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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Oct 27. 2024

할머니의 목례

당연한 것에 대한 감사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늘어난 체중계의 숫자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느껴지는 피곤함도, 싸늘한 아침공기가 춥게 느껴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전 스케줄을 마치고 오후에 예정된 두어 개의 일을 봐야 했다. 여러 곳을 방문해야 해 계속 이동을 해야 했고 오늘따라 옆 차선에서 갑자기 차가 깜빡이도 켜지 않고 위험하게 튀어나온다거나 도로에 사고 차량이 있어 정체를 겪기도 하고 일방통행 길에서 역주행 차량을 만나는 등 사소한 불쾌감이 여럿 있었다.


일정을 마치고 입시학원에 다니는 아이를 픽업하러 가야 하는데 시간 텀이 좀 있어서 주차장에 주차된 차 안에서 한 십 분 정도 쉬었다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타기도 전에 안에 있는 남성분이 문을 닫으려고 해 닫히는 문에 다리를 부딪혔다.

별생각 없이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 같이 탔던 남성분도 같은 층에 내려 차로 이동하는데 내 차 바로 옆에 주차된 차에 타셨다. 나도 차에 타서 의자를 좀 젖히고 쉬고 있는데 갑자기 '쿵' 하고 차에 충격이 왔다. 옆차량 남성분이 뒷좌석에 타셨었는지 내리려고 문을 열면서 꽤나 세게 내 차에 문을 부딪혔다. 그분은 차 안에 내가 타고 있는 줄 알고 있었지만 잠시 멈칫해서 서 있다가 바로 자리를 떠났다.

'에잇, 오늘 좀 꼬이는 날이 되려고 이러나.'

사과를 듣는 게 중요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또 기분이 나빠졌다.


아이를 픽업하고 주차장에서 나오려는데 이번엔 택시 한 대가 주차장 출구를 막고 있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택시는 금세 차를 뺐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에휴.. 이건 또 뭐지. 오늘 왜 이러는 걸까?' 하며 돌아오는 길에 아이에게 오늘 이런 일들이 있었다고 왠지 운이 좋지 않은 날인 것 같다는 하소연을 하던 참이었다.


좁은 도로에 신호가 걸려 섰는데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길을 건너고 계셨다. 걸음이 불편하신지 천천히 건너시다 보니 신호가 다시 빨간불이 되도록 횡단보도를 반밖에 건너시지 못했다. 차량신호였지만 누구나 그렇듯 할머니가 길을 다 건너시길 기다렸다. 내 차 뒤로 서너 대 차가 더 서 있었는데 누구 하나 재촉하지 않았다. 할머님이 길을 건너시는 동안 나는 아이에게 오늘의 소소한 불쾌함을 하소연하고 있었는데 길을 다 건넌 할머니께서 돌아보시곤 작은 목례로 인사를 건네셨다.


횡단보도가 빨간 불이 되어도 길을 건너는 사람이 있으면 다 건널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나만 하는 일도 아니고,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내가 차에서 내려 할머니를 도와드린 것도 아닌데... 인사를 해주셨다. 나도 얼른 같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하고 감사해졌다. 할머니의 인사 한 번에 내가 오늘 이런 선물을 받으려고 운이 나빴던 거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는데 큰 칭찬을 받은 것 같은 기분과 같이 할머니가 길을 다 건너시길 기다린 서너 대의 차들까지.. 갑자기 그 장면들이 너무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 운이 좋지 않던 날에서 마음 따뜻하고 감사한 선물을 받은 좋은 날이 되었다.


가끔 이렇게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늘어난 체중계의 숫자도 부딪힌 차 문도 위험한 운전자들도 모두 잊히게 할 만큼 할머니의 작은 인사에 담긴 감사함이 나의 하루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배려와 기다림이 누군가에겐 고마운 일이 되기도 하고 그 작은 친절에 대한 감사가 또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기도 한다.


할머니의 목례가 오늘의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제 하루에 큰 선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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