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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바다 Nov 18. 2024

유년의 겨울일기

부조리와 갑질이 당연했던


겨울이었다.

운동장에서 소사 아저씨가 한 손에는 낫을, 또 한 손에는 소주병을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다.

"쓰벌 내가 개만도 못하냐 교장 나오라 그래" 윗옷까지 벗고 난동을 부리는 아저씨 등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팔뚝에는 一心이라는 빛바랜 문신도 같이 성을 내고 있었다.

 

소사 아저씨는 어릴 적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는데, 교장 선생님이 머슴처럼 부려먹었다. 교장선생님댁 김장할 때도 내 키만 한 김장독 세 개를 한겨울에 땀을 흘리며 땅속에 묻어주었고, 눈 내린 아침이면 싸리 빗자루로 교장 관사에서 학교까지 눈을 쓸어 길을 만들었으며 기르던 셰퍼드 개밥도 하루 세끼 챙겨 줘야 했다. 오늘 아침엔 개밥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같은 학교 다니는 4학년 늦둥이 딸 복순이 앞에서 심한 잔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용서받지 못한 아저씨


교무실에서 신고를 했는지 경찰 두 명이 도착했고

그제야 숨어있던 교장선생님이 뛰어나와서는 경찰에게 고자질을 했다.

"저놈이 내 셰퍼드 개집도 다 때려 부수고 낫으로 나도 죽이려 했다니까요."

계급이 낮아 보이는 뚱뚱한 경찰이 언 손을 호호 불며 연신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그동안 쌓였던 울분을 토해내던 아저씨도 경찰 앞에선 술이 깨는지 낫을 내려놓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경찰과 교장 선생님이 잠시 얘기하더니 소사 아저씨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양쪽에서 팔짱을 낀 채 눈 쌓인 운동장을 가로질러 사라져 갔다. 아마도 교장선생님이 잡아가라고 했나 보다. 그 뒤를 복순이가 울면서 따라갔다. 

아저씨는 불쌍했지만 까만 제복의 경찰관은 수사반장 최불암 보다 더 멋있었다.

저녁에 아버지가 엄마에게 말씀하셨다.

"교장이 김 씨를 고소했다는 구만."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셨다.

풀썩 처마 밑에서 고드름이 떨어졌다.


소사 아저씨가 잡혀간 후로 아이들은 교장 선생님과 마주치면 인사도 안 하고 도망쳤다.

멀리서 교장선생님이 보이기라도 하면 변소로 뛰어가 숨어있었다. 그럴 때마다 왕자표 크레파스로 교장 선생님 바보라는 낙서도 했다.

책상, 걸상에 다리가 부러져도 고쳐줄 사람이 없었고, 복도의 유리창이 깨져도 며칠씩 그대로 있었다. 엄마는 교장이 나쁘다는 소문이 나서 소사 일하러 오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봄이 오면


오늘 아침 등굣길에서 진달래 하나를 보았다.

학교 화단의 마른풀 위로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며

봄이 오고 있었다.

한 겨울에 잡혀갔던 소사 아저씨는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로 석방됐다며 선생님들끼리 하는 말을 들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감옥에서 풀려났다는 얘기인 것 같다. 일주일 후 소사 아저씨네는 태백으로 이사를 갔다. 이삿짐을 싸면서 교장이 있는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눌 거라며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


월요일 조회시간 전교생이 앞으로나란히 줄을 섰고 선생님들도 열중쉬어 자세로 교장선생님의 훈시를 들었다.

"무성 국민학교 어린이들은 나라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돼야 합니다."

스피커에서 시끄럽게 들리는 교장선생님의 가르침이 오른쪽 귓구멍으로 들어왔다가 왼쪽 귓구멍으로 빠르게 빠져나갔다.

나라에서 필요한 사람보다 지금 학교에서 제일 필요한 사람은 소사 아저씨인데 교장선생님만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손수건을 가슴에 단 1학년 아이들은 지루했는지 노골적으로 장난을 치기 시작했고, 소사 아저씨가 교무실 창문마다 막아놓았던 비닐이 뜯겨져 봄바람에 펄럭 거리며 교장선생님의 연설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 와중 목줄 풀린 영식이네 메리까지 학교에 들어와 '우라질 놈의 개새끼'라는 쌍욕을 하며 영식이 할머니가 그 뒤를 쫓고 있었다.


볼수록 아름다운 조회시간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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