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사람입니다
요즘은 조금 덜하지만, 한때 MBTI가 한창 유행했을 때는 처음 만나는 사람마다 거의 인사처럼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이 질문이 싫었던 건 아닙니다. 다만 문제는, 제가 MBTI 무료 검사를 받을 때마다 유형이 계속 바뀐다는 데 있었습니다. 한 번은 ISTJ였다가, 며칠 뒤에는 ISFJ, 또 어느 날은 INFJ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설명하기가 애매해져서, 결국 저는 가장 안전한 답변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I요.”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I 중에서도 뭐요?”
“INFP예요? ISTJ예요?”
“어? 그거... 그때 그때 달라서요... 그래서 저는 MBTI를 믿지 않습니다. 심리학자들도 MBTI는 신뢰성이 떨어지는 검사라고 하더라구요.”
이러저리 빙빙 돌리며 나름의 답변을 하기는 했지만 뭔가 찝찝한 마음이 들어 결국 저는 유료 MBTI 검사를 받아보기로 했습니다. 이제는 확실한 답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돈까지 냈으니, 적어도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 하나쯤은 생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과는 두구두구두구....ISTJ라고 나오더군요. 다만 T인데 F에 가까운. 거의 중간 값에 위치하더군요.
솔직히 말하면, 아주 납득이 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유료 검사였고, 무엇보다 “나는 돈을 주고 검사했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에 그 뒤로는 누가 물어보면 당당하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저는 ISTJ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건이 터졌습니다. .
“뭐? 누나가 ISTJ라고?”
“누나 ISTJ 만난 적 있어? 없지? 누나랑은 완전 안 맞아.”
"공연보고 와서 나한테 뭐라고 했어? 역시 다 아는 곡이였어. 좋은 공연이였지만 이런 부분은 아쉽군. 나 방금 감상평 되게 전문가처럼 말하지 않았냐?라고 해놓고선 지금은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어야 했어. 나는 재능이 없나봐라고 말하고 그냥 그때 그때 상황에 맞춰서 생각나는 말 중에서 가장 적당한 것을 골라서 말하는 것 뿐이야."
"아니거든. 그때랑 지금이랑 상황이 다르잖아"
"누나는 누나가 뭐라고 말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잖아"
"나도 내가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하거든. 단지 워딩 하나하나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할뿐이지"
"그래서 누나가 ISTJ가 아니라는거야. ISTJ였으면 이미 내 말에 칼같이 반박을 했어야 해 그러니까 어디 가서 ISTJ라고 말하지 마.”
돈과 시간을 들여서 한 MBTI 정체성이 가족에게서 하루 만에 박탈당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편에게 마지막 확인을 해봤습니다.
“나 INFP인 것 같아. 어떻게 생각해?”
남편은 잠깐 생각을 하는척 하더니 5초만에 답했습니다.
“응. 너 INFP야.”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비싼 돈을 주고 MBTI 유료 검사를 받았던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쩌면 MBTI는 내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지를 더 잘 보여주는 도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생각이 많고 상상력이 풍부해서, 공포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 속 장면이 실제로 우리 집 거실에서 재현될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녁에 욕실에서 머리를 감고 있으면 귀신이 위에서 처다본다던가 귀신 머리카락을 내가 감기고 있는건 아닌가하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덜덜 떨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특징이 INFP의 성향이라고 하더군요.
드라마나 영화 속에는 늘 차갑고 이성적이며,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냉철하게 판단하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이 멋있어 보였고,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고, 괜히 이성적인 사람인 척 굴었던 순간들이 MBTI 검사 결과에 고스란히 반영된 건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MBTI는 저의 진짜 성격이라기보다는,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저의 희망사항에 더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상하게도, 저를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일수록 제 유료 검사 결과의 MBTI를 맞히지 못하더군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들 한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너 그거 아니야.”
요즘 누가 MBTI를 물어보면, 저는 잠시 고민하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글쎄요. INFP로 살다가, 가끔 ISTJ인 척하다가, 집에 오면 그냥 사람입니다.”
이게 지금까지 살면서 제가 받아본 검사 중에서는 가장 정확한 결과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