정리 좀 하고,
운동 살짝 하고,
카페 가서 책 읽으면서 하루를 보내야지.”

현실은
눈 떴다가 다시 감고,
또 떴다가 다시 감고,
그걸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아침이 훌쩍 지나 있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머릿속은 그러는데
몸은 이미 침대에 붙어 있었다.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책을 조금 넘기다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아우, 나 오늘 너무 게을러.”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어딘가 후련했다.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휴가 때 이러려고 휴가 내는 거지 뭐.”

그 한마디에
내가 조금 허락받은 것 같았다.

배가 출근 신고를 하길래
결국 배달앱을 켰다.
며칠 내내 밥이랑 면만 먹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햄버거가 당겼다.

그래서 그냥,
종류별로 세 개를 시켰다.

일어날 때는 나무늘보처럼 느리게 움직이면서도
초인종이 울리자마자
현관까지는 이상하게 빨랐다.

침대로 다시 돌아와
봉지를 풀어놓고
가장 비싸고 맛있어 보이는 것부터 골랐다.

“맛있는 건 마지막에 남겨두는 거 못 참지.”

그런 날엔 이상하게
사소한 전략이 또렷해진다.
결국 두 개를 먹고 나니
더는 못 먹겠었다.

“그래, 제일 맛있는 건 먼저 먹는 게 맞아.”
혼자만 아는 승리감 같은 게 올라와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기쁨은 반만, 청소도 반만

배부르니 잠이 또 쏟아졌다.
“앉아서 소화 좀 시킬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침대.
오늘의 천국은
침대 매트리스 한 장 위였다.

그러다 문득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세 시.

“아, 이러다 오늘 진짜 다 보내겠네.”

약간의 위기감이 올라와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보니 방 안에는
배달 봉지, 포장지, 옷, 세탁물...
눈에 띄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오늘은 기분이 애매하게 좋아서인지
조금 치워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큰 것들만 골라
쓰레기를 한 번에 모으고,
세탁물도 한데 모아
자리를 잡아줬다.

“아, 싫어...”
투덜거리면서도
정리하고 나니 또 기분이 좋아지는 거,
그게 또 사람 마음이다.

그래도 다 치우지는 않았다.

기쁨은 남겨둬야 하니까,
청소도 반만.

한 번 시작하면 구석구석 손대다가
휴가가 ‘해야 할 일’로 바뀐다는 걸
내가 제일 잘 안다.

조금 움직였더니 땀이 났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벌써 네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아침에 했어야 할걸 이제야 한다니.”
그 생각이 스치다가도
곧바로 이렇게 덧붙이게 됐다.

“그래도 오늘은 휴가잖아.
하루쯤은 이렇게 흘려보내도 되겠지.”



늦은 출발, 막차처럼 잡은 카페 한 자리

그래도 휴가인데
온종일 집 안에만 있는 건 아까웠다.

부랴부랴 옷을 골랐다.
셔츠, 바지, 신발, 모자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쓰다 보니
또 시간이 갔다.

도착하니 오후 다섯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휴일마다 자주 가는 돈가스 집이 떠올랐지만
배가 아직 덜 꺼져서 패스.

대신 늘 가던 체인 카페로 향했다.

내가 체인점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일정 금액만 내면
눈치 보지 않고
내 시간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니까.

아이스 롱블랙에
딸기 케이크 한 조각을 얹었다.

“오늘은 휴가니까, 디저트까지.”

3층으로 올라가 보니
늘 앉던 자리는 역시 만석이었다.
인생의 1등석은
항상 누가 먼저 타고 있다.

조금 아쉬웠지만
창가 쪽에 괜찮은 자리가 하나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오고 가는 게 보이고
바깥 풍경도 들어오는 자리.

가방을 의자에 걸고
창가 쪽으로 몸을 조금 틀었다.

가방 안에는 오늘의 동행,
하루키의 소설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노르웨이의 숲, 퀸, 그리고 욕심 많은 감각들

〈노르웨이의 숲〉을 꺼내
전에 접어둔 페이지를 펼쳤다.

예전에는 그냥
“이상하게 여운이 남는 소설” 정도였는데,
다시 읽으니 문장들이 조금 다르게 걸렸다.

아마 지금의 나는 예전보다
문장을 더 천천히 읽게 됐다.
그냥 독자라서가 아니라,
한 번쯤은 ‘쓰는 사람’의 마음으로 읽고 있어서.
그래서 같은 문장도
예전보다 더 오래 남았다.

그래서 오늘은
책만으로 끝내기엔 감각이 아까운 날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도 듣고 싶었고,
카페의 소음도 듣고 싶었고,
창밖 풍경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쪽 귀에만 이어폰을 꽂고
퀸 노래를 틀었다.

커피로 목을 적시고
딸기 케이크를 한 숟갈 떠먹었다.

어디서든 먹어본 맛인데도
오늘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휴가니까.
내 시간이니까.

욕심 많은 나는
디저트 한 숟갈, 커피 한 모금,
책 몇 줄, 음악 한 소절,
창밖 사람들 구경, 카페의 소음까지
그 모든 걸 놓치기 싫었다.

그러니 책이 빨리 읽힐 리 없었다.

그런 내가 조금 웃겼고,
그래서 더 좋았다.



이렇게 보내도 되는 휴가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문득 생각했다.

“아... 오늘 진짜 아무것도 안 했네.”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햄버거를 먹고,
방을 반쯤 치우고,
샤워를 하고,
늦게 나와 카페에서
커피와 케이크, 책과 음악, 사람 구경.

누가 보면
“이게 뭐가 휴가냐” 할지도 모르겠다.

근데 나에게는
이게 아주 오래 미뤄둔 회복 같은 하루였다.

어디 멀리 떠나지 않아도,
대단한 계획이 없어도,

침대와 배달음식,
샤워와 반쯤 정리된 방,
체인 카페 창가 자리,
한 권의 책과 한 곡의 노래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살아 있는 나’ 쪽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음 휴가도 이렇게 보내고 싶다.
아무에게도 자랑할 수는 없지만,
나한테는 꼭 필요했던 하루.”

오늘의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대단한 걸 해낸 건 없지만,
그래도 분명 하나는 해냈다.

아무것도 안 하는 하루를
스스로에게 허락해 준 것.



번아웃 이후의 휴가는
어쩌면 이렇게,
조용하게 다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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