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모든 시작
나에겐 하나의 말 습관이 있다. 아마 내 행동을 나 스스로 조절하거나 통제하지 못할 때, 나온 말이다. 이전에 쓴 글에서 나를 정의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어서 쓰자면, 어렸을 때 나는 ‘귀찮음’으로 가득했다. 이 ‘귀찮음’은 나에게 또 다른 멋을 알려주었다. 중 고등 시절 남자들은 대게 자기 자신을 어떻게 서든 뽐내고 싶어 한다. 대부분은 육체적으로 그러한 멋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자신이 없었다. 중학교 1학년 때 키가 145CM로 당시 학교에 40명의 학생이 있다면, 5~6번째 정도로 작은 학생이고, 2학년 때엔 155CM로 1년 새에 10Cm는 컸지만, 그에 따른 행동이나 생각들은 여전히 정체된 시기이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당시의 내 모습도 글로 남기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우선은 이 글에 충실할 예정이다.
아마 나의 사춘기가 천천히 온 까닭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기질 자체가 유독 더 내성적이고 스스로 고민하는 것들이 많아서 그럴 것이다. 나는 주변 친구들, 동성 친구들을 쫓아가려고 무던히 애썼다. 그러다가 쉽게 포기했다. 그리고 나는 그 어떤 변명을 하기보다는 ‘귀찮아’라는 말은 남발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더 묻지 않았고, 나는 그들과 가까운 듯 먼 관계를 유지했다. 물론 그러한 관계는 중3이 되고 키는 164CM로 당시 동성 친구들과 비교하면 35번째 정도로 큰 키가 되었지만, 마음 자체는 미성숙해서 학교 폭력과 비슷한 걸 당했고, 나는 더 이상 동성 친구들과 적절한 관계 형성을 포기했다.
물론 그 뒤로 많은 일들이 있었고 나는 몇몇은 성숙해 왔지만, 여전히 미성숙한 일부가 남은 상태로 굳혀졌다. 그게 오늘의 내가 되었다. 이제는 ‘귀찮음’은 나의 일부가 되었고, 나는 내 일부를 떼어 내력도 무던히 노력하지만, 여전히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 습관은 내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같은 방향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오로지 내 관점에서만 사람들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다른 이유나 다른 관점을 지나치게 싫어하고 가끔은 혐오를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심경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나는 늘 나 이외의 모든 것을 배척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 일부 또한 나 자신이라 생각하지 않고 배척할 때도 있다. 그렇기에 무던히 나는 내 생각들을 감추는 것을 쉽게 했다. 그러나 삶은 계속 움직여야 한다. 나는 내 세계 속에서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두 가지 선택을 해야 한다. 내의 혐오를 들키거나, 감추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당시의 모습과 같은 태도로 일관하기 시작한다.
그게 바로 ‘그냥’이다. 나는 모든 말에 ‘그냥’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다. 이 말은 나에게 모든 것을 의미하며,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었다. 물론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여기서 나온다. 내가 굳이 불쾌한 내 과거를 설명하면서 까지 ‘그냥’이란 말을 쓰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나를 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남들도 나와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오웰에 4가지 이유에 따르면 자기만족과 기록하고자 하는 욕구 이 두 가지가 만나 어떻게 서든 미학적으로 풀어가기 위해서다. 앞으로도 나는 ‘그냥’ 이란 말을 달고 살 것이다. 그리고 또 맹렬하게 후회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나와한 몸이 돼버린 혐오를 멈추기에는 나는 성숙하지 못한다. 나는 내가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나의 이야기와 ‘그냥’이라는 말 이면에 담긴 나의 변론을 마구 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