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기억의 풍선」)
서랍 속의 추억이라고들 한다. 잊혔다고 생각한 옛일들이 무언갈 찾으려 뒤집어 놓은 서랍장 귀퉁이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훅하고 스치는 향내로 마음 깊은 곳 차곡차곡 닫아 둔 서랍을 열어젖히게도 한다. 거기엔 잠시 잊은 듯했지만 꺼내 놓는 순간, 팝업북처럼 펼쳐져 우리의 오감을 그 시간, 그 장소로 인도하는 마법의 단서들이 담겨 있다. 인간에게 기억이라는 능력이 허용되는 한 영원히 유효할 단서들이다.
추억이 서랍 속에 담겨 있어야 하는 걸 작가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듯싶다. 혼자만 꺼내 보고 향유하는 추억에서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던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기억하는 ‘이야기’들로 들추어내고자 한다. ‘풍선’이라는 물상이 그 매개체이다. 사람에게 저마다의 서사는 몇 개부터 수십, 수백, 아니 수천 개의 이야기들로 구성된다. 그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색색이 풍선으로 서사의 주인공이 소유하고 있는 기억들이고,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는 같은 색의 풍선을 나눠 가지게 된다.
그림책의 주인공인 ‘나’는 다섯 개의 풍선을 가지고 있고, 동생은 그보다 적은 두 개를 가지고 있다. 엄마와 아빠는 훨씬 많은 색색의 풍선을 손에 쥐고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그보다 더 많은 색깔의 풍선들과 다양한 이야기들을 지니고 있는 서사적 인물이다. 같은 색깔의 풍선들을 나눠 가진 것으로 미루어 가족들 간 다수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할아버지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풍선들 중, 노란색을 손으로 가리키며 아이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묻는다. 서랍을 열어야 하는 수고로움 없이 추억은 늘 그 사람 언저리를 떠돌며 궁금해하는 이에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손자는 그렇게 할아버지의 추억들을 풍선 색깔만큼이나 다채롭고 신비스러우며 여름밤의 별빛처럼 고요한 이야기로 전해 듣는다. 파란색 풍선 속에 담긴 강아지 잭에 대한 이야기로 한바탕 웃고, 보라색 풍선에 대해선 꿈을 꾸듯 미소를 지으며 결혼식 올리던 날을 떠올린다. 할아버지와 낚시를 갔던 날의 추억은 너무나도 소중하여 잊고 싶지 않다. 반짝반짝 빛나는 은색의 풍선으로 할아버지와 함께 언제까지고 나눠 갖고 싶다.
우리의 기억이 영원하다면... 아마 수천 개의 풍선들이 그 가벼움에도 불구하고 켜켜이 쌓인 공기의 질량으로 우리의 삶을 압도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때론 망각이 삶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전환시키고 새롭게 재배치할 수 있도록 구원한다.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의 선별 작업은 망각에 속해 있지 않다. 잊혀간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기억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그래서 끝자락에 의지해서라도 기억하고픈 옛일의 조각을 우리는 서랍 어딘가에 보관해 두고 있는 것이다. 그 시간, 그 장소로 데려다 줄 마법의 단서를 결코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할아버지는 언젠가부터 풍선을 하나둘씩 놓치게 된다. 꼭 붙들어 매 두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아이는 잃어버린 풍선들만큼 사라져버린 할아버지 이야기들이 안타깝고 속상하다. 끝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은색의 풍선마저 속절없이 놓아버렸을 때, 아이는 절규한다. “왜 그 풍선을 날아가게 놔뒀어요? 그건 할아버지와 저의 풍선이잖아요!” 아이는 이제 더 이상 행복했던 낚시 추억을 할아버지와 함께 나눌 수 없는 것이 서글프다. 그 밤, 그 강둑으로 데려다 줄 마법의 풍선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 그림책은 노인성 치매라는 현실적 고통을 그림책이라는 친근한 매체를 통해 완곡하게 전달하고 있다.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기억을 풍선이라는 이미지로 시각화하고 그것이 사라져가는 과정을 시시각각 보여 준다. 물론 현실은 그림에서 풍선 몇 개 사라지는 것 정도로 슬프도록 아름답지만은 않다. 고통이고 처절한 생존의 사투이다. 가족들에게는 사라지는 기억을 견뎌야 하는 아픔이고 망각의 다리를 건너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슬픔이다.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보다 그 기억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들의 고통이 더 크다. 나의 기억 안에 ‘너’는 여전히 살아 있는데, ‘너’의 기억 안엔 내가 이제 없음으로 해서.
아이의 손에는 이전 다섯 개보다 더 많은 수의 풍선이 쥐어져 있다. 할아버지가 들려주었던 노랑, 파랑, 보라색 풍선 속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넘어와 아이의 기억을 이루고 있다. 할아버지가 놓아버린 기억이 그것을 기억해 주는 손자의 기억 속으로 들어와 전수 되고 있는 것이다. 아이는 이제 할아버지 무릎 위에 앉아 풍선 속 이야기들을 처음부터 하나하나 시작한다. 마치 기억들을 다시 할아버지에게 전수 시켜 드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이 그림책의 발상은 그림을 보는 내내, 따뜻한 울컥거림으로 목을 아리게 한다. 그러면서 서랍 속 낡고 빛바랜 추억 한 장을 꺼내어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한다. 팝업북의 저쪽 면을 집어 함께 펼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기억이 스멀스멀 이름을 잃어버릴 때쯤, 이 마법의 단서를 가진 그 사람이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새로운 기억의 이름으로 나의 눈빛을 형형하게 할 것이다. 이 그림책을 읽는 독자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