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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솔 Bin Sole Oct 11. 2024

미멘토 모리

다섯 명의 재림

미멘토 모리

넓은 들판에 풀들은 파릇파릇 막 돋아 올라오고 바람이 간헐적으로 목덜미를 간지린다. 이렇게 좋은 날 사람이 없을 수 없지. 젊은 학생들로 보이는 십여명이 들판에 둘러 앉아서 놀이를 하고 있다. 

“야뽀이 토끼토끼 예” 

“야뽀이 따이따이 예” 

웃음이 들판을 가로질러 하늘로 올라간다. 때를 같이 해서 구름 덩어리가 바람에 실려 들판으로 내려 오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소리 쳤다. “뭔가 내려 오고 있어” 구름 덩어리는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무려 다섯 개. 그들 구름 덩어리는 사뿐 하게 하나씩 들판에 내렸다가 다시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하늘은 땅에 행운을 내려다 준다. 다섯개 구름 덩어리들도 행운을 싣고 왔을 것이다. 지금까지 수십만년 동안 이 땅에 살다간 약 1,080억 명 사람들은 하늘과 함께 가끔씩 지상에 행운을 실어다 주었으리라. 


나오는 사람

   벤야민 - 명언 제조기, 철학자들을 대변

   발자크 - 속물 인간

   이사도라 던컨 - 오필리아가 연상됨, 긴 스카프가 차바퀴에 걸려서 질식사한 기구한 인생

   소냐 - 밑 바닥 인생이나 따스한 인간미, 별로 말이 없으며, 젤소미나를 소환한다

   장길산 - 투박하면서, 실패한 혁명가, 운전을 담당

장소 대한민국 서울 변두리 버스 터미널에서 수미산까지 가는 택시 안

주제곡 ; 이사도라 (모리스 자르 작곡,폴모리 악단 연주)


(시작은 택시 합승 부터 이다, 장길산 택시)

벤야민이 등산 배낭을 메고 나타난다.

목적지는 수미산 도리천 공연장이다. 도솔천 건너에 있다.

이사도라 던컨은 공연 일정이 있다

벤야민은 영감을 얻으러 간다

발자크는 이쁜 귀족 여성이 있을까 알아 보러 간다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를 위해 기도하러 간다

장길산은 운전해서 간다

벤야민: 이 택시 수미산 가요?

장길산:녜, 

벤야민:얼마요? 

장길산:한 사람은 안돼요, 네 사람 합승만 받아요, 한 사람당 만원

벤야민:얼마나 기다려야 하오?

장길산:영겁의 시간 (잠시 뜸 들인 후) 금방 될거요 오늘이 날이니까.

벤야민:무슨 날?

장길산: 수미산 축제일이거든요. 그런데 대중교통이 없어요, 기차나 버스라든가,이런 것은 없어요.

잠시 후 백바지를 입은 발자크가 나타난다.

발자크: 아저씨, 수미산 가요?

장길산: 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출발합니다.

그때 휘파람 소리와 함께 향수 냄새를 풍기며 이사도라가 왔다.껌 씹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어서 소냐가 머뭇머뭇하면서 다가온다.

장길산은 네 명에게 “차 어서 타세요, 이제 출발합니다” 라고 외치며 운전석을 점거한다.

“이것도 인연인데 서로들 인사냐 하슈” 길산은 차의 시동을 건다

시동 소리가 경쾌하다

운전석 옆자리에 이사도라, 뒷 좌석에 벤야민 소냐 발자크 순으로 앉았다.

소냐가 중간 자리이다.

택시가 정차해 있던 작은 광장을 벗어 나 도로로 진입을 했다. 

그런데 도로가 꽉 막혔다. 꼼짝달싹 하기 조차 어렵다.

벤야민이 한 마디한다. 

내가 ‘일방통행로’에서 쓴 내용들이 여기서 잘 나타나주는군. 주유소도 있고 건설현장도 보이고 습득물 보관소도 있겠지. 여기저기 보이는 광고 전단지 팜플렛 이런 싸구려 표현들을 잘 활용해서 기막힌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인데 말이야. 여기야 말로 철학하기에 아주 딱 맞아, 아주 말이야. 

그 중 습득물 보관소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어 지는 군. 어떤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을까? 사람들의 온갖 애착물, 그러니까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자아의 대체품이고 주체의 동일시인 사물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겠지. 

어떤 물품 보관소의 한 달 통계에 따르면, 물품 보관소에 보관되는 물품 그러니까 유실물 중에서 신분증 등 각종 증명서가 9백60여건으로 가장 많고 가방 전화기 신용카드 등의 물건이 2백30여건, 현금 1백50여건, 유가증권 80건, 기타 2백29건 등이라고 한다. 심지어 현금 까지 두고 간다고 하는데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두고 다니는 사람들의 심리를 분석한 결과, 신경학적 원인으로서 도파민 또는 노르에피네프린의 신경전달물질에 이상이 있는 경우를 들 수 있고 다음으로 해부학적 원인: 대뇌의 전두엽이 손상되어 으로서 충동적인 행동 및 반응을 조절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손에 들고 있거나 몸에 걸치지 않는 경우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심리가 지극히 정상인 사람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또 당장 중요한 일이 닥치고 있어서 그 일에 신경을 집중하느라고 물건에는 소홀하는 경우가 있다. 

사람들은 자다가 자주 잃어 버리는 꿈을 꾼다.  예를 들어 지갑을 잃어버리는 꿈은‘경제적인 불안’이나 ‘정체성의 위기’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지갑은 우리에게 돈과 신분증, 다양한 카드 등 중요한 개인 정보를 담고 있는 소중한 물건이기 때문에 지갑을 잃어버리는 꿈은 현재의 재정 상태나 사회적 위치에 대한 불안감을 나타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최근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직장에서의 위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을 때 이러한 꿈을 꾸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한다. 또한 지갑은 인간의 정체성과도 깊은 연관이 있어서 지갑 속의 신분증이나 카드들은 우리의 사회적 위치와 개인적 가치를 상징다. 따라서 지갑을 잃어버리는 꿈을 꾼다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나 상실감을 느끼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거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고민이 심화되고 있을 때 이러한 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핸드폰을 잃어버리는 꿈은 ‘소통의 단절’이나 ‘정보의 상실’을 상징한다.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떨어져 있다고 느끼거나 대인관계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을 때 이러한 꿈을 경험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핸드폰은 개인의 프라이버시와도 관련이 깊기 때문에, 핸드폰을 잃어버리는 꿈은 개인적인 감정이나 비밀이 누출될까 하는 두려움을 나타낼 수도 있다고 한다.

발자크는 공책을 꺼내어 뭔가를 적기 시작한다. 

  “인생의 이야기는 얼굴 위에서 읽혀지며, 그것과 함께 흘려진 눈물도 읽혀진다. 고리오 영감의 눈물 주머니는 부풀어올라 있다. 예전에는 반짝이던 그의 눈이 이제는 생기 없는 음울한 회색을 띤다. 그리고 붉은 눈 언저리 때문에 마치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뇌의 흔적은 얼굴 위에 각인된다. 부정한 죄를 지은 한 어머니의 늙음은그 얼굴에 독특한 특징을 부여한다. 그 주름살의 성질과 주름이 잡힌 방식, 슬픔에 잠긴 창백한 시선, 이 모든 것들이 마음에 삼켜져 지면에는 결코 떨어질 것이 없는 눈물에 대해 많은 말을 해주고 있다. 각자의 신체가 그 열정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역사적 사건 또한 인간의 영혼을 만들어 낸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지금 퐁스와 그의 친구 슈뮈케의 모습을 묘사하는 중이다”

벤야민이 발자크에게 한 마디 건넨다.

“자크씨, 골짜기의 백합 보니까 어릴적에 식구들로부터 아주 내 논 자식 취급을 받았던데요, 내가 보기에 그 경험이 자양분이 되어 좋은 소설로 열매 맺은 듯 보이는군요.  본인 생각은 어떻습니까?”

발자크는 어깨를 으쓱 한 번 해보이고 나서 거만하게 대답한다. 그의 몸 전체에는 거만과 거드름 그리고 속물의 냄새가 잔뜩 풍겨 나온다. 

“어느정도는 사실입니다만, 나는 소질을 타고 났다니까요, 그리고 부단히 노력하기도 했고요, 나는 하루 스물 네 시간 중 거의 열시간 이상 글을 썼답니다. 타고 난 소질에다가 불굴의 노력이 있는데 불후의 명작이 안 나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어요?” ”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뒤 벤야민에게 되묻는다. 

“이렇게 교통이 꽉 막힐 때에는 일방통행로가 도움이 될까요?”

“아 나의 일방통행로 책을 보신 모양이군요”

벤야민은 반갑게 대화를 받아 넘긴다.

“내 책 일방통행로는 인식에 관한 책이지요. 교통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멀고 가까움이라는 문제에 천착한 면은 있네요. 어떤 마을을 볼때 형언할 수 없고 재현불가능해 보이는 것은 그 풍경속에 멂이 가까움과 아주 희한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이란 거리의 피조물이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초월성 안에서 모든존재를 향해 수립하는 실제적인 근원적 거리에 의해서만, 여러 사물에 대한 진정한 가까움이 인간 안에서 자라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멂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만이 가까이에 있을 인간들의 응답에 대한 각성을 불러 일으킨다”.멂과 가까움은 사이에서 생겨난다 하이데거가 말한 ‘거기에 서 있음'의 전형적 예는 희랍의 신전으로, 그것은 "(그) 산산이 갈라진 험난한 바위 계곡 한가운데에서 단지 거기에 서 있을 뿐이다”. 그것은 자신의 진리 안에서 거기에 서 있다. "신전이 거기에 서 있는 바로 그 안에서 진리가 생기한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그때 이사도라가 불쑥 끼여 든다.

“아침부터 너무 어려운 이야기는 머리 건강에 좋지 않아요, 더구나 예술 하는 머리에는 더욱 좋지 않아요”

길산도 한 마디 한다.

“맞아요, 민초들은 한 시간 일분 일초가 버티기 어려운데 무슨 딴 세상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벤 선생”

벤야민이 멋쩍게 머리를 긁는다.  

“아니 뭐, 자크씨가 물어 보길래” 

그때 소냐가 수줍게 묻는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길산이 답한다. “대략 세 시간 정도? 시간은 이 자동차가 정할 수 없어요. 어떤 보이지 않는 혼이 정한다고나 할까”

“그 혼이 누구입니까?” 발자크가 정색을 한다.

 갈신이 머뭇거리자 이사도라가 나선다. 

“혼이란 운명 같은 것이 아닐까요? 제가 두르고 있던 마후라가 자동차 바퀴에 감겨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은, 어찌할 수 없는 무엇, 다시 말해 나한테는 불가능하나 저 높은 이에게는 가능한 일, 불가능의 가능성 같은 것….”

벤야민이 받아친다.

“죽음 이란 불가능으로서의 죽음과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이 있어요. 블랑쇼는 죽음 이란 가능성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고 하이데거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이야기합니다.하이데거는 죽음에 임박해 있는 사람은 대게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인간 본래성을 찾게 된다는 것이고 블랑쇼는 자신의 죽음을  자신은 절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죽음은 미완성이라고 말한답니다. 또 어려운 말을 했나 보네, 다들 시큰둥한 표정인걸 보니”    

발자크가 빈정거리듯 말한다.

“벤선생은 나치로부터의 탈출에 실패해서 자살했으면서 죽음에 대해 할 말이 남았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군요” 

길산이 마무리 발언 하듯이 

“ 우리 모두 전생의 삶에 대해서 말할 때 조금 조심해야하겠습니다. 특히 남의 죽음에 대해서는요”

“그래요” 소냐가 말했다.

소냐는 말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소냐가 한 마디하면 다들 숙연해진다.  

시베리아에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질곡의 삶을 살아갈 소냐. 소냐에게 때로는 젤소미나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나타난다.  불쌍한 젤소미나, 불쌍한 소냐……

차량 소통이 좀 나아지고 있었다. 딱히 차가 막히는 원인을 도로에서는 찾기 어렵다. 왜 정체가 심해진 것인지 이해가 불가한 상황이다. 때 마침 하늘에 파란색이 가득찼다. 

“원더플” 이사도라가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날씨 말이에요” 

기분이 좋아진 벤야민이 우스운 이야기 하나를 하겠다고 나섰다. 

“어느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인데요…” 하면서 보따리를 풀어 나간다. 

어느 하시딤 마을의 초라한 주막 안에 안식일 저녁 무렵 유대인들이 앉아 있었다. 한 사람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은 그 고장 뜨내기로서 매우 남루한 차림을 하고 구석의 어두컴컴한 곳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그때 한 사람이 제안하기를 만일 각자 한 가지씩 소원이 허락된다면 무엇을 바라는지 이야기해보자고 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어떤 사람은 사위를, 어떤 사람은 목수 작업대를 갖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빙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했다. 모두가 자기 소원을 이야기하고 나자 어두운 구석에 있는 걸인 한 명만 남게 되었다. 그는 마지못해 머뭇거리며 사람들 질문에 대답했다. “난 내가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이 되었으면 싶소. 그리하여 넓은 땅덩어리를 통치하면서 밤이 되면 누워 내 궁전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국경을 넘어 적들이 침입해 와서, 날이 채 밝기도 전에 기마병들이 내 성 앞까지 쳐들어왔는데도 아무런 저항도 없고, 나는 잠에서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 옷을 입을 시간도 없이, 단지 내의 바람으로 도주 길에 올라야 했고, 산을 넘고 계곡을 따라 내려가고 숲과 언덕을 넘으면서 쉼 없이 밤낮으로 쫓기다가 결국 여기 당신네들 마을의 한 벤치 위까지 안전하게 도착했으면 하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외다.” 그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면 당신은 그런 소원에서 무엇을 바라는 것이오?”라고 한 사람이 물었다. “내의 한 벌이오.” 이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 

벤야민이 말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벤야민의 문예이론이라는 책이 실려 있는 내용이랍니다” 

“재밌는데요” 

이사도라가 말했다.

“거지 자신의 이야기 아닌가요? 자기가 왕이라고 자백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네요” 길산이 맞장구를 쳐 준다. 

그러면서 길산이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민속촌에 들렸다 가려 하는데 어때요?” 

“공연 시간에 늦지 않는다면야 저는 좋아요” 이사도라가 말했다.

“도라 아가씨가 찬성하면 모두가 찬성이라오” 발자크가 거들었다.

길상이 차를 민속촌 주차장에 진입시키고 일행은 차에서 내렸다

민속촌 안에서는 마침 한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민속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길산이 그 젊은이들 행렬에 합세하고 있었다.

한바탕 광대 놀음을 하고 나온 길산은 숨을 고르면서 말했다’

“내가 사실 구월산 광대 출신이라오”

그래서 춤을 신명나게 출 수 있었던 것이다. 

길산은 쓰고 있던 탈을 벗었다. 땀이 콧등에 송골송골 맺혀 있다. 그 모습이 퍽이나 아름답게 보인다.

장길산은 도망가는 여종의 몸에서 태어난 뒤 버려졌고 이후 구월산 광대들에 의해 키워졌다.

자연스럽게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민초들의 삶을 몸으로 익히면서 커 나갔다. 

그가 도적 일당이 된 것은 아주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도적이기는 하나 힘센 사람으로부터 재물을 빼앗아 힘 약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말하자면 의적이었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가난한 사람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오늘 세상을 모조리 갈아 없애는 혁명을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꿈이었다. 

재인촌에서는 모든 힘없는 사람들이 서로 돕는 공동체를 이룩하고 있었다. 그들은 능력 껏 일하고 성과는 서로 합의한 기준에 의거해서 나누어 가졌다. 따라서 이 실천을 통해서 길산은 그의 꿈이 결코 헛되지 않다고, 언젠가 실현 되리라고 보았다.    

하지만 권력자들도 호락호락 하지는 않았다. 조정에서 파견된 군인들에 의해 그의 꿈은 사정없이 짓밟히고 말았던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민초들의 궁핍한 삶이 기록되어 후세에까지 전해지지 못한 점이다. 

모두들 문맹인 데다가,당시 사람들은 불평을 말하다가는 불효니 불충이니 하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어서 아무도 나서서 말을 할 수 없었다. 사회가 모두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입틀막. 

어쨌든 혁명은 불가능했다. 

반역하면 삼족 또는 구족을 멸하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가족있는 사람은 도저히 나설 형편이 못되었다. 

자신은 몰라도 가족까지 죽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발자크는 길삼의 춤에 큰 관심을 보였다. 춤 사위 한 동작 한동작을 따라서 팔과 목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길삼이 쓴 탈의 모습이 언뜻 보아도 높은 자들에 대한 해학과 풍자가 물씬 풍겨 나타난다고 날카롭게 파악하고 있었다. 

벤야민은 자신의 친구인 브레히트가 쓴 희곡 ‘동의 하는 자 (Jasager)’ 를 떠 올렸다. 산을 넘어 병든 어머니의 약을 구하러 가는 소년에게 산 넘기는 불가능한 과제였다. 그러나 그 골짜기에는 도전에 실패한 자에게는 골짜기에 던져져야 한다는 관습이 내려오고 있었다.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관습이었다 지쳐서 주저앉은 소년은 지체없이 골짜기 아래로 내던져야 할 운명이었다. 소년은 이 관습에 순순히 동의할 것인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관습에 따라, 대타자의 의도대로 자신의 운명을 따라갈 것인지 아니면 합리적 이성을 따르는 동의를 추구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합리적 이성을 좇아가는 일에는 많은 난관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혁명도 마찬가지이다. 

길산이 벤야민의 말에 공감을 표하면서 벤야민이 쓴 역사철학 테제의 한 구절을 읊는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승리를 거듭해온 사람은, 땅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들을 짓밟고 넘어가는 오늘날의 지배자의 개선 행렬에 함께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발자크는 한 분의 스님을 만났다. 

그는 안수정등 이야기에 깊은 흥미를 표하고 있었다. 

인간의 삶을 그토록 정확하게 표현한 적이 서양에서는 없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인간이란 온갖 주변의 위험에 처해 있으면서도 한 순간의 꿀 한방울에 취해서 허망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은 가느다란 칡 넝쿨에 의지해서 매달려 있고, 줄 아래 심연에는 독사가, 위에서는 사자가 잡아 먹으려고  벼르는 가운데, 의지하고 있는 한가닥의 칡넝쿨 마저 생쥐가 갉아 먹고 있는 절대절명의 시간에, 어디선가 꿀이 몇 방울이 입속으로 떨어지고 있다. 꿀이 하도 맛있어서 주변의 온갖 위협 마저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길산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불쑥 한 마디를 던진다.

“자크씨 작품에 고리오 영감이 있지요?”

“그렇소만” 발자크가 대답하자 길산은 한국 전래 설화에 할미꽃 이야기가 있는데 고리오 영감의 세명 따님과 닮은데가 있으니 한 번 들어 보시려오?” 

길산이 할미꽃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고리오영감에게 딸 세 명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할머니에게도 딸 세 명이 있었다. 딸들이 결혼할 때 모든 재산을 다 골고루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할머니에게는 먹을 양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큰 딸에게 가서 살고자 했다. 큰 딸은 처음에는 반갑게 맞아 주었으나 차츰 싫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둘째 딸에게 갔다. 마찬가지로 싫어하자 막내 딸에게 가려고 길을 나섰으나 춥고 허기지고 힘들어 막내 딸이 살고 있는 마을의 고개를 넘지 못하고 그만 죽었다. 죽은 곳에서 봄이 되면 할미꽃이 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발자크가 큰 소리로 웃었다. 

“허 그거 내 작품의 고리오 영감과 같은 처지로군요” 

벤야민이 정리를 했다. 

“우리 인류는 최초 아프리카에서 출발하여 지구 곳곳을 돌아 다니는 동안 살아가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비슷하게 전해지고 있다 오, 말하자면 모든 인류 정신의 원형 같은 패턴이 우리들 마음 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신데렐라 이야기는 세계 많은 나라에서 전해 지는데 스토리는 대동소이하답니다” 


그러면서 벤야민이 발자크에게 묻는다.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에 의하면 발자크씨 습작 시절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어요. "스무살짜리는 자기가 무엇이고 앞으로 무엇이 되려는지 아직 분명한 생각이 없었다. 철학자인지, 시인인지, 소설가인지, 극작가인지, 아니면 학자인지. 어디를 향할지 모른 채 다만 힘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진정으로 무엇이 되기를 원하세요?” 

발자크가 즉각 맞받아쳤다.

“사실 그때에 나는 뭐 별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 하는 생각이 없었어요. 다만 글쓰기는 소질이 있다고 할까, 이야기를 만드는 데 재미가 있었거든요”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한 가닥 희망은 조그만 인간미, 

소소한 일상

밥하고 빨래하고 집안 일을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일상의 중요성 가치

아침에 옆집 사람과 나누는 인사 “밤새 안녕하셨어요?” 의 의미

밤새 사라지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남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심지어 본인도 모른다. 

옆집에 어느 평범한 남자가 부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모스크바가 아닌 지방 소도시에서 학교 사회과목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학생의 숙제물에 “학교 숙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존 더 가지라”고 적었다가 학교로부터 해고당하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오게 되었는데, 그 선생님이 어느 날 밤에 사라지고 없었다. 부인도 함께 였다.

그 선생님이 평소 드물게 인상을 찡그리는 버릇이 있었다. 눈이 나빠서 햇살이 강하게 비치면 눈을 찡그렸던 것이다. 그런 모습이 권력자에게는 불만분자로 보였던 것이리라. 

유형지에는 한 시도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되었다. 누군가가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발 권력자들은 서민의 일상에 손을 대지 않았으면 좋겠다. 

간섭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를 감시하는 대타자는 시베리아 뿐 만 아니라 우리 주변 도처에 널려 있다. 

심지어 자신의 주체 안에서 스스로 대타자가 하는 일을 하기도 한다. 

“이 행동은 너를 파멸시킬 수도 있어, 그러니 하지 마”   

시베리아에서 사람들은 ‘결백하면 할수록 그들은 총살당할 만하다'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유배자들의 평균 수명은 2년 정도였다. 중노동과 영양 실조로 오래 살 수가 없다.

오래 살지 못하는 데는 심리적 요인도 컸다. “어차피 살아 봐야.” 하면서 .일찌기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누군가 자기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달랐다.  

소냐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없던 용기마져 생기게 되었다.

소냐는 밤낮으로 그를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먼 발치에서 그를 보려고 발까치를 했다.

그녀는 매일 숙소 근처에 돌을 쌓았다. 돌을 밟고 올라가서 그를 보고자 함이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머무르는 유형지 숙소는 나무 판자로 엉성하게 지어진 건물, 건물이라기 보다는 판자 우리, 돼지 들이나 키울 때 쓰는 곳, 이어서 겨울을 나기에 너무나 부적당했다. 그리고 날이 저물면 밖으로 나가는 문은 모두 잠겨 버린다. 긴긴 겨울 날 12시간 이상을 불도 없는 캄캄하고 추운 침상에서 지내야 한다. 

배설 처리는 물론 안에서 해야 했다. 화장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식사는 하루 빵 200그램과 감자가 들어간 수프 한 그릇이 전부다.

유일하게 견디는 힘은 오로지 소냐로 부터 나왔다. 

소냐는 가끔 자신을 만들어 준 도스토예프스키를 생각한다.

왜 이런 운명을 만들어 주었느냐고 따지고 싶다.       


솔제니친이 쓴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 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돌아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 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수용소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남보다 죽 한 그릇 더 먹고 남보다 조금 이라도 덜 일하는 것이다. 존재는 늘 언제나 구멍이 뚫려 있고 늘 언제나 결핍 상태에 있다. 주체에는 늘 언제나 빗금이 쳐져 있고, 원하는 것은 늘 언제나 충족 불가능하다. 오르려고 노력하고 발버둥쳐 보아도 늘 언제나 앞에는 높고 높은 벽이 드리워져 있다. 깊고 넓은 강이 펼쳐져 있다.     

늘 언제나 악몽의 꿈 속에서 살아간다. 

진정한 예술의 의미는 사람살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도스토예프스키나 솔제니친이 그리는 사람살이가 예술이라고? 이렇게 사람같이 않는 살이가 예술이라고? 예술을 시베리아 유배지나 수용소에서 찾는다고 하면 나는 이 소설에 등장하지 않으리라. 절대로 등장하지 않겠다. 나 뿐 아니라 등장인물들 모두는 파업에 동참할 것이다. 

식사 할 시간이다.

길산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르)크스 형을 불러서 변증법적 유물론 회식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식사란? 수렵채집 시대와 농경 시대 그리고 오늘날 화석 연료 시대에서 식사의 차이, 의미의 차이

함께 소통하는 시간, 음식이 앞에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긴장이 누그러지면서 남에게도 관대해지는 법이다. 

(수렵채집시대 때부터 쌓인 습관 아닐까,사냥한 결과가 남에게 뺏기지 않고 무사히 내 앞에 안착해 있다는 안도감) 

모든 사람이 각자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자리를 일어서는 곳에서는 경쟁의식이 싸움과 함께 일어나기 마련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음식이야말로 사고를 위한 음식'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했다. 음식을 만드는 세 가지 주된 요리법  즉 날것, 굽기, 끓이기 과정은  기호학적 삼항 체계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세 가지를 자연(날것)과 문화(굽기)의 대립 그리고 그 둘의 매개(끓이기)를 상징하는 데 사용한다. 여기에 볶기를 덧 붙일 수 있겠다. 볶기는 문화를 상징한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일행들은 모두 길산이에게 음식 주문을 일임한다. 길산은 우선 삼겹살 3인분을 시키고 각자 본인 의사를 물어서 이사도라는 비빔밥,소냐에게는 순두부 찌개, 발자크에게는 꼬리 곰탕을, 마지막으로 벤야민에게는 불고기 백반을 시켜 주면서 자신은 된장찌재를 주문했다.  

식당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른을 따라온 아이들을 위해서 작은 놀이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식당 문밖에는 믈레방아가 시원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식당은 제법 큰 기업이다.

길산이 말했다 “식사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라고 공자가 말했답니다” 

“가장 중요하다?” 벤야민이 이의를 제기한다. “도대체 가장 중요”라는 말에서 가장 이라는 말이 왜 중요하게 쓰여질 까요?”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가장 중요’라고 하면 시험에 반드시 출제된다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인간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비단 먹는 일 뿐일까요” 

“그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라고 하면 될 일을…”

맞는 말 같기도 하다.일행들은 말이 없다. 배가 고프기도 하고, 또 어떤 테이블에서 벌어진 작은 소동에 정신이 팔린 탓이기도 했다. 그 테이블에는 남자 한 명 여자 두 명이 식사를 기다리는 듯 했는데, 종업원에게 식사가 언제 나오느냐고 물으면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종업원은 금방 나올 거라고 정중히 말을 했지만 손님들은 몇 분을 더 기다려야 하느냐고 항의하고 있었다. 종업원은 주방에 독촉하겠다고 하면서 자리를 뜨려고 하자 손님은 어디 손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피하느냐고 삿대질을 해대고 있었다.

길산이 설명을 한다. “이 나라 사람들은 급하답니다. 빨리 빨리 문화”

일행들은 말이 없다. 

그러자 바로 식사가 나왔다.

길산이 삼겹살을 구워서 상추 쌈이 싸서 먹는 시범을 보였다. 

일행은 따라 했다.

“맛있어” “고소해”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 

다만 이사도라는 몸 관리 때문에 깨작깨작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주로 야채만 먹었다.

소냐는 표정이 어둡다. 식사 제대로 못하고 있을 라스콜리니코프 생각 때문인가 보다. 


벤야민은 또 자기 책에서 썼던 내용을 끄집어 낸다.

일행들은 이제 익숙해져서 평이 아예 없다. 마음대로 해라 였다.

벤야민은 식사는 여럿이 같이 먹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일방통행로’ - 오늘 여러번 등장하는 책 이름이다. 필자가 읽은 벤야민 책이 몇 권 되지 않아서 밑천이 딸리다 보니 동일 책이 여러번 등장하는 것이다. 

여하튼 그 내용은 셀프서비스 식당 "아우게이아스"에 대한 언급이다. 

“혼자서 식사를 한다는 것. 이것은 독신으로 사는 것에 대해 제기되는 가장 강력한 이익이다. 혼자서 하는 식사는 삶을 힘겹고 거칠게 만들어 버린다. 혼자서 식사하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은 영락 (零落) 하지 않기 위해 엄격하게 살아야 한다. 은둔자들은 이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소한 식사를 했다. 음식은 더불어 먹어야 제격이다. 식사하는 것이 제대로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나누어 먹어야 한다. 누구와 나누어 먹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예전에는 식탁에 함께 앉은 거지가 식사시간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나누어 주는 것이었지 식사를 하면서 나누는 담소가 아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음식을 나누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사교 또한 문제가 된다. 음식을 대접힘으로써 사람들은 서로 평등해지고 그리고 연결된다. 생 제르맹 백작은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식탁 앞에서 음식을 탐하지 않은 채 있을 수 있었고 이렇게 함으로써 이미 대화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각자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자리를 일어서는 곳에서는 경쟁의식이 싸움과 함께 일어나기 마련이다”.

“맞는 말이죠” 발자크의 짧은 평론이다. 

“어쩔 수 없이 혼자서 먹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죠” 소냐의 평론이다. 

“산채에서는 혼자 밥 먹을 일이 없어요, 나물 밥이라도 여럿이 같이 먹는 답니다” 길산의 평론이다. 

“그래서 산채 비빔밥이 탄생했는가 보죠” 이 말에 아무도 웃지 않는다. 사실 일행 중에서 이 말을 한 사람은 없다. 필자의 평론이라고 해두자.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아무도 이 말의 의미를를 알 수가 없을거니까요.  


불연속선이 드리웠다

곧 비가 오겠네

아니나 다를까 소나기가 내린다.

동네 마을회관에서 쉬어 가기로 한다. 

동네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내 나이가 어때서…”

길산이 노래 내용을 설명해 준다.

이사도라가 물었다.

“나는 강남 스타일 노래 조금 알아”

하면서 말춤 흉내를 낸다.

모두들 웃었다 동네 사람들도 웃었다.

막걸리 잔을 건넨다. 

사양하기도 뭣해서 한 잔씩 얻어 마셨다.

소냐는 끝내 마시지 않았다.

발자크는 자기 입맛에 막걸리와 파전이 아주 그만이라고 한 잔 더 달라고 빈 잔을 내밀었다. 

그러는 사이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동네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와 땅바닥에 무언가를 그렸다.

오징어 모양이다.

오징어 놀이를 하려는 것이다

길산은 오징어 놀이의 방법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한다.

먼저 공격팀과 수비팀으로 나눈다

공격팀은 공격이라고 쓰여 있는 원안을 본부로 사용하고 여기에서는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다

수비팀은 수비진안에서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다.

그외의 장소에서는 모두 깨금발(깽깽이 발,한쪽 발)로 다녀야 한다. 

다만 공격팀이 강 (다리라고도 함) 을 건너기만 하면 두 발로 다닐 수 있어 경기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 따라서 수비팀은 공격팀의 누구 한명이라도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아야 한다.  

오징어 모양의 안으로 들어 가려면 수비진쪽에 있는 출입구를 통해서 들어가야 한다.

공격팀이 출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서 만세통에 도착하여 만세를 외치면 경기는 끝나게 된다.

또 상대 선수가 깨금발 지역에서 모듬발(두 발 걷기)을 하거나 넘어지거나 하면 그 선수는 아웃이다.


공격자들이 움직이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한 방법은 공격자들이 놀이판 밖으로 나가 방과  방 사이의 다리를 지나 아래 구멍으로 들어와 방을 통과한 다음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이고, 다른 한 방법은 우회하여 아래 구멍으로 바로 들어가 안으로 진입하는 방법이다. 움직일 때 두 발이냐 깨금질이냐가 주요한 차이인데, 첫 번째의 경우는 밖에서 깨금질만 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어서 체력이 좋아야 한다. 두 번째 방법은 다리만 건너면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다리를 건너야 하는 단점이 있다. '암행어사'란 이 다리를 무사히 건넌 공격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암행어사란 '법'의 상징이며, 암행어사가 된다는 것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이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리를 무사히 건너 암행어사가 되면 깨금질을 하다 양발을 다 딛고 걸을 수 있으니 그 힘은 막강해진다. 그런데 체력에 자신이 있으면 다리를 건너지 않고 첫 번째 방법을 따라 이동해야 하는데 이땐 반드시 한쪽 다리로만 걸어야 한다. 불교적 용어를 빌리면 두 번째 방법은 '교 敎’이고, 첫 번째 방법은 '선 禪'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들 놀이에 참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런데 다 참가시킬 수 없으니 한 두명은 깍두기가 뒤어야 한다. 

깍두기란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이나 그런 신세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데, 깍두기란 존재가 동양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깍두기 같은 존재가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로도, 바디우의 초과분으로도, 음악의 피타고라스 콤마로도 둔갑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바닥에 그려진 오징어 놀이 그림을 보고 있던 벤야민이 말했다.

“이거, 내 후배 라캉이라는 후배가 있는데 그가 그린 욕망의 그래프를 닮았어”

이런 놀이에는 라캉적 욕망이 모습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듯하다.

오징어 놀이



                                                               욕망의 그래프 


두 그림은 언뜻 보아도 서로 닮았다.

공격자와 수비자가 움직이는 동선은, 서로 마주 보는 겉과 속의 방향이 서로 반대로 '비틈'이다. '비틈의 비틈'으로서 안-밖-밖-안이 연결돼 있다. 이러한 위상학적 구조는 라캉이 만든든 욕망의 그래프에 바로 연결될 수 있다. 삼각형의 변과 사각형의 대각선이 서로 교환될 때 클라인병과 사영평면은 서로 치환이 된다. 사람들은 바로 이런 교환과 치환 공간에서 놀이를 하고 있다. 

상상계,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는 놀이 그래프를 통해 쉽게 설명될 수 있다. 그래프의 '원'은 상상이다. 이를 라캉은 거울 단계라 한다. 18개월 이전(피아제의 전조작기)의 아이들이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기를 분간하지 못하는 단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어서 아이들이 철이 드는 단계를  상징계라고 불린린다. 분별력이 생겨 사물에 이름을 붙일 줄 아는 단계이다. 놀이에서서 원(상상계)에서 출발한 공격자들이 방을 향해 공격을 가하는 것으로 나타낸다. 방 사이에 있는 다리를 건너 사각형 방으로들어가는데, 이때부터는 깨금질로 걷다가 양발로 걸을 수 있다. 정확하게 인간 내면의 변화, 다시 말해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이동하는 것으로서 법적 존재로서의 암행어사가 되는 것이다.아이들이 오징어놀이를 하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상상계,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를 여행하는, 즉 자아실현을 위한 전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욕망의 그래프에서는 그래프의 상단을 향해 올라가려 하는데 오징어놀이놀이판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으로 그렸다. 그러나 이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공격을 밑에서부터 하기 위해 그래프를 돌려놓으면 되기 때문이다. 놀이판에서 다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바로 그래프의 S(A) → A② ③이다. 우리는 '도가도 명가명'을 설명하기 위해 여기서부터 시작했지만, 발달과정으로 볼 때 혹은 놀이 과정으로 볼 때 S(A)와 A는 분명히 삼각형과 사각형 사이의 강에 놓인 다리이다. 실제로 이 부분을 강이라고 하며, 강을 건너는 것을 두고는 '다리를 건넨다'라고 한다.

이 다리의 첫 번째 교차점인 A는 '언어적 질서가 부여되는 장소', 즉 라캉이 말한 '코드code'에 해당하고, 이를 대타자의 장소라고도 한다. 아이들은 다리를 건너려고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이는 아이들이 대상과 반복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언어를 습득한다. 

놀이판의 삼각형은 그래프의 하단부이고 거기서는 비틈이 없는 원환이었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면서 비틈이 시작돼  차츰 '비틈의 비틈'이 된다. 벌써 다리에 해당하는 곳에서 비틈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놀이판 전체는 비틈× 비틈인 것이다.  욕망의 그래프 아래에서 올라온 욕망은 그래프상에서 d로 표기되었다. 이 욕망은 주체에게 새로운 활로를 열어 준다. 다리에서는 삼각형이 사각형으로 바뀐다. 사각형 안의 공간은 '비틈의 비틈'이라는 공간으로서 사각형의 가로와 세로는 마주 보는 변들끼리 '비틈'이다.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할 때 그것이 바로 사각형 안의 '비틈의 비틈'인 구조이다. 욕망이란 주체의 '비틈의 비틈'이란 말이다. 욕망d를 통해 놀이판의 사각형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나타나는 것은 환상의 공식($◇a)이다. '만'과 '세'할 때 나타난 것은 환상이다.

 놀이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강 건너기이다. 강을 건너면 깨금질도 끝나고, 그 무엇보다 암행어사 자격을 얻는다. 이 과정을 그래프에서는 '상상적 동일화' 과정인 $-i(a)-m-I(A)와 '상징적 동일화' 과정인 A-i(a)-m-s(A)라는 두 개의 동선으로 나타낸다. 또 이 강에 해당하는 부분이 있는 곳이 욕망의 그래프에서 A-s(A)이다. A와 s(A)가 서로 일치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이다. 그 어려움은 암행어사가 되기 위해 과거에 합격해야 하는 이상으로 어렵다. 아니,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 그래서 놀이판의 강 건너기를 암행어사가 되는 관문에 비유한 것에 불과하다. 강을 건너면서 주체는 분열되고 말았다($). 주체의 분열은 언어의 분열이며 사물에 이름 짓기 하는 데서 생긴(가명)분열이다. 

그려져 있는 선들은 주체가 이동하는 의미의 연쇄를 표시한다.

그래프가 주체의 의도에서 출발하여 거울을 통해 타자를 만나, 자아를 발견한 후 어머니 아버지 혹은 법이나 도덕 같은 대타자(A)에 의해 욕망(d)이 언어로 요구화되나 그것은 언제나 실패된다면, 놀이에서는 공격팀이 수비진을 만나서 이기고 싶은 욕망을 표현하면서 수비팀과 맞붙게 되나 그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는 것이다.   

주체는 본질적으로 소외되고 분열된 존재들이다. 

주체 ($)는 언어의 세계에 들어갈 때 인간에게는 구조적으로 하나의 시니피앙이 결여되는데, 주체란 이러한 결여이다. 주체는 자기 존재를 나타내는 시니피앙을 갖고 있지 않으며, 자기가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주체는 상실된 존재 즉 빗금친 S ($) 로 태어난다.

주체가 대상 (a) 의 지점에서 욕망(d)의 수수께끼를 만난다. 수수께끼를 만남으로써 요구는 이분화되고 주체는 언표 행위의 선상에서 충동 ($◇D )으로 이행한다. 이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대타자의 결여의 시니피앙 (S/A) 로 주어지지만 그것은 환상 ($◇a)에 의해 덮여버린다. 욕구는 신체의 욕구이고 요구는 언어로 나타난다. 

욕망은 욕구에서 요구가 찢겨져 나간 여백에서 시작된다. 이 여백은 요구의 여백으로 - 이 요구에 대한 요청은 다른 사람에 대해 무조건적이다 - 그것에 대해서는 보편적 만족이란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불안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욕구를 통해 얻은 것에 대해서는 결여의 모습을 취하며 열리는 여백이다.

시니피앙의 효과로 스스로의 존재를 갖지 않는 주체는 거세를 만남으로써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잃고 자기가 소실될 위험에 처한다. 그때 대상은 주체에게 존재의 불확실성을 알려주게 된다. 그래프에서는 이것이 환상의 공식 ($◇a)으로 표기되고, 거세된 주체($)와 대상 a가 연결되어 환상이 만들어지는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대상은 여전히 상상적 대상이며 상상적 타자의 머리글자를 따서 a라고 표시한다. 주체의 분리 또는 분열이란 환상에 의해 자아를 가진 주체와 시니피앙에 종속되어 자기 존재를 지닐 수 없는 주체가 분열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리즘으로 도입한 환상의 공식($◇a)이라는 약호가 상징하는 것이다.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에 대해 주체를 표상한다"

 발자국을 지우려고 한 흔적이 있으면 그것은 시니피앙이 된다. 지워진 발자국은 기호였던 발자국에 대해 그것을 지운 주체를 표상한다. 따라서 지운 행위가 주체를 표상한다. 대타자의 결여(S(/A))가 바로 지워진 발자국에 해당된다.

대타자 자리에 있는 빈 공간을 라캉은 대상 a라고 부르는데, 이것도 현실계와의 접점을 나타낸다. 주체는 이 대상 a에서 진정한 자기 존재를 발견한다. 놀이에서의 강은 대상 a이다가 향유(주이상스)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겠다. 놀이에서도, 그래프에서도 중요한 요소이다. 


놀이 중에서 길산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다섯 명이 모여서 웃고 떠들고 있는데 이런 광경이 언제고 계속될 리는 없지 않는가. 언젠가 우리는 모두 헤어지게 될 터이다. 그리고 나서는 잊어 버리든가 아니면 지금 이 장면을 다시 그리워 하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지금 이 순간이 더 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 자신이 만나고 있는 이 모든 순간을 소중히 하지 않을 수 없다. 

길산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자 이제 다시 출발을 해야 합니다. 늦을 지도 몰라요”

츠바이크가 발자크에 대해 쓴 발자크 평전에는 이런 글귀가 발견된다. 

“발자크의 소설에서 누가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가? 결국 작가는 독자와 같은 인간이 된다. 누보로망은 그런 인간의 체험, 제한되고 불확실한 경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 있는 사람, 그리고 지금 존재하는 사람이 소설 속 화자인 것이다”.

소설을 쓴 사람은 발자크가 아니라 독자일 수 있다. 

지금 이들이 가고 있는 이 여정은 이들이 주인공이 아니라 이 글을 보고 계시는 독자이리라. 

독자들의 생각에 따라 이 글이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길이 막혔다. 

누군가의 집이 길 가장자리에 걸쳐 있다. 

그리고 이렇게 적힌 팻말이 꽂혀 있다. “우회하여 가시오”  

사적인 공간이라는 표시이다. 

사람들은 한 마디씩 던진다. “아니 어떻게 길 한가운데에 집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지을 수 있다. 그 사람이 누구냐에 달려 있을 뿐.

행정관청은 할 말이 많다. 이 집의 위치가 절묘하기 때문이다. 

3 개 행정기관이 만나는 아주 교집합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기관들끼리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핑계를 대기에 아주 적합한 모델이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불편이 있는데도 규정이 없다는 이유, 자기 관할이 아니라는 이유, 상사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 갖가지 이유로 빠져 나간다.  

이모저모 보고 느끼는 가운데 목적지에 다 왔다.

자동차는 임무를 다했다는 듯 털썩 주저 앉듯이 멈춘다.

차에서 내리자 누구랄것도 없이 모두 입에서 탄성이 터진다. 

꽃밭이 펼쳐져 있어서 그렇다.

가만히 보자.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오는 계절에 필 수 있는 꽃은 여기 다 모여 있다.

양귀비, 패랭이, 제비꽃, 장미, 엉겅퀴, 라벤더, 조팝나무꽃, 아카시아꽃 ….

소냐는 조용히 꽃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꺾어 모은다.

이사도라가 소냐를 보고 속삭이듯이 부탁을 한다.

“공연에 쓰고 싶은데 몇 송이는 나중에 나 좀 주면 안될까”

소냐는 웃음으로 승낙을 한다.

꽃은 언제나 자기 이름을 불러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누구에게나 다가가서 그에게 의미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꽃은 오래 기다릴 수는 없다.

십 여일 지나면 작별해야 할 것이다. 

카이로스 처럼 지나 가고 말 것이다.

오래도록 붙 잡아 두고 싶은 마음에서 소냐를 정성스럽게 꽃을 모으는 것이다. 


꽃 밭 저 편에 무대가 마련되어 있다 이사도라는 무대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나비처럼 때로는 바람개비 처럼 탄성을 일으킨다. 

어디선가 나직하게 노래 소리가 들린다. 

소냐다., 

슬픈 가락이 가슴을 파고 든다. 

영화 길에서 젤소미나가 자주 불던 트렘펫 소리가 들린다.

눈물 고이게 하는 노래 소리

무대에서는 절정을 향해 가고 있다

그때 길상이 객석에서 덩실덩실 춤을 춘다

탈춤인듯 각시 춤인듯 사자가 되었다가 토끼가 되기도 하다

벤야민은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이 기대된다.

발자크는 드디어 물주를 찾은 모양이다.

부인 곁에서 부인과 그 딸인 듯 한 소녀와 뭐라고 수다를 떨고 있다.

이사도라 무대는 끝에 다다랐다.

그녀는 소냐로부터 꽃을 받아 들고는 노래를 부르면서 주저앉아 흐느꼈다. 그리고는 갑자기 생각난 듯, 개울가에 비스듬히 누운 버드나무 가지로 걸어갔다. 이사도라는 팔을 뻗었다. 꽃다발을 가지 끝에 걸어 두려는 듯이 팔을 뻗었지만 그 때 가지가 꺾이고 말았다. 그녀는 시냇물에 빠졌다.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그저 부르던 노래나 부르며 가만히 떠 있었다. 물 밑 진흙으로 끌려가도 상관없다는 양 얌전히 흘러갔다. 그녀는 차츰 물에 삼켜졌다. 그녀는 오필리아였다. 

이사도라 몸짓에서는 오필리아의 슬픔이 배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 햄릿으로부터 자신의  친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모습을 지켜 보아야 했던 오필라아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손에 꽃을 꺾어 들고 강물 위에 누워 죽어가는 오필라이의 비극적 아름다움은 수많은 예술가의 작품으로 재탄생하였다. 하얀 아름다움, 순수 그 자체, 이 보다 더 슬픈 아름다움이 어디 있겠는가. 쐐기풀, 팬지 데이지. 제비꽃, 양귀비… 작고 앙증맞은 꽃들의 집합이다. 

소냐가 모은 꽃들은 모두 의미가 있다. 

소냐가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서 받아 들인 바로 그 의미인 것이다. 

목에 걸린 제비꽃은 '충절'과 '젊은 날의 죽음'을 뜻한다. 오른손에 든  양귀비는 '깊은 잠'이고 아도니스 꽃은 '슬픔'의 뜻을 갖는다. 흰색 데이지는 순결과 결백을 나타내고 노란색과 보라색이 섞인 팬지는 '공허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버드나무 가지는 버림 받은 사랑이고 쐐기풀은 '고통을 상징한다

순수하고 고통스럽고 허무하고 순결을 끝까지 지키는 죽음은 아름답다. 

이 세상 온갖 허무가 강에 떠 내려 오고 있다. 

세상 모든 절망이 벽에 매달려 있다.

세상 모든 불안에 안개에 휩싸여 우리 주변을 떠 돌고 있다.  

그리고,

이사도라의 춤추는 몸짓이 끝났다. 그런데 이사도라의 발끝은 아직도 무대 위에서 사뿐사뿐 움직이고 있다. 마치 체셔의 고양이의 미소 처럼."좋아!" 고양이가 말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사라졌는데, 꼬리 끄트머리부터 나머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서도 미소는 얼마간 남아 있었다. 이사도라 춤은 끝났어도 그의 발은 무대에 남아 리듬을 찾고 있었다. 그의 숨소리도 가냘프게 들려왔다. 

이제 모든 일정이 끝을 맺었다. 

가야 할 일만 남았다. 우리에게 ‘가야 할 일’ 바로 그 일이야 말로 중요하고 필수불가결했다.

끝을 장식할 요소로서는 가야 할 일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어디로 가야하는가? 

모두들 알고 있다. 그러나 말 하지 않는다.

말을 하면 울어 버릴 것 같아서이다. 

사람들은 어제 처럼 오늘도 존재하고 또 내일도 존재할 것이다. 사물도 마찬가지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늘에는 해가 뜰 것이고 아침이면 새들이 지저귈 것이다. 모든 것은 제 자리에 있을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권태인가? 

그들은 태연하지만 조금은 우울하다. 그들은 '내일'을 생각하지만 그건 또 하나의 오늘에 지나지 않는다. 도시에는 아침마다 똑같이 돌아오는 단 하루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 다섯명의 우리들은 어떤가? 다시는 서로 마주쳐서 웃고 떠들 순간이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과는 다시 마주 볼 일이 없을 것이다. 

말없이 걷는다. 

몸은 없고 의식만 걷고 있다. 그 의식은 길가 어디에서도, 나뭇가지에도, 날아다니는 새 날개에도, 세우다 중단된  가건물에서도 보여지는 의식이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말이 없다. 흡사 그림자들이 다니는 듯 하다. 

우울한 권태가 이 길을 수놓아, 걷기에 아주 묵직하다.

발걸음을 멈추어야 할 순간이 왔다.     

언덕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언덕 아래에는 안개가 풍경에 커텐을 쳐 두고 있었다

일행들이 내려가 보니 앞에는 강이 펼쳐져 있다 레테의 강이다

뱃사공은 없고 조각배 한척이 떠 있다

승객은 4명이 정원이다. 

그래서 길산은 다음에 가기로 한다

사로 건네는 인사도 없다. 말없음이 안개처럼 주변을 감싼다.

소냐의 눈에는 물기가 비친다. 

4명이 배에 오르자 어디선가 한 자락 바람과 함께 뱃사공이 나타났다.

카론이었다.

검정 색 물속으로 배는 천천히 나아간다. 

망각의 강에서 사공인 카론은 콧노래를 부른다. 

잊어라, 모두 잊어라, 잊고 또 잊어라. 

잊은 뒤에 혹시 남아 있을 찌꺼기 마저 잊어라.

깡그리 잊어라.  

배는 점점 작아져서 하나의 점으로 압축된다. 점은 장소가 아니다. 점은 확대하면 커다란 원이고 축소하면 사라져 가는 흔적이리라. 하나의 점에 불과하던 배는 잠시 후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망각처럼  물 가운데로 사라져 버렸다. 

길산은 강가에 서서 잠시 동안 상념에 잠긴다. 

이사도라 음악이 은은히 울려 퍼진다. 

잠시 후 길산은 천천히 자리를 옮긴다. 

커다란 연꽃 한 송이가 물 위에 활짝 펴 있다.

길산은 거침없이 그러나 천천히 꽃을 향해 걸어간다. 

이어서 꽃 속으로 사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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