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처럼 폭염이 자취를 감춘 밤, 진초록 넝쿨 사이로 살포시 피어오른 능소화는 여
전합니다. 한낮의 밝은 빛 아래에서 그것은 눈길을 빼앗아갈 듯 선명하죠. 잔상 때문
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둠 속 달빛에 의지한 능소화는 희미한 붉은 점입니다. 그 색이
잠시 가리워지기는 해도 명멸이 멈춰버리는 것처럼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조
용히 잠재해 있다가 어느 순간 제 모습을 드러내죠. 모든 색이 녹색의 평균율을 따를
때, 홀로 보색을 차려입어야 하는 꽃의 운명인 듯합니다.
능소화라는 이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능소(凌霄)’는 ‘하늘을 능가하다’는
뜻입니다. 즉 능소화는 하늘을 능가할 만큼 높이 솟은 꽃이죠. 한여름의 절정에 만개
하니 능소화는 더위를 묘사할 만도 한데, 그저 높다고만 하네요. 오후의 골목에서 마
주친 붉은 낙화는 서늘한 감정을 불러오는데 말예요. 저녁의 능소화도, 새벽의 능소화
도 그리고 폭염이 자취를 감춘 밤의 능소화도 서늘하다라는 감정과 조응하죠. 그러고
보니 ‘능’은 얼음을 뜻하기도 하고, ‘소’는 밤을 뜻하기도 합니다. 무더위에 지쳐 서늘
한 밤을 기다리는 마음이 그리 비슷합니다.
능소화처럼 이맘때쯤 어울리는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선선한 바람’을 뜻하는 한자
어 ‘시(颸)’입니다. 시는 바람 ‘풍(風’)과 생각 ‘사(思)’로 이루어진 회의(會意)자예요. 누
구의 생각이고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절의 사이를 찾는 단어로는 제격인 듯
합니다. 거짓말처럼 폭염이 자취를 감춘 밤, 능소화를 상상하는 몇 분간, 불어오는 선
선한 바람은 상념의 배경으로 모자람이 없으니까요. 상념을 찾아 멀리 떠나지 못한다
면, 이만한 것도 없습니다. 서늘한 밤과 선선한 바람. 이 두 가지면 괜찮습니다. 더위가
지난 후에는요.
-2018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