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가자.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 행복이라는 가치 때문이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나는 행복에 대해 어린 시절부터 많이 고민했다.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 ‘웃자’라는 말을 거의 고등학교 시절부터 항상 가지고 있었다. 어린 나에게 행복이란 늘 웃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내 얼굴을 본다면, 그런 다짐이 남아있지는 않아 보인다. 나의 다짐은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일에 간택받았다.
나는 내 과거에 대해 참회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일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책을 읽고 책의 내용을 아이들에게 전달하고 어설프게 설교하다 보면 과거의 내가 언젠가 그 이야기를 듣고 감명받는 날이 오리라 생각했다. 물론 가끔은 힘든 날이 있다. 사실은 늘 힘들다. 내가 한 말이 어떤 기준에서 옳은 말인지 알 수 없다. 아니 말 자체는 옳은 말이라 하더라도 그걸 전달하는 내 마음은 과연 올바름이 서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내 올바름을 세우기 위해 수업을 듣고 책을 읽고 열심히 말하는 연습을 한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토론하고 공감하려 애를 쓴다. 그러나 나는 공감기능이 고장 난 사람이다.
내가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보았을 때, 내가 더 이상 사람의 눈을 마주하는 게 재미가 아닌 부담이 되었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의 가르침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그러한 나이이기 때문에 나는 타인에 대한 공감이 어색해졌다. 나는 그래서 나에 대해 생각하고 고뇌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생각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구나. 다른 사람처럼 되기 어려울 수 있구나. 그래서 나는 인간이 되기를 원했다. 인간의 정의가 내 마음에 가득했다. 말하지 않았는가? 인간의 권리는 이름을 짓는 능력이라고, 그리고 인간이라는 말이 담긴 그 의미는 당시 나의 삶의 목표였다. 그래서 나는 공감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일은 그런 일이다. 나는 어딘가에 나와 같은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인간을 갈구하면서, 인간이 되지 못한 그러한 나약한 이들을. 내가 오롯이 서있을 수 있는 첫 이유는 그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게 전부이다. 내가 내 이야기를 꼭 소설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나의 사명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거짓된 종교의 수도사이다. 애써 멋져 보이려고 쓴 말이 아니다. 나의 절대자는 삶의 습관(성적)이다. 나 역시 그러한 가르침을 내리면서 그러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니 거짓된 것이다. 얼마나 내 말들이 들릴까? 어떻게 내 말들이 들릴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