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저 신랑 돈 보고 결혼했어요
“희연 안녕? 같이 글쓰기 하실래요?” 어느 날 화숙에게서 이런 카톡이 왔다. 내게 긍정에너지를 주는 사람이 제안하니 나는 무조건 “YES”했다. 그러나 곧이어 “글쓰기 아무나 하나?” 후회가 되고 두려움이 몰려왔다. 이프 토론은 몰라도 글쓰기는 나와 무관한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글쓰기라니! 그렇게 기적처럼 내가 글쓰기를 하게 됐다. 이게 얼마나 큰 용기의 시작인 줄 처음에는 잘 몰랐다. 결코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아님도 알게 되었다. 미약한 내 목소리를 내서 내 삶의 이야기를 써 보려 한다.
네! 저 신랑 돈 보고 결혼했어요
우리 부부의 처음은 평범하지 않은 시선으로 시작되었다. 남편은 딸아이가 있는 재혼남이었고 나는 초혼이었다.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연을 따로 설명해야 할 때가 많았다. “우리의 결혼은 둘이 아니라 셋이 하는 거”라고 누구에게나 감추지 않고 말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리다 어느 날 두 사람 뜻이 맞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의지하며 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러 살 게 된 것뿐이었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궁금하냔 말이다.
“남편이 얼마나 해줬어?”
“신랑에게 부인 문제가 있었어?”
이런 식의 질문을 수없이 받아야 했다. 친구들 중엔 우리가 얼마 못 살고 바로 이혼할 거라며 신중해지라고 면전에 대고 말한 적도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의 결합이 사람들에게는 하자가 있는 이들이 만나서 사는 조합인듯했었다. 어느 날은 설명하는 것도 힘들어서 결국 대놓고 말해 버렸다.
"네! 저 신랑 돈 보고 결혼했어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결합하는데 주변인의 편견을 생각해야 하는 현실이 힘들었다. 물론 사람들의 시선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세상이 그러하니 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맞춰 설명도 하고 더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결혼 생활 20년이 지났고 나는 세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다.
남편과 싸우는 일도 많았고 시집살이도 고되게 했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시아버지의 지지도 받았다. 가끔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다 우리 이야기가 나오곤 한다. “아직 이혼하지 않고 살고 있냐?”라고 말이다. 이제는 그들이 틀리고 우리가 맞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자는 이런 취급을 받아도 괜찮은지
1남 3녀 중 맏이에 딸로 태어난 나는 맏딸의 책임을 부모에게 강요받았다. 부모는 바쁘다는 이유로 맏이인 내가 아이들을 잘 돌봐야 한다고 했다. 어린 나는 늘 억울했지만 감내해야 했다. 동생들이 잘할 때는 동생들에게 칭찬이 돌아가고 동생들이 잘못할 때는 아낌없는 훈계가 내게 돌아왔다. 잘하든 못하든 내게 책임이 있다면 내게 돌아오는 게 맞지 않나?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맏이인 나는 부모를 대신할 수도 없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동생들을 잘 돌보기는 무리였다. 매일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게 어린 내게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가정 형편상 나는 산업체 고등학교 진학해야 했다. 친구들과 다르게 일하면서 공부하는 건 쉽지 않았다. 처음 접하게 된 건 기숙사, 학교, 현장(방직공장)이었다. 현장은 각각의 부서환경과 조건들이 천차만별이었다. 내가 작업했던 현장은 작업 난이도가 상에 속했다. 휴무도 별로 없이 무조건 일하는 기계가 되어야 했다. 기계가 놀고 있다 싶으면 관리자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폭언과 폭행을 했다. 나는 사람으로 일하러 왔건만 현장에서는 기계만 있고 실적만이 존재했다. 다른 부서에서 산업재해를 당하는 아이도 있었다. 어린 학생들이 위험한 작업 현장에서 보호장비도 없이 똑같은 동작으로 하는 일이 기계결함이나 자재결함으로 한순간 암흑으로 변했다.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힘없는 학생 노동자였다. 희망이 원망이 되고 암흑이 되는 순간이었다. 가끔 일어나는 성희롱도 있었다. 그저 내가 당하지 않고 겪지 않았다는 데 위안을 삼았다. 진로 결정할 때 현장에선 더 있기를 바랐으나 나는 거절했다. 나는 기계였기 때문이다.
산업체학교 졸업 후 구인 광고를 보고 작은 건축 사무실에 이력서를 내러 갔다. 면접을 보고 바로 출근하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출근해 일을 시작했다. 마음에 걸리는 건 여자가 나 혼자뿐이라는 점이었다. 3일이 지난 후부터였다. 남자들끼리 모여서 쑥덕거리고 있었다. 신경은 쓰였지만, 남자들끼리 일이라 생각했다. 4일째 그들의 장난이 드러났다. 내가 있든 없든 음담패설을 했다. 사장이 있을 때는 잠잠했다. 5일째 그들의 장난이 도를 지나쳤다. 한 남자가 갑자기 바지를 내렸다. 별거 아니라는 식이었다. 나는 충격에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여자는 이런 취급을 받아도 괜찮은지, 서러운데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세상이 두려웠다. 내가 세상에서 무얼 하며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차별금지법과 무관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프에서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했다. 책을 읽고 토론하는 첫날부터 내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각자의 생각과 환경대로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 삶에 목소리를 주고 담대하게 작은 소리라도 내도록 격려하는 게 페미니즘이었다. 나와 상관없는 줄 알았던 페미니즘이 실은 내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좋았다. 나는 할 수 없다고 치부했던 것들을 다시 보게 됐다. 페미니즘이 알고 보니 이미 내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참 똑똑한 사람이었구나, 내가 더 좋아졌다.
이슬아 작가의 《날씨와 얼굴》에도 놀랐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여긴 차별금지법이 나왔다.
“차별금지법과 무관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나 삶의 어떤 순간에는 반드시 소수자가 된다.”(115쪽)
누구나 소수자가 된다니, 나도 예외가 아니란 말이었다. 나는 소수자를 너무 특별한 경우만 생각하고 나와 먼 이야기로 치부해왔던 것이다. 소수자는 내 삶 속에 늘 공존하고 있었다. 소소한 일상에서 차별받고 존중받지 못하면서도 지나쳐온 일들이 그랬다. 무시하고 참고 인내하고 희생으로 탈바꿈하며 살아야 했다. 당연하고 그래야 나로 인정받고 사람으로 사는 거라고 추어주면서. 소수자들의 삶이 그런 거였다.
맏딸, 산업체학교, 여자, 부인, 맏며느리…. 48년 동안 소수자였으나 나에 대해서 모른 채 살아왔다. 내 살아온 이야기는 평범하고 별거 없고 부끄러운 거라고만 생각해 묻어두기에 바빴다. 그동안은 내가 없는 삶이었다면 지금부터는 나를 온전히 넣어서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이 되기를 바라고 또 바라본다. 내가 목소리를 내며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내 지나온 삶은 질책이 아니라 칭찬을 받았어야 마땅하다. 내 소리가 들리게 된다면 어떻게 달라질까? 나는 힘이 날까? 세상이 바뀔까? 아니 당장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좋다. 나는 나로서 흔들리지 않고 단단하게 내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피 한 잔에 글 쓰기 좋은 오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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