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
사랑스러운 소녀가 있다. 빨간 모자가 잘 어울려서 이름 대신 빨간 모자로 불리었다. 아픈 할머니 댁으로 엄마 심부름을 나선 빨간 모자는 늑대를 만나게 되고, 천진무구하여 아무런 의심이나 두려움 없이 할머니 댁을 알려준다. 포식의 계략을 세운 늑대는 잡아먹을 시간차를 벌기 위해 빨간 모자가 숲의 아름다움에 한눈을 팔도록 하고 먼저 도착하여 할머니를 잡아 먹은 후, 뒤이어 당도한 빨간 모자까지 꿀꺽 삼킨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빨간 모자’ 이야기는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의 원전으로부터 기원한다. 결말이 다소 불편하게 느껴지면서, 다른 '빨간 모자' 이야기가 떠오른다면(해피엔딩), 원전을 패러디한 개작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그림책은 페로의 이야기를 수정이나 변형 없이 그대로 계승한다는 점에서 패러디가 아닌 것 같지만, 이야기의 시공간을 현대의 도시로 각색하였다는 점에서는 패러디로 볼 수 있다.
빨간 후드를 쓰고 백팩을 멘 여자 아이가 표지에 등장한다. 아이 뒤를 채우는 배경인 거리와 집 풍경으로 볼 때 도시 빈민가가 소녀의 거주지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이어서 펼쳐지는 이야기 속 그림들은 매우 사실적이면서 세밀하게 인물과 도시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원근과 명암, 사물의 질감 표현이 평면의 그림을 물리적으로 느끼도록 하고, 얼굴 가득 표정이 살아있는 인물들은 그림 밖으로 튀어나올 듯하다. 담벼락의 낙서, 도로에 버려져 뒹구는 오물들, 깨진 보도블럭 등, 빠지지 않고 그림 안에 표현되어 도시를 구성하고 있다. 이토록 사실적인 그림이라니. 마치 르포를 그림으로 보는 것 같다. 사진으로 말할 수 없는 노골적 현상을 물감을 입혀 완곡하게 재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감지된다. 그림을 그린 로베르토 인노첸티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페로의 원전에서 ‘빨간 모자’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아름다운 소녀’가 늑대의 속임수에 빠져 할머니를 위기에 빠트리고, 본인마저 늑대의 침대로 들어가 결국 잡아 먹히게 된다. 즉,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소녀들에게 친절하고 낯선 남자를 조심하라는 경고성 메시지가 담겨 있다. 실제 페로는 이야기 말미에 교훈이라는 글을 첨부해 놓았다. ‘예쁘고 친절한 소녀가 다른 사람들의 말을 생각 없이 따르다가는 큰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중략) 이 친절한 늑대야말로 늑대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늑대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온갖 달콤한 말로 현혹하는 남자(늑대의 탈을 쓴)를 믿었다가는 침대로 이끌려 정절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로 만들어 소녀들의 교육서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이 그림책은 페로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늑대에게 잡아 먹혔다가 극적으로 구출된다는 권선징악(귀엽고 사랑스러운 인물은 또한 착하며 반드시 악에 이긴다.)의 전형을 버리고, 시대가 변했어도 여전히 위해한 현상으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어떤 진실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한다. 페로가 살았던 프랑스 절대왕정 시대의 소녀들이 조심해야 했던 늑대가 현대문명의 현란함 속에서 여전히 사람의 탈을 쓰고 교묘하게 곳곳에 도사리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아동 성폭력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배경이 도시 빈민가인 것은 위험에 더욱 취약한 아이들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뒷골목 비행 청소년 무리의 일원이 되기도 하고, 또다른 돌봄의 공백 상태인 아이들을 위험에 빠트리기도 한다. 주인공 소피아가 엄마 심부름으로 할머니 댁에 가는 길에 마주친 일당이 그러한 무리이다. 위험의 막다른 골목에서 구원처럼 등장한 남자! 그 남자가 늑대의 탈을 썼다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영웅이자 생명의 은인인 그 남자에게 소피아는 할머니 댁을 알려주며 선뜻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라타게 된다. 검정 레인코트를 휘날리며 오토바이 페달을 밟는 남자의 모습은 앞선 선행에 더해 멋짐이 눈부시다. 날이 으슥해지고 점차 밤기운이 짙어지는 가운데 하늘에 뜬 초승달 빛으로 드러난 남자는 돌연...늑대의 얼굴이다.
불편하지만 알아야 하고, 알려야 하는 진실이 있다. 내가 미리 알고, 우리 아이들에게 알려줘야 할 유의점이 그 진실이다. 폭력의 잔혹성이 두려워 아이들이 알게 되는 것이 꺼려진다면 24시간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면 된다. 그러한 돌봄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아이들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익힐 기회를 차단한다. 현대사회에서 성폭력은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더욱 빈번해지고 있다. 불편하지만, 우리는 이 불편한 진실을 이제 우리 아이들과 공유해야 하는 것이다. 로베르토 인노첸티는 그 방법을 17C 페로의 이야기에서 빌려와 사실적인 그림과 구어체의 텍스트로 직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그림책의 결말은 페로의 그것을 따라갈 것인가. 소피아의 행적과 결말이 궁금하다면 그림책으로 확인하기 바란다(스포 금지!). 더불어 아이들(7세 이상)과 함께 그림책을 보며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가진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옛이야기 ‘빨간 모자’가 현대의 그림책으로 재해석되어 우리가 직면한 문제에 제시하는 조언에 귀 기울여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