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이후, 마음이 처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날
번아웃이 한창 심할 때는
사람을 만나는 일도, 어딜 나가는 일도
모두 ‘해야 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퇴근 후 약속이 잡혀 있으면
좋기보다 먼저 피곤이 올라왔다.
“오늘도 버텼는데, 또 버텨야 하네…”
그래서 한동안은
사람들을 조금씩 피했다.
카톡도 느리게, 약속도 최대한 미루고,
쉬는 날엔 침대와 방 안에 숨어 지냈다.
그 시기가 조금 지나고 나서야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내가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와
정말 오랜만에 산책 약속을 잡았다.
오랜만의 약속, 오랜만의 오솔길
그날은 하늘이 맑았다.
햇빛이 따갑기보다는 부드럽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친구를 만나기 전 잠깐 주저했다.
“오늘도 그냥 취소하고 집에 있을까?”
몸은 늘 하던 패턴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래도 약속 장소에 먼저 나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 끝에 나무들이 모여 있는 오솔길이 보였고
발길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친구와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섞여 퍼졌고,
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잘게 부서져 내려왔다.
걸으며 땀이 나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기분은 더 가벼워졌다.
몸은 무거운데 마음은 덜 무거운 날이었다.
오솔길 끝자락에 다다르자
바다와 섬들이 한 번에 시야로 들어왔다.
그 순간 문득
예전에 어딘가에서 봤던 풍경이 겹쳐 올라왔다.
정확히 어느 장면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때의 감정만은 비슷하게 남아 있었다.
친구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때 그 시절 기억나지?”
친구는 그 시절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놓았다.
우리가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짧은 시간인데도 한참을 지나온 것처럼 느껴졌다.
말이 많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
돌아오는 길에는
대화가 이어지다가도
한참 말없이 걷는 순간이 있었다.
예전의 나는 그 침묵이 어색해서
괜히 의미 없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침묵이 생기면 관계가 멀어지는 줄 알았다.
그날은 달랐다.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다.
그냥 옆에서 같이 걷는 발자국 소리가
말 대신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친구가 갑자기 물었다.
“너 요즘 글 쓴다 그랬지?”
“어… 뭐, 쓰긴 쓰지.”
“오늘 산책도 나중엔 글로 쓰겠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님 그냥 오늘은 이렇게 흘려보낼 수도 있고.”
진심은 그쪽이었다.
이 시간이 꼭 글이 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냥 오늘이 오늘로 남아도 좋았다.
조금 늦게 찾아오는 여운
오솔길 끝에 작은 벤치가 있었다.
우리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거기에 앉았다.
친구가 불쑥 말했다.
“근데 너 예전 같지가 않다.”
“어디가?”
“예전엔 뭔가 항상 급해 보였거든.
뭐든 빨리, 많이 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좀 느려진 느낌?”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말했다.
“번아웃 오고 나니까
옛날처럼 살았다간 진짜 죽겠더라.”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금이 더 너다운 것 같아.
숨 좀 쉬면서 사는 느낌?”
그 한마디가
그날의 여운이 되어 오래 남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앞으로의 계획보다
지나온 시간들을 더 많이 떠올린 하루였다고.
번아웃이 심할 때는
과거를 떠올릴 힘조차 없었다.
내일 하루 버티기도 벅찼으니까.
그런데 그날 오솔길을 걷는 동안
내 마음은 오랜만에
과거와 현재 사이를 천천히 왔다 갔다 했다.
“아, 그래도 나…
여기까지는 잘 살아왔구나.”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오늘 찍어둔 사진을 넘겨봤다.
오솔길, 나무, 친구의 뒷모습,
곁눈질로 찍힌 내 그림자.
울지는 않았는데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은 있었다.
“이렇게 걷는 날이
다시 올 줄은 몰랐네.”
번아웃으로 바닥을 찍을 때만 해도
나는 다시 누군가와 천천히 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근데 오늘은
세상이 조금 덜 무섭게 느껴졌다.
회복은 빠르게 오지 않는다.
대신 이런 날들이 하나씩 쌓인다.
오랜만에 친구와 걷는 산책,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대화,
같이 들이마신 바람,
집에 돌아와서야 천천히 올라오는 여운.
그래서 오늘을 이렇게 기억해 두고 싶다.
번아웃 이후,
내 마음이 처음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날.
그리고 오늘의 나에게도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조금 늦게 도착해도 괜찮아.
그래도 결국, 여기까지 와 줬잖아.”
그날 이후로 나는 알게 됐다.
회복은 멀리 떠나는 일이 아니라, 내 몸이 원하는 속도를 허락하는 일이라는 걸.
그래서 다음 휴가엔 아예 ‘아무것도 안 하는 하루’를 연습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