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빌리루빈은 수명을 다해 폐기된 적혈구가 간을 통해 처리되어 배설되는 찌꺼기입니다.
2. 적혈구는 신체 조직에 산소를 운반하고 이산화탄소를 수거해 폐로 보내는 혈액 세포입니다. 헤모글로빈이라는 단백질이 적혈구의 핵심 구조입니다. 헤모글로빈 1 분자는 4개의 산소 분자를 끌어 안고, 몸 곳곳으로 배달합니다.
3. 헤모글로빈이 산소 분자를 실을 수 있는 비결은 철 이온 (Fe2+)에 있습니다. 철 이온은 마치 롤러코스터의 안전 바처럼 산소 분자와 결합했다가 목적지에 다다르면 풀어 줍니다.
4. 한데 구불구불한 혈관을 못해도 하루에 수 백 km를 왕복해야 하는 직업 특성상, 아무리 세포막을 튼튼히 만들었다 해도 적혈구 수명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120일쯤 되면 이리저리 부딪히느라 적혈구의 세포막은 닳고 얇아져 터져 버리기 직전이 됩니다. (게다가 혈관은 포장도 안되어 있습니다.)
5. 신비롭게도 우리 적혈구는 자신의 수명이 다 되면 세포 막에서 '나 이제 내구연한이 끝났소, 폐기해 주시오'라는 표시를 내는 시스템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6. 고무가 닳아 심지가 드러난 타이어처럼 세포막이 얇아진 적혈구를 폐기하는 곳은 비장과 간입니다.
7. 적혈구의 주성분인 헤모글로빈 또한 조각조각, 분해됩니다. 당연히 철 이온(Fe2+)은 소중하므로 다시 헤모글로빈을 만들어 내는 데 재활용되고, 나머지 부분은 아깝지만 폐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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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바로 이 폐기되는 헤모글로빈의 찌꺼기가 오늘의 주인공, 빌리루빈입니다.
9. 헤모글로빈에서 분리된 빌리루빈을 당장 몸 밖으로 내버리진 못합니다. 분해 직후의 빌리루빈은 수용성이 아니어서 혈액에 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처리 과정이 필요합니다. 예상하셨듯이 재처리 과정을 맡은 조직은 간입니다.
10. 여기서부터 조금 헷갈리실 수 있는데 기억을 잘해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빌리루빈이 상승했을 때 의사들이 말하는 진단명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간에서 재처리 되기 전의 '독한' 빌리루빈은 간접 빌리루빈(unconjugated bilirubin)이라고 부르고, 간에 의해 재처리가 된 '순한' 빌리루빈을 직접 빌리루빈 (conjugated bilirubin)이라고 부릅니다.
11. 간에서 재처리 과정을 마친 '순한' 빌리루빈(직접 빌리루빈)은 담즙에 녹은 뒤 변에 섞여 무사히 몸 밖으로 배출됩니다. 아참, 찌꺼기인 빌리루빈은 색을 띱니다. 담즙이 시커먼 것도 빌리루빈 탓이고, 대변이 갈색인 것도 빌리루빈 탓이고, 소변이 노란 것도 빌리루빈 탓입니다.
12. 빌리루빈의 상승을 딱 한마디로 말씀드린다면 다름 아닌 하수구 역류와 매우 비슷합니다.
13. 피부가 노랗게 변하는 증상, 황달은 배출되어야 할 빌리루빈이 넘치고 넘쳐, 피부에 빌리루빈의 색이 나타난 것입니다.
14. 빌리루빈이 '무슨 이유로 인해' 흘러가야 할 하수구로 가지 못하여 "혈관"으로 넘쳐 흐르면 혈액 중 총 빌 리루빈 수치가 올라갑니다. (정상치는 ≤ 1.20 mg/dL)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문제가 되어서 넘쳤나'라 할 수 있습니다.
15. 다시 적혈구의 상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빌리루빈이 생성되는 차례를 짚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수명이 다한 적혈구가 분해됨 2) 분해를 완료한 뒤 만들어진 찌꺼기인 빌리루빈이 혈액을 통해 간으로 흘러 들어옴 3) 간에서 '독한' 빌리루빈'을 '순한' 빌리루빈으로 재처리함 4) 담즙에 섞임 5) 소변이나 대변으로 배출됨
17. "1) 수명이 다한 적혈구가 분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 원인은, 분해되는 적혈구가 많아서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용혈'이라고 부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수명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적혈구를 너무 일찍 폐기하는 일이 생긴겁니다. (아직 타이어 남았는데!) 간에서 처리되기 전이므로 간접 빌리루빈이 높고 무엇보다 빈혈이 동반됩니다.
18. 2),3)의 과정 즉 '재처리' 과정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는 간의 문제입니다. 앞서 다룬 AST, ALT가 높아지고 감마지티피도 상승합니다. 급성 바이러스성 간염, 독성, 허혈성 간손상 또는 자가면역성 간염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영양제나 버섯과 같은 음식도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19. 4) 번의 상황이 가장 직관적이며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정말 말 그대로 꽉 막힌 탓에 '하수구가 역류하는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담석이나 담도암 등이 대표적입니다. 담즙이 나가야 할 길(담도)을 막으면 담즙도 정체되고 빌리루빈도 함께 정체됩니다. 총빌리루빈이 높아졌을 때 의사들이 간초음파를 보겠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4) 번을 의심해서 하는 제안하는 것입니다.
20. 만약 4) 번의 문제로 빌리루빈이 상승했다는 것이 확인되면 의사들은 매우 긴장합니다. 말 그대로 큰일이 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 오해는 마십시오. 빌리루빈이 올라서가 아니라 담즙 때문입니다. 이때 종합병원 등에서 시행되는 시술이 바로 ERCP, 내시경역행담췌관조영술 입니다. 내시경으로 담즙이 나오는 길을 되짚으며 어디에서 막혔는가를 찾는 시술입니다.
21. 그런데 저와 같은 1차 의원에서 빌리루빈 상승의 원인은 대부분 질베르 증후군 (Gilbert syndrome)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인구의 약 5% 정도에서 '간의 재처리 과정 (UDP-glucuronyltransferase)'에 결함이 있는 탓에 재처리 속도가 느려지고(약 30% 성능) 처리되지 못한 '독한' 빌리루빈이 혈중에서 검출됩니다. 질베르 증후군의 경우 빌리루빈이 웬만하면 4-5 mg/dL 는 넘지 않고, 다른 생화학 검사나 간 초음파 검사는 정상 소견을 보이는 특징이 있습니다. (17번에서 오해하시지 마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2. 극심한 스트레스, 과도한 운동이나 육체적 피로, 금식과 같은 다이어트, 탈수, 독감과 같은 감염의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빌리루빈 수치가 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간 기능 자체에 심각한 손상을 주지 않아 대부분은 특별한 치료가 필요 없습니다. 증후군이 있다고 해서 수명이나 삶의 질에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간에 취약성이 있으므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관리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