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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닫아야 했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이방인의 시간 엄마이니깐

by 전업맘 첫시작

말을 하지 않고 휴대폰에 메모해 둔 목적지만 보여준다. 우린 그저 창밖만 바라볼 뿐 , 택시는 그렇게 달렸다.

아이들과 시내를 나가는 길에 미리 일러둔다. 말을 하지 말고 조용하라고 당부를 했다. 아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눈꺼풀만 끔뻑끔뻑 거린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간단한 인사만 하고 조용히 내렸다.


남의 나라에 산다는 것은 어떨까? 내 집 없이 월세나 전세에 사는 느낌과 같다고 해야 할까? 중국을 가기 전 2년마다 집을 옮겨 다녀야 했다. 전셋값이 치솟아서 옮겨야 했고 , 집주인이 집을 판다고 또 옮겨야 했다.

연식이 오래된 샤워기가 고장이 났을 때 새것으로 교체하지 않으면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 또래인 집주인에게 어처구니없는 말을 듣기도 했다. 돈을 내고 살지만 그 집은 내 집이 아니었다.

중국 그림 2.png

그런 일은 중국에서도 반복됐다.

그때는 사드배치 문제로 한중관계가 얼어붙었고 ,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불편한 시선을 받아야 했다.

영사관에서도 외출을 자제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아이들 학교 학부모 모임은 취소되기도 했고 한국기업이 운영하는 백화점 앞에서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택시 승차를 거부당했다는 소식이 자주 들려왔다. 급한 일이 아니면 외출을 자제하기도 했고 , 되도록 택시 대신 버스를 타려고 했다.

1주일에 3번씩 중국어 수업을 들었다. 선생님은 중국인이었고 우리는 숨을 죽이고 수업을 들어야 했다. 다른 반에서는 중국선생님이 노골적으로 적대적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할까?"

"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숨을 죽이고 살아야 할까?"

묻고 또 물었다. 남편의 직장문제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지만 , 남편도 한국도 중국을 원망해도 답은 없었다.

나는 엄마이니깐 더욱 강인해져야 했다.

겁이 나도 밖으로 나가야 했고 , 억울해도 침묵해야 했고 , 불안해도 평온한 척해야 했다. 아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숨을 고르면서 살아냈다. 그 시절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지 못한 것들을 이젠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다.

불안했고 , 무서웠고 , 겁이 났고 , 외로웠다고....

하지만 그 시절이 있었기에 단단한 지금의 내가 있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호치민에서 지낸 1년, 어느 정도 정착되고 안정기에 들었을 때 복귀 발령이 떨어졌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또 한 번 크게 흔들렸다.

" 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 걸까?"

" 훗날 얼마나 크게 성장시키려고 우리를 흔드는 것일까?"

예전 같으면 불안함과 두려움에 몇 날 며칠을 헤맸을 것이다.

이번은 달랐다. 이내 받아들이고 한국집을 구하고 , 귀국짐 정리, 이사 모든 것을

한 달 내에 할 수 있었다.

불안해도 견뎌 낼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 시간들이 나를 지켜내는 버팀목이 되어준다는 것을 ...

이제는 안다.

" 잘 살았고, 잘 견뎌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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