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조(自嘲)

내가 나를 비웃고 싶던 밤에

by 안개바다

어이없다. 그대의 기억은 어느 정도 고갈된 줄 알았는데 언제 그려놓았는지 달력의 빨간 동그라미,
필시 술기운에 또 청승을 떨었나 보다.

소주 대신 락스를 마시면 기별 없는 이름 하나 하얗게 표백될는지.

옥탑 화실 창가에서 오렌지빛으로 흔들리던 해바라기 소피아로렌이 한심하게 내려다보며 잔소리를 한다.

"아직도 그녀의 생일을 잊지 않고 있다니 쪽팔리지도 않으신가요?"


밤꽃 향기 정겨운 목련 여인숙 205호

그대가 못 견디게 그리운 날에는 목련 여인숙으로 간다.

설마 후미진 골목 싸구려 여인숙에 순백의 백목련을 보러 왔을까.

목련 여인숙엔 목련 꽃은 없고 방마다 빨간 장미만 피어있다.

덩굴장미가 인쇄된 벽지에는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원색적인 낙서와 신문 사회면에서나 볼법한 기막힌 사연들을 적어놓았다.

엽편소설이나 수필에 가까웠던, 자서전 또는 서늘한 유서까지.


'바보 똥개'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낙서가 유독 눈에 거슬려 바보 똥개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손에 물을
묻혀가며 박박 문질러 버렸다.

옆방에서는 두런두런 얘기를 하더니 여자가 목놓아 울었다. 끝내는 남자도 울고 있다.

그대들은 무슨 연유로 끈적 거리는 여인숙 이불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울고 있을까.

오늘은 나도 바보 똥개 지운 자리에 시답잖은 엽서를 쓴다.


벽 너머로 띄우는 엽서 한 장

새벽 두 시 잠 못 들어 슬픈 동지들이여!

이제 그만 우세요. 그래도 그대들은 서러운 마음 기대고 울 수 있는 두 영혼 있으니 그것으로 위안이나 삼을 일. 나는 오늘 완벽한 혼자가 되어 혼자 울고 있답니다.

혹시 내 눈물 모여 투명한 봄비가 된다면 그대들 가꾸는 꽃밭에 소리 없이 내려서 모든 꽃들을 피워 드릴게요. 그러니 그만 울고 부디 행복이란 것도 느껴보세요.

from. 205호 loser


옆방의 울음은 그쳤고 가끔 들리는 여자의 비음 섞인 숨소리에 부끄럽게도, 온몸의 실핏줄들이 당겨진 고무줄처럼 팽창하고 있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