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과 정신분석의 재탄생
구조와 아버지의 이름
젊은 여기자인 마들렌느 샵살은 남편인 장자크 세르방-슈라이버가 새로 창간한 『렉스프레스L'Express』지의 기고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라캉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적갈색의 텁수룩한 가발을 쓰고 있었다. '지베'퐁탈리스가 그녀에게 라캉을 소개했고, 라캉은 그녀에게 춤을 청했다. 『현대』지가 주최한 '인텔리들'이 모이는 파티 중의 하나에서였는데, 이런 파티에서는 통상 가장 무도회가 열렸다.
이제 오십을 넘긴 라캉은 그에 걸맞게 바로크풍의 교육자 차림으로 참석했다. 본인이 바라는 모습 그대로였다. 매주 그는 세미나가 열리는 생트-안느 병원의 계단 강의실에서 종종 한숨과 고함을 섞어가며 갑자기흥분했다가는 다시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곤 했다. 그는 항상 메모와 스케치로 가득 찬 몇 장의 종이를 들고 왔다. 이 종이들은 때때로 끊기곤 했던 그의 말로 인해 생기는 서스펜스를 길게 유지해주는 기능을 했다. 때로 그는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처럼 중얼거리곤 했다. 무거운 침묵으로 시간을 중단하려는 시도로 보였다. 또 때로는 죽음 앞에 선 햄릿처럼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마치 이제 막 떠오르려는 생각이 왜 이리 느림보를 피우냐고 질책하는 듯했다. 냉철한 동시에 격렬한 목소리로 그는 끊어진 연설 또는 불확실한 기억에서 무의식의 엄격한 논리를 불러내 이 무의식의 흐름을 흉내내는 듯했다. 그의 세미나는 집단적인 카타르시스를 일으키곤 했다. 참석자들은 모두 각자 라캉이 자신에게만 말하는 것처럼 느꼈다. 1953년부터 1963년까지 이곳은 이 강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 즉 철학자들, 정신분석가들, 작가들에게 일종의 실험실이었다. 소크라테스의 향연과 비슷한 분위기가 이곳을 지배했다. 물론 나중에 강의 내내 지속되었던 흥분 상태는 사라졌지만 스승과 청중들 간의 활기찬 의견의 교류에서 여전히 그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풍부한 대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마들렌느 샵살은 이 세미나에 참석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지베'와 함께 여러 번 기트랑쿠르에서 주말을 보냈고, 그곳에서 실비아는 그녀에게 유익한 조언을 해주었으며, 그녀를 트리스탕 차라와 조르주 바타이유에게 소개시켜주었다.
그녀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부터 프로이트 학설에 매력을 느꼈다. 그런데 그녀는 이제 당대의 작가나 사상가들과의 일련의 긴 인터뷰들을 통해 수준 높은 문학 저널리즘 세계 속에 입문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사르트르나 말로, 보부아르, 셀린느처럼 이미 유명한 작가들도 있었고, 아직까지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 후자의 사람들에게 그녀는 인지도 높은 주간지를 통해 광범위한 대중들에게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특히 그녀는 언어로 세계를 구조화시키려는 '비범하고' '반항적인' 지식인들을 좋아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그녀는 소설가가 되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말을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라캉과 그녀는 금방 소중한 친구가 되어 꽃을 선물하거나 희귀서를 서로 빌려주고 편지들을 주고받곤 했다. 편지의 호칭으로는 '너'와 '당신'이 번갈아 쓰였으며 내용도 시와 산문이 섞여 있고, 숨박꼭질 놀이와 연애 기술도 엿볼 수 있었다. 그녀는 가장을 좋아하는 그의 성향, 즉 적갈색 가발, 사교계의 쾌락에 대한 선호, 연극적 상황들에 대한 열정을 좋아했다."
상류 사회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머니인 마르셀 쇼몽과 대모인 마들렌느 비온네가 몸과 영혼을 다 바쳤던 그 덧없는 세계의 은밀한 의식에 익숙해 있었다. 어린 시절 내내 몽테뉴 가의 살롱에서 '상류사회의 분위기'를 배운 그녀는 양장점의 여재봉사들이 공주나 스타 혹은 부유한 부르주아 계급의 여자들을 위한 화려한 드레스를 만드는 모습을 보며 경탄하곤 했다."
라캉은 이 '영혼'과 사랑에 빠졌다. 그는 그녀와 스승인 클레랑보와 함께 직물에 대한 열정을 나누어 갖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약간의 페티시즘이 없지 않았다. 그는 마들렌느의 예절과 우아함, 섬세한 취미에 매료되었다. 1956년 2월에 마리-로르 드 노아이유 집에서 열릴 무도회를 위해 어떤 복장을 해야할지 고민이 된 그는 그녀에게 조언을 부탁했다. 그리고 특히 이 일에 대해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분야에서도 그는 표절을 두려워했다. 어떤 날에는 그녀에게 자기 좌우명이 "사람들은 나를 배반하고도 벌받지 않고 무사히 도망간다"(이것은 스코틀랜드 기사단인 '엉겅퀴 기사단의 훈장에 새겨져 있는 명구[銘句] “내게 도전한 어느 누구도 무사할 수 없다(Nemo meimpune lacessit)”를 정반대로 뒤집어놓은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라캉은 나중에 이 문제를 다시 다루면서 영웅은 사람들에게 배반당하고도 아무 해를 입지 않는 대상으로 규정했다. 어쨌든 그날 밤 그는 철학에 대한 찬사를 상징하는 미네르바의 새, 부엉이로 가장했다.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에서는 사건보다 구조를 우선시하고, 그가 사용한 전거나 인용문들을 분명히 밝히는 대신 암시적으로만 처리했던 그였지만 잡담이나 소문, 일화 등 특별한 형태의 역사 이야기에 대해서는 유달리 탐욕스러운 호기심을 보였다. 그는 속을 터놓은 사람에게만들려줄 수 있는 은밀한 비밀 이야기를 듣는 것을 특히 좋아했다. 마들렌느는 이렇게 말한다. "그를 만나러 갈 때면 애써 최근의 수다 거리를 기억해내려 애썼다. 그것이 그에게는 어떤 과자 선물보다도 더 큰 기쁨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는 어느 수다쟁이보다 더 호기심이 많았다. (......) 하지만 자신에 관해서는 조금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그는 (프루스트의) 잔인한 베르뒤랭 부인만큼이나 은밀한 대화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으며, 또한 언론계의 거물들이 모이는 장소에 드나드는 것도 아주 좋아했다. 언어가 투명할 수 있다는 환상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직업인 그들을 관찰하는 것은 그가 강의에서 이들에게서 은밀하게 가장 감탄했던 것, 즉 매체의 힘과 명료한 의사소통에 대한 열망에 도전할 때 아마 제법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종종 마들렌느를 마티농가에 있는 '르 버클리'라는 레스토랑에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그는 언론계 거물인 피에르 라자레프가 즐겨 앉는 테이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는 그녀에게 값비싼 멧새 요리를 주문해주었다.
그녀도 라캉이 유혹하려 한다는 것을 익히 눈치챘지만 그가 여자가 아니라 기자로서의 그녀에게 환심을 사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기를 힘껏 도와줄 기자를 기다렸던 것이다. “당시 라캉은 아직 아무런 책도 내지 않았다. 그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불타고 있었다. 그는 나를 통해서 『렉스프레스』 지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녀는 그와 자유연애 관계라는 애매한 게임을 즐기면서도 결코 그의 사랑의 표시에 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사로잡기 위해 너무나 세련된 전략을 구사했다. 그는 그녀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애인이 많으면 무슨 소용이야, 어느 누구도 그대에게 세계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면 말이야."
1957년 봄에 그녀는 그에게 『렉스프레스』지에 실을 인터뷰를 제안했다. 단 일반 대중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는 즉시 수락했다. “그는 공개적인 장소에 입장하는 법을 익히 알고 있던 것처럼 큰 인기를 끌고 있던 잡지에 데뷔하는 일을 준비하는 데도 아주 능숙했다. 프로이트와 정신분석에 관한 나의 모든 질문(어떤 질문은 일부러 아주 기본적인 것들로 마련했다. 왜냐하면 나 역시 인터뷰가 신문에 실리기를 바랐기 때문이다)을 그는 아주 점잖고 주의 깊게 듣고는 정말 대가답게 고전적인 방식으로 너무나 명료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의 상냥함과 호의적인 태도, 그리고 자기 생각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태도에 감동했다. 라캉은 강연에서는 보통 모호하고 바로크 풍으로 설명했지만 원한다면 얼마든지 명쾌하게 설명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인터뷰는 1957년 5월 31일자 잡지에 실렸다. '정신분석의 열쇠'라는 제목이 표지에 인쇄되고, 1면에는 이 대가의 사진도 실렸다. 그리고 사진에는 요한 복음에서 인용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인터뷰를 통해 라캉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렉스프레스』지 구독자들에게 프로이트의 발견이 무엇이며, 그가 보기에 이 발견에 대한 진정한 해석(당연히 지극히 라캉적인 해석이었다)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프로이트는 모든 과학적 탐구는 인간의 나르시시즘에 모욕을 가져왔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역사를 은유적 형태로 제시했다. 그는 연속적으로 나타난 모욕 중 중요한 세 가지를 예로 들었다. 첫번째는 우주론적 차원에 속하는 것으로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환상을 깨부순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에 의한 것이었다. 두번째는 생물학적 차원에 속하는 것으로서 다윈의 진화론 때문에 동물과 '다르다'는 인간의 주장이 힘을 잃게 되었다. 세번째는 심리학적 차원에 속하는 것으로서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프로이트의 생각에 의한 것이었다. 이것은 자아가 주체의 주인이라는 생각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라캉은 중심의 해체라는 이러한 은유적 표현을 자기 목적에 맞게 변주해 프로이트 학설 전체가 과학, 논리학, 합리성 차원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를 비합리적이라고 비난했던 반(反)계몽주의자들에 맞서 그는 이제까지 합리화에 저항해오던 것을 프로이트가 합리화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합리적으로 추론하는 이성, 즉 실천중인 이성'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프로이트의 발견이 가진 전복적 성격을 상기시켰다. 이어 프로이트가 스스로와 동일시했던 두 명의 역사적 거물인 크리스토프 콜럼버스와 한니발을 인용하는 대신 프로이트를 이집트 상형문자를 최초로 해석한 샹폴리옹에 비유했다. 이런 식으로 라캉은 프로이트의 업적에 대해 여전히 초기 정신에 충실하지만 동시에 프로이트가 의도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왜냐하면 프로이트는 결코 자기의 발견이 사회 질서를 전복할 수 있는 반역의 물결로 이론화될 수 있다는 식의 과격한 주장을 내놓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스캔들을 일으키거나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는 또 무의식이 말 그대로의 엄밀한 의미에서 일종의 글쓰기(여기서 기호는 이 기호가 속하게 된 체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게 된다)가 될 수 있다고도 주장하지 않았다. 이 두 가지 가설, 즉 정신분석 학설의 전복적 성격과 무의식의 기호 체계로의 동화라는 가설은 프로이트의 과학적 개념에는 속하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이트 본인의 진술과 모순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라캉은 이 두 가설을 프로이트의 학설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꿈의 해석』을 읽어보세요. 『일상생활의 병리학』을 읽어보세오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를 읽어보십시오. 이 저서들의 아무 데나 펼쳐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말한 내용이 분명 거기 들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프로이트의 작업은 전복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가설을 내놓으면서 라캉은 내가 이미 다른 곳에서 윤곽을 그려 보인 바 있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한니발 식 관점의 직계에 자신을 위치시켰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한니발과 동일시했던 것은 자기 발견을 저항의 원리와 연결시키기 위한 것이었던 반면 라캉은 이보다 훨씬 더 나아가 이것을 가능한 모든 인간적 반역의 원형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 점에서 그는 프랑스적 예외의 전통을 그대로 따랐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프랑스는 프로이트가 완벽한 의미에서의 혁명을, 즉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이념적으로 완벽한 혁명을 수행했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이다. 이러한 예외성의 기원은 무엇보다 먼저 1789년 혁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혁명은 광기에 대한 이성의 우위에 과학적이고 법적인 합법성을 부여했으며 이와 동시에 정신병원이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다시 이것은 드레퓌스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사건은 지식인 계급에 자의식을 부여해주었다. 지식인들은 아방가르드를 자임함으로써 혁신적인 사상들을 독점해 이를 이용할 수 있었다. 여기에 보들레르 랭보, 로트레아몽을 거쳐 형성된 현대 문학의 탄생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타자이다(JE est un autre)”라는 랭보의 말을 기초로 인간(성)을 바꿀 수 있다는 사상이 새로운 글쓰기를 통해 표현된 점도 덧붙여야 할 것이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 없었다면 최초로 독일에서 등장한 병리론을 통합한 정신의학적 지식에 대한 오랜 연구도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프로이트의 발견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드레퓌스 사건이 없었다면 자의식을 갖고 혁신적 사상을 흡수하는 아방가르드 지식인들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현대 문학이 없었다면 프로이트의 발견은 다음과 같은 생각, 즉 이러한 발견은 주체의 전복("나'는 타자이다")인 동시에 사회 질서에 대한 급진적 도전의 표현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과 연결될 수 없었을 것이다.
라캉은 초현실주의자들과 또 나중에는 바타이유와 교류하고 니체의 저서들을 접하면서 고수하게 된 프로이트주의의 전복성에 관한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이러한 전복성의 기원을 프로이트 본인에게로 소급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어떤 증거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과연 그러한 주장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라캉은 1954년에 칼 구스타브 융을 방문함으로써 이 미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프로이트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이단아인 융은 당시 이미 79세였다. 퀴스나하트라는 취리히 호숫가에 위치한 으리으리한 집에서 그는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수많은 방문자들에게 동양의 늙은 도인처럼 치료도 해주고 이러저러한 조언과 박학한 지식을 들려주었다. 그에게 접근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던 라캉은 오랜 친구인 롤랑카엥에게 도움을 청했다. 정신과 의사로 독일어 학자였던 그는 1936년에 융을 알게 되었다. 이후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그의 저서를 처음으로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전후 생트-안느 병원에서 나흐트와 라캉, 에, 라가슈와 알게 된 그는 이들에게 융의 학설을 참고하라고 설득했지만 헛수고였다. 라캉이 융에게 보낼 추천서를 요구하자 그는 이번 기회를 이용해 두 학설이 비교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구 들어보게. 자네의 시니피앙과 우리의 원형은 친사촌간이라네.” 라캉은 단호하게 반박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결코 그렇지 않네. 하지만 나는 융을 만나러 갈 수 있기를 바라네. 왜냐하면 그는 분명히 프로이트에 관한 추억을 갖고 있을 테고, 나는 그것을 책으로 엮고 싶다네."
당시 융은 아직 회고록』을 쓰기 시작하지도 않았고 프로이트와 주고받은 서신도 아직 출간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와 관련된 어떤 전기 집필 작업도 시작되지 않았다. 정신분석의 기원과 초기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프로이트의 성도전(聖徒傳)뿐이었다. 그런데 융은 두려움도 모르고 비난할 바도 전혀 없는 영웅으로 소개되는 이 빈의 대가의 지극히 신성한 초상에 대해 항상 부정적이고 불만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프로이트와의 관계에 대해 융을 증인으로 내세우려는 라캉의 생각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롤랑 카엥은 아무 정보도 듣지 못한 점을 유감스러워했다. 라캉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고, 융은 이 만남에 대해 금방 잊어버렸다.
라캉이 친구에게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이유는 이것을 청중을 위한 정보로 남겨두기 위해서였다. 1955년 11월 7일에 빈에서 독일어로 발표한 프로이트의 '사물'에 관한 강연에서 그는 퀴스나하트로 융을 방문했던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래서 클라크 대학 초청으로 뉴욕항에 도착해 세계를 밝힌다는 그 유명한 동상을 처음 보았을 때 프로이트가 융에게 '우리가 페스트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겠지'라고 했다는 말 – 나는 이 말을 융에게서 직접 들었다 – 이 융에게는 오만함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것처럼 비쳤는데, 이 말이 가진 반어법과 우울함도 이 말에 들어 있는 흐릿한 빛을 완전히 없애버리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 주석을 붙이면서 라캉은 프로이트가 착각했다고 지적했다. 즉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이 미국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역할이 역전되어 미국이 프로이트의 가르침을 삼켜버려 전복적 정신을 제거해버렸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했다는 이 말은 예상외로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어느 누구도 프로이트주의의 전복성을 의심하지 않으며, 특히 프로이트가 1909년에 융과 페렌치와 함께 미국을 여행할 때 결코 이 말을 하지 않았으리라고는 아무도 감히 상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텍스트와 서신, 문서들을 조사해보면 융은 라캉에게만 이처럼 귀중한 비밀 얘기를 해준 것처럼 보인다. 융도 『회고록』에서 이 여행에 대해 언급하지만 페스트에 관한 어떤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프로이트와 페렌치도 결코 이 말을 언급하지 않는다. 앙리 엘랑베르제, 빈센트 브롬, 클라렌스 오베른도르프, 폴 로아장, 나탄 G. 헤일, 피터 게이를 포함해 어네스트존스부터 막스 셔에까지 이르는 프로이트주의 역사가들을 보면 이들은 단지 프로이트가 "우리가 무슨 말을 할지를 알면 깜짝 놀랄 겁니다”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혼자만이 비밀을 아는 유일한 증인이라는 자부심을 느낀 라캉은 원래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허구를 만들어 소위 미국식 정신분석에 맞서 이제부터 프로이트주의에 전복성이라는 낙인을 찍어 이 학설을 자기식대로 재정식화하려고 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비라캉주의들까지도 그것이 직접 프로이트가 한 말이라고 믿을 정도로 '프로이트의 페스트' 이야기가 프랑스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은 아마 이것이 '프랑스적 예외'를 직접 계승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라캉은 한때 이러한 전통을 경멸했지만 이제는 이러한 전통의 계승자이자 혁신자가 되었다.
정신분석의 창시자가 살았던 이 도시에서 라캉은 즉각 중부 유럽, 즉 처음에는 나치즘에 삼켜지고 다음에는 미 제국주의에 의해 역사에서 지워진 중부 유럽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1936년의 마리엔바트에서처럼 런던에 맞서 빈에, 그리고 신대륙에 맞서 유럽에 기대려고 했다. 이를 위해 그는 강연에 참석한 '빈 정신분석학회(WPV)' 회장인 알프레트 폰 빈터슈타인 백작을 증인으로 불러냈다. 영웅 시대의 마지막 생존자인 이 귀족은 나치 시대에 빈에서 아우구스트 아이히호른과 함께 훼손된 정신분석의 잔해들을 보존했다. 그리고 존스가 주창한 ‘구출' 정책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라캉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프로이트가 말한 '페스트'의 전복적인 의미가 '흑사병'뿐만 아니라 다양한 적응 이론들과 대립되는 의미로 전달되기를 바란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7년에 이고르 카루소 백작을 WPV에서 추방시키도록 만든 분열에도 불구하고 WPV는 IPA에 완전히 통합되었다. 터켓 위원회에서 만나 알게 된 빌헬름 솔름스를 통해 라캉은 즉각 이러한 사정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리하여 1955년 가을에 라캉은 초기 프로이트주의의 전복적인 힘을 망각한 이 도시를 맹렬히 비난하게 된다.
『렉스프레스』지에 실린 마들렌느 샵살과의 두번째 인터뷰에서 라캉은 여전히 미국식 정신분석을 염두에 두면서 사회적 적응을 지향하는 정신분석은 전적으로 오류이며, 또한 이와 반대로 분석이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일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프로이트의 유명한 문구를 갖고 말장난을 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주체인 '나'를 무의식의 자리인 '이드'에 갖다 놓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기서 다시 한번 빈에서의 강의와 1956년 11월 6일에 SFP에서 열린 토론을 언급하고 있었다.
이날 에스나르는 프로이트가 1932년에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의 한장인 심리적 인격의 '해부'」의 끝부분에 쓴 Wo Es war, soll Ich werden이라는 문장에 주석을 붙였다.
이 문장은 정신분석이 문명에 부과한 새로운 임무를 규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쥐더 만(灣) 근처의 바다를 간척하는 것만큼이나 인류에게 중요한 임무였다. 1936년에 이 문장은 마리 보나파르트의 동료였던 안느 베르만에 의해 이렇게 번역되었다. "자아는 그것을 몰아내야 한다."
무의식을 다양한 의식적 사고 방식에 적응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라캉은 이러한 번역에 반대하고 피숑이 제안한 '나/이드'라는 두 개쌍을 이용해 이 유명한 문장을 다음과 같이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La où ça était(c’était), le je doit être(dois-je advenir)"('이드'가 있었던 그곳에 '나'가 있어야 한다). 독일어 동사 war는 반과거 시제를 써서 말 그대로의 의미로 번역했다. 이리하여 프로이트의 2차 위상학이 비심리학적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즉 정신분석의 임무는 자아를 이용해'그것’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이와 반대로 모든 요소가 각각의 적당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자아(moi)'는 Ich의 전체가 아니라 가상의 '자아(moi)'와 발화의 주체인 '나(je)'로 나뉘어졌다.
라캉은 이미 전후에 이러한 구분을 제안한 바 있었다. 하지만 1949년에 시작된 코기토에 관한 새로운 고찰의 결과 이러한 구분법은 구조언어학적 관점의 성공적인 응용 속에 포함되는데, 이것은 두 단계에 걸쳐 진행되었다. 메를로-퐁티는 1953년 1월 15일에 있었던 콜레주 드 프랑스 취임 강연에서 프랑스에서는 최초로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철학을 도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언어학에서 발전된 것과 같은 기호 이론은 아마 사물과 의식의 대립을 넘어서는 역사적 의미라는 이론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이 경우 우연성 속에는 합리성, 체험된 논리, 그리고 역사에서의 우연성과 의미의 결합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자기-구성이 들어 가게 됩니다. 그리고 소쉬르는 새로운 역사 철학의 윤곽을 그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20)라캉은 이 메시지를 이해했다. '로마 강연'에서 최초로 하이데거 철학과 친족의 기본 구조에 입각해 주체와 언어와 발화를 연결시킨 이후 그는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주체와 시니피앙의 관계 문제를 논리적으로 이론화하기 시작했는데, 이리하여 이제 그는 모든 존재론을 포기하게 된다. 이러한 이론화 작업은 점진적으로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바로크풍의 나선형 문체를 통해 이루어졌다. 라캉은 결코 일직선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하는 말에서 모든 형태의 역사적 흔적을 지워버리기라도 하듯 전혀 전거를 밝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자기가 만들어낸 개념을 프로이트의 것인 양 설명했다. 게다가 그는 세미나마다 방향을 바꾸곤 했다. 마치 그가 아주 좋아했던 영화 감독(그에 따르면 정신병의 논리적 엄정함을 선명하게 보여준) 루이 브뉘엘의 영화 <엘 El>에 등장하는 편집증에 걸린 주인공의 갈지자 걸음걸이를 흉내내는 것 같았다. 이처럼 그는 시니피앙과 주체를 번갈아가면서 다루었다. 즉 홀수번째 세미나(1, 3, 5, 7권 등)에서는 시니피앙을, 짝수번째 세미나(2, 4, 6권 등)에서는 주체를 다루었다. 이러한 배치는 또한 시니피앙의 우위와 관련된 라캉의 사고 체계의 핵심 주제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또한 그의 학설 속에서 개념들의 재정식화의 연결 관계와 단계들을 추적해서 구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소쉬르의 저서에 대한 두번째 강독을 통해 그리고 로만 야콥슨의 저서에서 지원을 받아 라캉은 롤랑 바르트, 미셸 푸코, 루이 알튀세 등과 같은 사람들과 함께 하나의 사유 방식의 학파를 세우게 되는데, 이 학파는 현상학과 단절하고 정신분석에 대한 소위 '반휴머니즘적', '구조주의적', '과학적' 구상을 제시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주의에다 라캉은 '대상 a' 이론과 '문명의 편집증적 자아' 이론을 통해 젊었을 때 심취했던 니체주의에 반영되어 있는 전복성을 추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니체주의에도 불구하고 라캉은 계몽주의 철학을 그대로 채택하는 대신 반계몽주의와 무신론적 합리주의와 대립적인 과학적 전통을 따랐다. 이처럼 과학에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했기 때문에 그는 하이데거와 평생 우정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의 철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라캉의 구조주의의 경우 이것은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주체의 의식은 무의식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인간은 전혀 자유롭지 않다는 의식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는 데카르트적 회의에서 유래하는 분열된 자의식에 관한 이러한 프로이트의 사고 방식이 자유의 철학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예를 들어 사르트르의 믿음보다는 훨씬 더 전복적이었다.
소쉬르에 대한 라캉의 두번째 해석은 1954년 6월 23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처음으로 라캉은 랑그 파롤, 랑가주의 개념들을 단순하게 인용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쉬르의 기호 이론에 주석을 붙였다. 1955년 5월 30일에 그는 에드가 앨런 포의 단편소설 「도둑맞은 편지」를 이용해 이러한 접근 방식을 보충하려고 했다. 5월 25일에는 '대타자 A'와 '대상 a' 관계를 이론화했고, 이어서 6월 8일에는 아버지의 기능을 '상징적 아버지'로 보는 이론을 발표했다. 그래서 '아버지의-이름(nom-du-père)'을 단순한 가정에서 진정한 개념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동일시'에 관한 세미나(1961~62)에서 다시 이 주제들을 다루었다. 이 세미나에서 그는 버트란드 러셀을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고유명사를 '유일무이의 특질(trait unaire)', 즉 시니피앙의 하나를 나타내는 것과 동일시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인 1956년 5월 2일에 그는 처음으로 은유와 환유에 관한 야콥슨의 논문들을 언급했다. 그리고 일 년 후 『렉스프레스』지와 인터뷰를 가진 시기인 1957년 5월 9일에 소르본느 대학 문과대학 학생들 앞에서 강연한 「무의식 속에서의 문자의 기능」에서 이 논문을 아주 유용하게 이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1960년 9월 19일부터 23일까지 장 발의 주최로 루아요몽에서 '변증법'을 주제로 조직된 콜로키움에서 라캉은 처음으로 (라캉적 의미에서의) 시니피앙을 규정하고 주체를 구조(혹은 상징적 연쇄)의 한 요소로 규정하는 유명한 정식, 즉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을 위해 주체를 표상한다”라는 정식을 소개했다.2) 이로부터 시작해 그는 1961년에는 주체의 위상학적 구조 개념으로 넘어가게 된다.
다른 한편 얼마 전인 7월 10일부터 13일까지 SFP의 국제 회의가 열린 루아요몽에서도 그는 주체의 구조라는 과감한 구조주의적 개념을 인성의 구조에 관한 논문에서 라가슈가 제시한 인성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비시켰다. 라캉은 심리학화된 정신분석의 프랑스식 형태에 도전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이것의 미국식 형태가 바로 자아심리학이었다.
포의 단편 소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은 프랑스의 왕정복고기로서, 명문가 출신의 젊은 신사인 오귀스트 뒤팽은 경찰국장의 요구로 장관 D가 여왕에게서 훔쳐내 어딘가에 숨겨둔 위험천만한 내용의 편지를 찾아내야 한다. 이 편지는 장관의 서재 벽난로 선반 위에 전혀 감춰지지 않은 채로 있었기 때문에 보려고만 한다면 얼마든지 쉽게 눈에 띌 수 있었다. 하지만 경찰은 자신들의 심리(학)에 갇혀 있기 때문에 편지를 발견하지 못한다. 바로 눈앞의 증거를 살펴보는 대신 편지를 숨길 만한 장소에 관한 복잡한 이론을 세운다. 뒤팽은 이와 전혀 다른 방법으로 행동하고 싶어한다. 그는 장관이 '거꾸로 전혀 감추지 않으려는 묘수'를 구사했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장관에게 정중히 면담을 요청한다. 그는 장관과 말하는 동안 시선을 흐릿한 안경 뒤로 숨긴 채 세심하게 방 안을 샅샅이 살핀다. 그는 곧 편지를 발견하고는 순식간에 그것을 훔친 다음 장관이 모르게 겉으로는 똑같은 가짜 편지를 대신 놓아둔다. 그래서 장관은 편지를 도난당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여전히 여왕이 자기 손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편지를 소유한다는 것은 여왕에 대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장관은 자신에게 편지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반면 여왕은 이제 협박꾼이 왕을 상대로 그녀에게 압력을 가할 수 없게되었다는 사실을 안다. 왜냐하면 그녀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편지를 사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뒤팽은 화자에게 어떻게 편지를 발견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면서 하나의 픽션을 이용한다. 그는 단순하고 소박한 심성을 가진 학교 아이들이 경찰국장보다는 훨씬 더 추리력이 뛰어나다고 말한다. 그는 어떤 사내아이와 홀짝 놀이에 관한 일화를 들려준다. “저는 여덟 살 난 남자 아이를 하나 알고 있는데, 짝수/홀수를 알아맞히는 그 아이의 실력에는 모든 사람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죠. 놀이는 아주 간단한 것으로 구슬로 하는 놀이입니다. 한 명이 구슬 몇 개를 손에 쥔 다음 다른 사람에게 '홀, 짝' 하고 묻습니다. 맞히면 구슬 한 개를 따고 틀리면 반대로 구슬한 개를 잃습니다. 그런데 내가 말한 아이는 학교 친구들의 구슬을 모두 땄습니다. 물론 그 아이에게는 알아맞히는 비법이 있었습니다. 가만히 상대방의 미묘한 표정을 관찰해 추론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1955년 5월의 세미나에서 라캉은 제자들에게 짝수/홀수 놀이를 해볼 것을 제안했다. 수감자들 이야기와 비슷한 이 편지 이야기에 더 나은 주석을 붙이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 이야기의 핵심 요소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뭔가를 결정해야 하는 주체가 아니라 주체를 결정 과정 속에 밀어넣는 편지/문자였다. 그러나 이 두 사례에서는 모두 시선(regard)과 놀이(jeu) 개념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 달 후 라캉은 실제로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본편의 글을 쓰기 시작해 8월에 마키아벨리가 태어난 산 카스키아토에서 끝냈다. 11년 후에 『에크리』의 첫번째 글로 실리게 될 이 핵심적인 논문에서 그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관련해 이제 더이상 상징적 기능의 우위성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시니피앙의 '정치적' 논리라고 할 만한 것을 구성해 보여주었다. 즉 편지(lettre)는 언제나 행선지에 도달한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왜냐하면 '문자(lettre)', 다시 말해 '시니피앙'은 무의식에 새겨지는 만큼 마키아벨리의 포르투나(fortuna)처럼 다양한 방향 속에서 주체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 속에서의 문자의 기능'이었다. 라캉은 우선 1957년 5월에, 그리고 나서 1960년 9월에 이러한 기능이 어떻게 조직되는가를 설명하게 된다.
군주론에서 군주의 성공과 실패를 설명하는 중요한 두 가지 요소가 포르투나(Fortuna)와 비루투(Virtu)라고 본다. 포르투나(Fortuna)는 운명, 행운, 기회로 신을 포함한 자신을 제외한 외부에서 오는 힘을 말한다. 비루투(Virtu)는 실천적 지혜 또는 통찰력, 노력, 용기를 말하는 것으로 주체적 역량 즉, 인간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결단력을 의미한다.
소쉬르는 언어 기호를 두 가지 요소로 나누었다. 즉 개념의 음성적 이미지를 시니피앙으로, 그리고 이 개념 자체는 시니피에로 불렀다. 따라서 언어 기호는 하나의 체계 안에서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에 따라 가치가 규정된다. 다른 한편 어떤 기호의 가치는 언어 속에서의 다른 모든 기호들의 동시적 현존에 따라 부정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가치와는 다르게 의미 작용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간의 외재적인 관계에서 유추된다. 그런데 구조주의 언어학에 비추어 프로이트의 2차위상학을 해석하려면 이러한 기호라는 문제틀과 단절해야 했다. 소쉬르는 소위 '의미 작용의 가로선을 통해 두 요소를 분리시키면서 시니피에를 시니피앙보다 우위에 두는 반면 라캉은 이러한 입장을 뒤집어 시니피앙을 시니피에보다 위에 두면서 시니피앙에 우선적인 기능을 부여했다. 그런 다음 가치 개념을 자기 목적에 맞추어 이용하면서 모든 의미 작용은 다른 의미 작용을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이로부터 그는 의미작용은 전혀 하지 않지만 주체의 무의식적 운명을 결정하는 문자(또는 말상징)처럼 시니피앙은 시니피에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한편 주체에 대해 라캉은 주체를 나와 구분하면서 처음에는 이 주체를 무의식의 주체라고 규정했다. 즉 분열(Spaltung)이라는 프로이트의 법칙에 따라 분열된 주체이며, 불일치(discordance)라는 정신의학적 명제에 따라 분할된 주체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주체는 완전한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주체는 시니피앙에 의해 표상된다. 다시 말해 언어 속에서의 무의식의 정박소를 표시하는 문자로 표상된다. 하지만 동시에 시니피앙의 연쇄로도 포상되는데, 이때 언표된 것의 차원은 언표 행위의 차원과는 구분된다. 이처럼 주체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구조 안에서 하나의 시니피앙을 통해 다른 시니피앙에 대해 표상된다.
이를 토대로 라캉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를 프로이트의 이드가 말한다로 대체시켰다. 바로 여기서 프로이트 학설과는 전혀 무관한 '무의식의 주체'라는 용어가 생겨난다. 이를 통해 라캉은 실제로는 프로이트가 정말로 주체를 억눌러 없애버린 것이 아니라 갈릴레이 이후 현대 과학을 탄생시킨 데카르트주의에 대한 반발의 일부로 그것을 병합시켜버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프로이트가 나르시시즘적 상처에 관한 논문에서 코페르니쿠스와 다윈의 계승자를 자임했다면 라캉은 오히려 코이레의 학설을 통해 갈릴레이의 계승자임을 자임했다. 이때부터 그는 (주체를 자기 사유의 장본인으로 만들어준) 데카르트적 회의와 (주체를 산업 사회에 적합한 도덕 이데올로기의 핵심으로 만들어준) 칸트적 윤리에서 이중적 결론을 끌어내 '문명의 편집증적 주체'로 규정되는 현대적 자아 이론을 도출해냈다. 이처럼 라캉은 프로이트의 실험이 코기토 철학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킨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라캉은 데카르트를, 즉 과학에 기반한 주체를 프로이트와 함께 거명함으로써 회의의 주체를 무의식에 다시 도입하게 되었다. 즉 분열된 주체를 말이다. 이리하여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이리하여 이제 나의 분열(Ichspaltung)이라는 프로이트 개념을 번역하면서 인간 주체는 두 번 분열된다는 것을, 즉 첫번째 심금에서는 상상적 자아가 무의식의 주체로부터 분열되며, 두번째 심급에서는 이러한 분열이 무의식의 주체의 한가운데 새겨지며 이리하여 근원적 분열(Urspaltung)을 대변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 남아 있었다. 라캉은 치유할 수 없는 이 두번째 분열을 재분열(refente)이라고 불렀는데,왜냐하면 주체는 항상 하나의 시니피앙에 의해 다른 시니피앙에게 표상되기 때문이다. 재분열 옆에 라캉은 이러한 연쇄에서의 주체의 출현과 소멸을 규정하기 위해 영어에서 (부정확하게) 차용한 '페이딩(fading)'이라는 용어를 갖다 놓았다. 이것은 영화에서처럼 이항적 형태가 연쇄적으로 희미해지거나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데카르트 철학'을 공격하는 데는 소쉬르 저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로만 야콥슨의 연구들을 이용했다. 라캉은 「문자의 기능에 관한 강연이 있기 몇 달 전에 우연히 야콥슨과 모리스 알르가 함께 쓴 『언어의 원리 Fundamentals of Language』(Den Hague 출판사)를 발견했다. 이 책의 한 장인 언어의 두 가지 측면과 실어증의 두 가지 유형은 라캉이 언어로서의 무의식을 구조주의적으로 이론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야콥슨은 언어가 양극적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화자는 무의식적으로 두 가지 형태의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첫번째 형태는 유사성으로 결합되어 있는 계합체(係合體, paradigma)의 문제로서 랑그 단위들의 선택과 관련되며, 두번째 형태는 인접성의 문제로서 이렇게 선택된 단위들의 통합체統合體syntagma)적 결합과 관련된다. 선택 과정에서 발화자는 이러저러한 말을 선택하거나 어떤 말을 다른 말보다 선호한다. 예를 들어 '기수 모자'나 '베레모' 대신 ' 없는 모자'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 결합 과정에서는 두 가지 말을 하나의 관계로 결합시켜 연속성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복장을 묘사하기 위해 '치마'라는 말을 '블라우스'라는 말과 연결시킬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야콥슨은 실어증의 결과로 일어나는 언어 장애는 개인에게서 어떤 경우에는 선택 행위를, 다른 경우에는 결합 행위를 박탈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언어학에 고전 수사학을 도입해 언어의 선택 행위는 은유적 기능의 실행과 다르지 않으며 결합 행위는 환유과정과 비슷하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첫번째 언어 행위와 관련된 장애는 주체로 하여금 은유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며 두번째 장애는 주체에게 모든 환유적 행위를 금지시킨다. 야콥슨은 결론 부분에서 이 두 과정은 프로이트가 서술한 꿈의 작용에서 그대로 일어난다고 지적했다. 그는 상징화를 은유적 행위로 분류하고 응축(condensation, Verdichtung)과 전위(位, deplacement, Verschiebung)는 환유적 행위로 분류했다.
라캉은 야콥슨의 이러한 해석을 수용하지만 이를 이용해 꿈 작업에 대한 프로이트의 개념을 다른 식으로 정식화했다. 일반적으로 꿈은 잠재적 내용과 겉으로 드러난 내용 간의 왜곡 활동으로 구성되는데, 이 과정을 소쉬르의 연구에 비추어보면 시니피에가 시니피앙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처럼 시니피앙을 시니피에 위에 위치시키는 경우 두 가지 측면이 나타난다. 일종의 응축으로 규정될 수 있는 첫번째 효과는 시니피앙들(두 낱말의 음과 뜻을 합쳐 만든 합성어나 복합 인칭어 같은)의 부과 구조를 가리킨다. 다른 하나는 의미 작용(전체가 아니라 일부 또는 인접성)의 전환과 관련되며, 전위를 가리킨다. 하지만 야콥슨과 반대로 라캉은 프로이트의 응축 개념을 은유 방식과, 그리고 전위는 환유 방식과 동일시했다. 그에 따르면 증상은 은유의 범주에 속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증상을 통해 신체적 시니피앙이 다른, 즉 억압된 시니피앙을 대체한다는 것을 간파하기 때문이다. 반면 항상 충족되지 못하는 욕망을 위한 욕망으로 나타나는 무의식적 욕망은 환유의 범주에 속했다.
"내가 시니피앙의 주체로서 차지하는 자리는 내가 시니피에의 주체로서 차지하는 자리에 비해 구심적인가 아니면 원심적인가?" 라캉은 원심적이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그가 코기토를 완전히 탈구脫臼시켰기 때문이다. 즉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따라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이처럼 라캉의 위상학은 무의식에 언어 구조를 부여함으로써 성립했다. 이 위상학에서 나는 야콥슨이 지시사(shifter)로 부르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다시 말해 의미 작용이 메시지와 상관적인 문법 단위로서. 따라서 '지시사'는 의미 작용을 생각하지 않고 언표 행위를 하는 주체를 드러내주게 된다. 라캉은 이것을 부정적 시니피앙으로, 특히 피숑이 부정에 관한 유명한 글에서 규정한 대로 허사 ne로 표현했다. 30) 이후 라캉은 무의식에 대한 그의 구조(주의)적 재정식화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게 된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언어는 무의식의 조건이다”, “무의식은 언어학의 조건이다."
다른 한편 그는 시니피앙을 시니피에 위에 둠으로써 나타나는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공식을 내놓았다. 일반 공식은 의미 작용에 대한 저항선으로부터 시작해 시니피앙의 기능을 서술하고 있다. 환유와 관련된 공식은 시니피앙들간의 결합 기능을 나타냈다. 이 과정에서 시니피에의 생략은 연쇄에서는 항상 결핍되는 욕망의 대상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은유와 관련된 공식은 하나의 시니피앙이 다른 시니피앙을 대체하는 기능을 나타내는데, 이를 통해 이때 주체가 표상된다. 라캉은 시니피앙이 시니피에와 묶여 하나의 의미 작용을 만들어내는 연쇄상의 한 점을 가리키기 위해 이것을 누빔점이라 이름붙였다. 이 용어를 통해 '로마 강연'에서 제출한 구두점 찍기라는 개념에 좀더 이론적으로 엄밀한 내용을 추가할 수 있게 되는데, 이 개념은 상담 과정에서의 내적인 단절의 필요성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었다.
라캉은 여기서 다시 한번 자신의 접근 방식을 프로이트의 것인 양 만들었다. 그는 심지어 프로이트도 이미 무의식을 시니피앙의 연쇄로 보았다고까지 말했다. “이 공식은 프로이트의 텍스트 그리고 이 텍스트가 열어젖힌 실험에 부합하는 한에서만 나의 공식이 될 수 있다" 등.
이리하여 그는 현실에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던 프로이트와 소쉬르의 만남을 자기가 이제야 성사시켰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는 농담 삼아 무의식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라캉이 주체에 관한 '데카르트 식' 이론과 무의식에 관한 '후기 소쉬르 식' 개념을 이용한 정신분석 학설을 내놓기까지의 이처럼 놀라운 지적 활동은 단지 야콥슨의 저작들을 해석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직접 그와 만난 결과이기도 했다. 이처럼 야콥슨은 코제브와 코이레에 이어 라캉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러시아 망명 지식인의 세번째 대표자가 되었다.
1896년에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로만 야콥슨은 아주 어려서부터 언어에 대한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네 살 때부터 글을 읽었고 삼년 후에는 이미 러시아어는 물론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할 줄 알았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모든 로망스어, 슬라브어, 게르만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줄 알았다. 아시아 언어들에 대해서는 오직 친구인 예브게니 폴리바노프만이 그를 능가할 수 있었다. 로만의 부모는 예술가, 화가, 작가들의 계약 전문 변호사인 모스크바의 유리 카간 집안과 아주 가깝게 지냈다. 이 집안의 두 딸인 릴리와 엘자는 로만의 어릴 적 친구였다. 이들은 그를 '롬카'라고 불렀고 그의 적갈색 머리를 아주 좋아했다. 그는 엘자와 사랑에 빠졌다.
톨스토이가 죽은 1910년 이후 그는 상징주의 시인과 이론가들을 숭배했으며, 특히 초기의 미래파 선언문들에 열광했다. 1912년 3월에 릴리는 오시프 브리크와 결혼해 생 페테르스부르그에서 살게 되었다. 여섯 달 후 로만은 그녀를 방문했다. “브리크는 천재였다. 그런 확신이 든다. (......) 그의 목적은 글로 씌어진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았다. 그는 사물을 발견하고 싶어했다. (......) 특히 그는 일을 맡길 수 있는 청년을 만났을 때 아주 기뻐했다. 많은 논문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출간되었지만 모두가 브리크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었다."33) 이 여행 중에 야콥슨은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여기던 벨레미르 홀레브니코프와 알게 되었다. 지식인들이 자주 찾는 유명한 선술집에서 한잔 하던 두 사람은 미래파들이 가상의 단어와 실제적인 접미사들을 결합시켜 만들어낸 '이성적' 언어에 관한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았다.
1914년 봄에는 모스크바에서 블라지미르 마야코프스키를 만나 곧 그의 가장 친한 친구 중의 하나가 된다. 이 친구는 브리크의 문학 살롱에 드나들면서 시적 언어를 공부하고 싶어하는 시인들과 작가들을 만났다. 그는 릴리와 정열적인 사랑에 빠져 그녀의 애인이 되었다. 1915년 3월에 야콥슨은 모스크바 언어학회 창립에 참여했다. 이 언어학회의 모임은 곧 마야코프스키의 아파트 위층에서 시작되었는데, 그도 이 모임에 참석해 자기 시를 낭송했다. 이 언어학회는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사상적 흐름이 결합해 만들어졌다. 먼저 러시아 언어학파의 연구들. 이 학파의 가정 혁신적인 대표자로는 보두앵드 쿠르트네에 이어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 '왕자'가 있었다. 그리고 후설의 현상학과 미래파 아방가르드34) 일 년 후에 회원들은 소쉬르 언어학에 입문하게 되는데, 세르게이 카르체프스키의 학업 덕분이었다. 소쉬르의 마지막 학생 중의 하나였던 그는 회원들에게 새로운 학설의 원칙을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10월 혁명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야콥슨은 페트로그라드에서 시어연구회(OPOJAZ)를 창립했다. 시적 언어를 연구하기 위해 창립된 이 연구회는 브리크 그룹의 활동을 공식화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러시아 형식주의라고 알려지게 되는 학파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연구는 거물들을 불러모았다. 언어학자인 예브게니 폴리바노프 시인인 보리스 아이헨바움, 언어 이론가인 빅토르 슈클로프스키를 비롯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오시프 만젤스탐, 마야코프스키 등이있었다. OPOJAZ의 목표는 문학적 대상 자체가 갖는 모든 외적 고려사항들, 즉 작가의 '프시케', 사회적 가치, 사상의 역사 등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오직 문학작품 자체와 관련된 시학을 만들어내는 데 있었다. 이처럼 모스크바 언어학회와 레닌그라드의 형식주의 학파는 언어 자체를 위한 언어 연구와 자율적인 표현 형태로서의 문학 연구를 결합시키게 된다. 그리고 이 두 그룹에게서는 시가 언어의 정수를 대변했다. 시에서는 언어가 언어 자체를 강조하기 때문이었다."
10월 혁명 후에 두 그룹의 활동은 끝이 나고, 회원들은 각자 다른 길을 간다. 망명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었고, 러시아에 남는 사람, 그리고 1938년에 코카서스에서 총살당한 폴리바노프처럼 결국 스탈린의 숙청 대상이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1923년에는 마야코프스키와 브리크를 중심으로 하는 LEF 혹은 '좌익 예술 전선'이 세워졌다. 과거의 러시아 문화와 낡은 정신 상태를 일소함으로써 미래파로부터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것이 이 이 단체의 목표였다. 엘자 카간이 파리까지 그녀를 데려다준 프랑스 장교 앙드레 트리올레와 결혼하기 위해 1918년 러시아를 떠날 때 야콥슨은 그녀를 위해 시를 썼다. "너와 나 사이에 말이 전해진다/온몸으로 내가 그댈 사랑한다고/네가 타히티로 떠난다면/내 고통은 너무도 크리라." 그는 나중에 파리에서 루이 아라공 옆에 있는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가 『일반 언어학 강의』를 처음 읽게 된 것은 1920년에 프라하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는 소쉬르가 대립의 문제에 부여한 중요성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피카소나 브라크 같은 입체파 화가들처럼 그도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들간의 관계를 강조했다. "언어학에서 항상 뇌리를 떠나지 않던 위상학적 태도가 동시에 입체파와 과학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 소쉬르의 『강의』 속에 들어 있는 이 대립이라는 말은 필연적으로 은폐된 논리적 작업이 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빈에서 그는 다시 트루베츠코이를 만났다. 혁명을 피해 도망쳐온 그는 음운론의 원리를 정초하기 위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1926년 10월에 '프라하 언어학회'를 결성했다. 2년 후 두 사람은 헤이그에서 열린 언어학 대회에서 처음으로 '구조적이고 기능적인 언어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제 형식주의에서 구조주의로 넘어갈 차례가 된 것이다. 즉 랑그의 형식적 구조뿐만 아니라 언어(langage)를 전체적으로 다양한 구조적 기능을 가진 하나의 체계로 연구함으로써 소쉬르 혁명을 계속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1929년에 프라하 언어학회가 새로 제시한 아홉 개의 명제의 논지였다.38) 그리고 여기서는 음운론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이처럼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언어의 최소변별 단위인 음소들의 학문인 음운론이 소리를 물리적으로 묘사하는 과거의 음성학을 대신했다. 소쉬르가 랑그와 파롤을 구분하고 기호를 음가라는 관점에서 규정했듯이 트루베츠코이는 각 음소는 다른 음소와 구분되는 변별적 특징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음소 연구는 모든 언어에 공통된 구조적 원리를 보편화시킬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야콥슨이 1941년에 스톡홀름에서 제시한 가설들, 즉 모든 언어에서 나타나는 가장 일반적인 음운학상의 변별적 특징들에 관한 가설들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었다. 어린이가 제일 먼저 배우는 첫번째 음운학상의 변별적 특징들이 바로 이것이며 동시에 실어증 환자들이 가장 늦게 잃어버리는 변별적 특징들도 바로 이것이다. 이와 반대로 이보다 좀더 미묘한 변별적 특징들은 어린이의 언어 발달에서는 뒤에 나타나며, 실어증에 걸릴 때는 가장 먼저 사라진다.
야콥슨은 나치즘과 전쟁을 피해 망명한 뉴욕에서 망명중인 정신분석계 사람들과 교류했는데, 이 중에는 특히 레이몽 드 소쉬르도 있었다. 야콥슨은 그의 아버지의 저작에 대해 그와 얘기를 나눴다. 레이몽은 아버지의 저작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1916년에 샤를 발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잘 알 수 있듯이 그는 이미 정신분석과 언어학에 공통적인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해볼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 계획을 계속 추진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야콥슨과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아버지의 『강의』의 전반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언어학자로서야콥슨이 처음으로 정신분석이 '언어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리고 또 이와 반대로 될 수 있는지를 절실히 깨닫게 된 것은 바로 뉴욕에서였다.10)
역시 뉴욕으로 도피한 알렉상드르 코이레가 야콥슨을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게 소개했다. 레비-스트로스는 당시 스스로를 ‘고지식한’ 구조주의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야콥슨은 이미 다른 학문 분야, 즉 나에게는 아주 생소했던 언어학에서 확립되어 있던 학설의 체계를 내게 보여주었다. 나에게 그것은 하나의 계시였다. (......) 그는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굽어보는 지성을 가진 사상가였다. 우리는 이후 야콥슨이 레비-스트로스의 『친족 관계의 기본 구조』의 집필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잘 알고 있다. 이 두 사상가간의 형제 같은 우정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야콥슨은 미국 시민권을 택했지만 정기적으로 파리를 방문하곤 했다. 그는 파리에서 레비-스트로스뿐만 아니라 연인이었던 엘자 트리올레를 만나기도 했고, 릴리 브리크가 모스크바에서 파리에 올 때면 가끔 그녀를 만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루이 아라공은 그를 공산주의 작가들에게 소개했다. 그들은 스탈린주의를 혐오하면서 형식주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들의 전설적 업적을 복구시키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야콥슨은 결코 혁명가였던 적이 없었지만 이들은 그를 진정한 혁명의 화신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는 마야코프스키, 홀레브니코프, 브리크 폴리바노프 등과 함께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혁명의 하나인 언어 혁명의 증인이자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1789년 혁명의 나라인 프랑스는 야콥슨에게 프랑스어가 제2모국어 였듯이 제2의 조국이 되었다. 초기 여행 때 그는 레비-스트로스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1950년에 레비-스트로스가 그를 라캉에게 소개한 후에는 릴 가 3번지에서 머물렀다. 그후 그는 실비아의 집에 '그의 방'을 갖게 되었다.
그는 라캉의 강의에 여러 차례 참석했고 그의 가까운 동료와 친구들도 만났다. 그는 라캉의 미국 강연을 두 번이나 주선했다. 결국 1967년에 그는 라캉의 요청으로 '환상의 논리(학)'을 주제로 한 그의 세미나의 토론에 참여했다. 그는 어린이의 언어 장애에 관한 제니 오브리의 질문과 '지시사'에 관한 뤼스 이리가라이의 질문 그리고 제도적 관계에서의 맥락 개념에 관한 장 우리의 질문에 아주 매력적으로 대답했다. 『카이에 시스트르Cahiers Cistre』의 편집장이며 벨기에 출신의 뛰어난 교수인 로베르 조르쟁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라캉과 나눈 대화들이 두 사람의 연구에 '영향을 끼쳤다'고 밝혔다. “우리의 공동 작업은 특히 은유와 환유의 문제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은유와 환유는 우리의 토론 주제 중의 하나였던 의미론과 이것의 표현의 두 극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이론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신앙 고백에 더 가까웠다. 왜냐하면 야콥슨은 라캉의 연구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주 손님으로 지냈던 사람에 대한 호의적인 표현들을 제외한다면 그는 결코 자기 연구에서 라캉의 생각을 고려하지 않았다. 로베르조르쟁이 라캉의 작업에 대한 연구 논문집을 하나 내고 싶다며 야콥슨에게도 참여해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라캉은 이 일로 마음이 상했다.
언어가 무의식의 산물일 수 있다는 생각은 신문법학자들과 구조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아주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무의식에 관한 이들의 개념은 프로이트의 개념과는 달랐다. 예를 들어 야콥슨은 후설의 유산을 직접 이어받아 의식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다가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작용하는 직관적 지식을 설명하기 위해 잠재의식이라는 용어를 자주 이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콥슨의 반(反)심리주의적 태도 속에는 주관적 사견(私見)과 의식의 지향성에 관한 성찰이 들어 있었는데, 그의 생각은 전후의 라캉의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다. 금세기 초에 소쉬르와 테오도르 플루르누아는 엘렌느 스미스가 만들어낸 화성의 방언이라는 유명한 에피소드 속에서 언어와 무의식의 관계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후 소쉬르는 전철어구(낱말의 철자를 바꿔 만든 말. signe(기호) → singe [원숭이] -옮긴이)라고 이름붙인 시인의 은밀한 활동의 흔적들을 고대 로마의 라틴 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도 똑같은 문제에 부딪혔다. 연구 범위를 그리스의 서사시와 서정시로부터 라틴 시 일반으로 확대해나가면서 그는 전철어구들, 즉 텍스트 밑에 있는 텍스트들이 우연히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 저자의 의도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지를 연구했다. 그는 해답을 찾지 못하자 이러한 방향에서의 연구를 포기했다.
그런데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제네바에서 시작된 구조주의 혁명과 빈에서 이루어진 발견 간의 유익한 결합을 추진할 수 있는 금세기 최초의 사상가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지향성 이론과 결부된 모든 개념을 버려야 했고, 프로이트 학설의 중심에 (분열된) 주체를 재도입해야 했다. 레비-스트로스가 야콥슨을 통해 소쉬르의 저작을 접하게 된 반면 라캉은 앙리 들라크루아와 피송을 통해서 『일반 언어학 강의』를 읽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친족 관계의 기본 구조』를 통해서 자연에서 문화로의 이행으로 이해되는 상징 기능을 보편화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야콥슨과 트루베츠코이의 프라하 구조주의를 통해 라캉은 주체 이론을 포함하는 시니피앙의 논리(그리고 유일무이한 특질이라는 논리)를 세울 수 있었다. 단지 이러한 업적만으로도 그는 20세기의 위대한 이론가들의 서열에 낄 수 있을것이다.
라캉은 야콥슨에게 한없이 경탄했다. IPA와 갈등하면서 점점 프로이트주의자들에게서 내쫓기는 느낌을 받고 있던 10년 동안 라캉은 과거의 러시아에서 온 이 세계적인 대학자를 통해 젊었을 때 그를 프로이트적 혁명의 길로 이끌었던 지적 모험의 모든 신선함을 되찾았다. 이리하여 그는 정신분석이 추방당했던 동쪽으로의 방향 전환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소위 미국식 정신분석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논리적 결론이기도 했다. 그래서 1953년에 그는 귀중한 '로마 강연'을 공산주의자 뤼시앙 보나페에게 맡겼다. 그리고 9년 후에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소련에 가고 싶어했다.
스탈인의 사망 이후 '주다노프주의' 시대에 유행하던 프로이트주의에 대한 격렬한 비난은 더이상 유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소련의 심리학자들은 50년대의 파블로프식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과거에 이 이데올로기는 프로이트의 소위 정신주의를 극복했다고 주장하면서 정신분석적 학설의 모든 흔적들을 지워버린 바 있었다.
소련 여행을 계획하게 된 것은 세계를 뒤흔든 한 사건을 접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소련의 우주 비행사인 유리 가가린이 1962년 4월에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과학 혁명은 항상 사유에서 전복적인 효과를 낳는다고 확신한 라캉은 오랜 친구인 엘렌느 그라시오 알팡데리와 만났다. 그녀는 왈롱의 제자이자 프랑스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반드시 소련에 가야 해. 그들에게 말해줘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이제 모든 것을 수정해야 해. 인간이 우주로 가는 지금 소련에는 새로운 심리학이 있을 거야."
엘렌느는 1930년부터 라캉을 알았고 그녀의 딸은 주디트의 친구였다. 이 두 젊은 여성은 알제리 독립을 위해 열심히 투쟁했다. 라캉은르네 자조에게도 계획을 얘기했다. "그는 소련에 가고 싶어했다. 여행객이 아니라 초청객으로 말이다. 며칠이 아니라 여러 달 머물 계획이었다. 소련 사람들에게 정신분석이 진정 무엇인지를 말해줄 생각이었으며, 이를 위해 세미나를 개최할 생각이었다. 내가 그를 도울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러한 계획은 당연히 실패할 것이라고 짐작한 나는 그에게 그렇게 말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레온티예프가 다음에 파리에 오면 한번얘기해주기로 약속했다. 1903년 생인 알렉시스 레온티예프는 '소련 교육 과학 아카데미'의 부회장으로 모스크바 대학 심리학과 학장이었다. 확신에 찬 마르크스주의자이며 반(反)파블로프주의자였던 그는 친구인 알렉산드르 루리야와 함께 두 사람의 스승인 예프 세미오노비치 비고츠키의 이론의 복권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프랑스 동료들인 르네 자조와 폴 프래스에게 스승의 저작들 중의 일부가 프랑스어로 번역될 수 있도록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는 라캉에게 적대적이지 않았으며, 그와의 만남을 수락했다.
엘렌느는 디너 파티를 주최하는 임무를 맡았다. 실비아가 자조 부인과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레온티예프와 라캉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자조는 가가린의 우주 비행과 '우주 비행사들의 정신생리학에 관한 소련의 연구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라캉은 즉시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우주 비행사는 없습니다." 그러자 레온티예프는 라캉이 인간의 첫 우주 비행의 성공을 부정하면서 소련을 비방하려는 의도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확신하고는 분개하며 증거들을 내놓았다. 라캉은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이렇게 반박했다. "다름아니라 우주가 없기 때문에 우주 비행사는 없습니다. 우주는 지적 관점입니다." 알렉상드르 코이레의 훌륭한 제자이자 친구인 라캉은 갈릴레오의 물리학적 관점에서 우주는 조화로운 체계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했을 뿐이었다. 확실히 우주라는 말은 분명 코페르니쿠스 혁명 이전의 용어에 속했다. 자조는 오해를 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레온티예프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당신의 친구 분은 항상 이런 식으로 말합니까?" 라캉은 결코 그의 초대를 받지 못했다. 나중에 딸인 시빌이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을 때 그는 그녀를 몹시 만나러 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사교계에서는 아주 품위 있게 처신할 줄 알았던 그였지만 막상 그가 인정받고 싶어하는 과학자나 일반 교수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이를테면 탁월한 미식가인 철학자 장 이폴리트를 처음 레스토랑으로 점심 초대를 했을 때 그는 웨이터에게 겨우 '보르도 산 포도주 작은 것 한 병'(프랑스에서 가장 대중적인 술 중의 하나이다 옮긴이)을 주문했다. 더 심했던 경우도 있었다. 즉 주디트의 철학 교수 자격 구술 시험이 있던 날 그는 자기 세미나에 참석한 몇몇 학생에게 함께 보러 가자고 했다. 시험이 끝나고 주디트가 후보자 중에서 일등을 하게 되자 그는 참지 못하고 심사위원장인 조르주 캉길렘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면서 감사를 표했다. 엄격함과 성실함으로 전설적인 명성을 갖고 있었고 레지스탕스 투사이자 프랑스 대학 교육의 훌륭한 스승이었던 이 과학사가는 결코 이러한 행동을 용서하지 않았다.
라캉은 한때 교황을 만나고 싶어한 적도 있었지만 종교적 순응주의와 조금이라도 닮은 것은 어느 것이나 몹시 싫어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자기 학설에 관심을 갖도록 설득하고 싶었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어떤 공감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과거에 대해서는 마자랭을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보았다. 현재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사회민주주의를 선호했다. 젊었을 때는 반(反)의회주의와 영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숭배를, 다시 말해 정반대되는 입장을 동시에 선호했었는데, 언제나 이 입장과 비슷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관심을 갖고 있던 정치 형태는 그의 학설을 지원해줄 수 있는 정치였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도 또한 그는 항상 플라톤부터 성인 아우구스티누스와 아리스토텔레스 헤겔을 거쳐 마키아벨리까지 이르는 정치 철학사를 이용했다. 하버드에서 권력의 인격화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던 중에 라캉을 만난 장 리쿠튀르는 라캉이 그러한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라캉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제가 권력의 동기와 형태들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연구한 적이 있었습니까?").
1954년에 그는 마들렌느 샵살을 통해 프랑수아즈 지루를 알게 되었다. 지루 역시 장자크 세르방-슈라이버의 『렉스프레스』지의 동인이었다. 그들은 곧 좋은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지루는 레비-스트로스의 권유로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와의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피에르망데스 프랑스는 이미 레비-스트로스를 알고 있었다. 언젠가 그가 자기 가족에 관한 자료를 찾고 있었을 때 이 인류학자가 벼룩 시장에 함께 동행해주었던 것이다.2) 식사 동안 내내 라캉과 레비-스트로스는 말이 없었다. 반면 부인들은 평소처럼 얘기를 나눴다. 식사가 끝날 무렵 프랑수아 모리악과 세르방-슈라이버가 나타났다. 아마 신문사에서 일하다 오는 것 같았다. 프랑수아즈 지루는 이렇게 말한다. “라캉은 망데스 프랑스에게 매혹되었다. 그들은 이때 딱 한 번 만났을 뿐이다. 라캉의 흥미를 끈 것은 젊은이들에 대한 망데스의 이상한 마력, 그의 카리스마였다." 식사가 끝나자 망데스는 라캉과 레비-스트로스의 침묵에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프랑수아즈에게 말했다.
라캉이 당시 변호사였던 롤랑 뒤마와 진실한 우정을 맺은 것도 바로 이때였는데, 그는 나중에 프랑수아 미테랑이 이끄는 사회당 정부에서 장관이 되었다. 그는 로랑스 바타이유가 법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을 때그녀의 변호인이었고, 그후 1962년 7월에 조르주 바타이유가 급사하면서 주디트의 친자확인 소송을 내기로 결정했을 때도 조언자가 되었다. 소송은 결국 승소했다. 이날은 동시에 라캉이 고등사범학교에서 처음으로 「파문」을 주제로 취임 강연을 한 날이기도 했다. 이처럼 정말 우연한 기회들을 통해 그는 딸의 합법적인 아버지가 되는 동시에 IPA를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고등사범학교에서 강의를 할 수 있게 되기도 했는데, 이 강의에 그는 '프로이트' 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는 그의 이름을 가진 학설의 전달 장소였다. 그가 1월 15일에 새로운 청중 앞에서 강의를 시작한 뒤산느 강의실에는 장차 사위가 될 자크-알랭 밀레가 있었다. 그는 아직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았다. ENS의 훌륭한 철학자인 그는 1966년 11월 12일에 기트랑쿠르에서 주디트와 결혼하게 된다. 그래서 주디트는 겨우 2년 동안만 아버지의 성을 합법적으로 갖게 된다. 이후에는 주디트 밀레라고 불리게 된다.)
라캉은 롤랑 뒤마 외에도 가스통 드페르와도 친구가 되었다. 라캉은 조르주 베르니에를 통해 마르세이유에서 그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전쟁이 끝나갈 무렵 릴 가에 있는 실비아의 집에서 얼마 동안 머물렀다. 소설가인 그의 아내 에드몽드 샤를루는 이렇게 쓰고 있다. “가스통 드페르는 개인적으로 라캉과 아주 가까웠다.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함께 여름 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가스통 드페르는 라캉에게 수상 스키 타는 법을 가르쳐주려고 애쓰기도 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확실히 이 이상한 우정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알제리 사건 동안에 이우정은 더욱 두터워지면서 새로운 국면에 이르게 되었다."
라캉이 루아요몽에서 최초로 주체의 구조를 공식화한 시기와 본느발에서 한편으론 장 라플랑슈와 다른 한편으로는 메를로-퐁티와 논쟁하던 시기 사이에 아버지인 알프레드 라캉이 사망했다. 87세의 이 노인은 1960년 10월 15일에 동맥류 파열로 고통 없이 눈을 감았다. 며칠후 시신은 블로뉴-쉬르-세에서 샤토-티에리로 옮겨져 그곳에 있는 가족묘지에 매장되었다. 그곳에는 이미 에밀리 보드리와 친가쪽 조상들 대부분이 묻혀 있었다. 에밀 라캉과 부인인 마리 쥘리 드소만 빠져있었다.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차를 몰고 가던 라캉은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가다 경관에게 잡히는 바람에 장례식에 늦게 도착했다. 장지에는 말루의 아이들이 평상복 차림에 검은 상장(章)을 달고 있었다. 역시 상복 차림을 한 주디트는 얼굴에 장례식용 베일을 쓰고 있었다. 라캉은 알프레드의 아들로서 다시 한번 자식의 도리를 했던 것이다.
폴 클로델의 쿠퐁텐 삼부작에 나오는 부모 살해 문제를 부분적으로 다룬 이해의 세미나에서 그는 자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떠한 암시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7개월 후 메를로-퐁티의 무덤 앞에서는 눈물을 흘렸다. 1961년 5월 10일에 그는 세미나 청중들에게 이 철학자의 죽음을 감동적으로 언급했다. “그의 죽음은 저에게 큰 불행이었습니다. (・・・・・・) 그의 죽음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의 정신과 생각들을 서로 접근시킬 수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 그는 항상 제 바람과는 달리 - 제가 선생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기를 바랐습니다.""
메를로-퐁티는 분명 라캉의 언어 이론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망하기 이틀 전 그는 기트랑쿠르에서 은방울꽃을 따며 달콤한 하루를 보냈다. 그는 미국으로부터 막 초대를 받았고, 모리셔스 섬에도 가볼 생각이었다. 마들렌느 샵살은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63번 버스의 뒤쪽 플랫폼에 서 있는 그의 실루엣이다. 라캉이 선물한 은방울꽃을 단추 구멍에 단 채 그는 나를 향해인사의 표시로 손을 흔들었다.
1957년 5월에 『렉스프레스』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라캉은 '쥐 인간'에 관한 논평에 대해서는 얘기했지만 1955~56년도 세미나 주제였던 59) 그 다니엘 파울 슈레버 판사의 사례에 대한 해석은 언급하지 않았다. 러나 정신병 일반과 특히 편집증에 관한 이 고찰에서 그는 '폐제(forculsion)' (라캉이 프로이트의 Verwerfung의 번역어로 선택한 폐제 forclusion)란 원래 법률 용어로, 일정한 법정 원인이나 피상속인의 청구로 상속순위에 있는 추정 유산 상속인의 자격을 법원의 판결에 의하여 폐지하는 일을 옮긴이)라는 중요한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이것은 그의 두번째 구조적 재해석의 일부가 된다. 이 용어는 이 학기의 마지막 시간인 1956년 7월 4일자 강의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가리킨다 -
나는 이미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정신분석의 역사 속에 그리고 다음에는 라캉 본인의 담론 속에 최초로 출현하게 되는 배경을 자세히 살펴본 바 있다. 이 용어는 1895년에 이폴리트 베른하임이 마취 후 환자의 지각 영역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지각 작용의 부재를 설명하기 위해 부정적 환각 개념으로 이것을 소개한 이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프로이트도 이 개념을 사용했지만 1914년에 정신병과 신경병 그리고 성도착증을 거세 이론의 범주 안에서 새롭게 분류하게 되면서 1917년부터는 더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이때 그는 억압된 것이 주체에 의해 부정적인 방식으로 인식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언어의 메커니즘을 Verneinung(부정)이라고 이름붙였다. “당신은 꿈속의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 어머니는 아니다." 하지만 아마 어머니일 것이다. 이 용어는 1934년에 프랑스어로 négation으로 번역되었다.
이 메커니즘 외에도 프로이트는 부정적 지각의 현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주체의 태도를 가리키기 위해 Verleugnung(부인)이라는 용어도 함께 사용했다. 가령 여성의 경우 페니스의 부재를 발견할 때 그러한 사실을 부인한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부정'이 신경병 형태의 메커니즘을 표현한 반면 '부인'은 성도착증에 특징적인 메커니즘을 표현했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피숑이 주체가 기억 혹은 의식으로부터 불쾌한 어떤 사실을 사라지도록 하는 무의식적 메커니즘 혹은 무분별하게 만들기를 설명하기 위해 '스코토미자시옹’(scotomisation, 괴로운 생각을 의식에서 사라지게 하기)라는 용어를 내놓았다. 1925년에 라포르그와 프로이트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 것은 바로 이 용어 때문이었다. 라포르그는 Verleugnung과 정신병 일반, 특히 정신분열증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억압 메커니즘을 모두 '스코토미자시옹'으로 번역할 것을 제안했다. 프로이트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Verleugnung과 Verdrängung(억압)을 대립적인 개념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라포르그의 제안은 지각의 무효화, 다시 말해 폐쇄라는 적극적인 심리 현상이라는 상황을 가리키는 반면 프로이트의 제안은 지각을 부정성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즉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에 대한 지각의 폐쇄가 아니라 부인을 통한 지각의 실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논쟁은 두 사람 모두 정신병에 특징적인 거부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한 적절한 용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라포르그는 탈부정화를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려 했고 프로이트는 이 메커니즘을 부인과 억압 사이에 위치시키면서 이 문제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28년에 피숑은 피에르 자네의 잡지에 프랑스어에서 부정의 심리학적 의미 작용이라는 유명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제 임상적 실천에서 벗어나 언어에 몰두하게 된 그는 사법 용어에서 '포르클뤼지프(forclusif, 소권 상실)'라는 용어를 빌려왔다. 그리고 프랑스어에서 부정을 의미하는 두번째 문장 요소는 화자가 더이상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태에 적용된다고 설명했다. 이 사태들은 말하자면 '권리를 상실한' 것이다. 피숑과 그의 외삼촌인 다무레트는 『악시옹 프랑세즈』의 두 회원과 관련해 이러한 주장을 아주 유머스럽게 보여주었다. 1923년 8월 18일자 『주르날』지에는 에스테라지의 죽음에 관한 어느 기자의 이런 글이 실렸다. "그(에스테라지)는 이렇게 말한다. '드레퓌스 사건은 이제 덮인 책이다.' 그는 그것을 언젠가 열어보았던 것을 후회할 것이다.” 다무레트와 피숑은 '후회하다(se repentir)'라는 동사의 사용은 실제로 존재했던 사실이 감정적으로는 과거로부터 확실히 배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피숑의 말에 따르면 '스코토미자시옹'을 '포르클뤼지프'에 접근시키게 된다. "프랑스어에서 포르클뤼지프는 스코토미자시옹을 향한 욕망을 표현한다. 따라서 스코토미자시옹은 정상적인 현상을 나타낸다. 그런데 라포르그 선생과 우리들 중 한 명이 정신병리학의 용어로 설명한 스코토미자시옹은 이 현상을 병리학적으로 과장한 표현이다.” 이 두 사람은 여기서 Verneinung의 메커니즘을 고려에 넣지 않았다.
따라서 1954년 2월 3일 이전까지는 전과는 다른 용어와 새로운 영역, 즉 현상학과 관련해 이 논쟁이 부활하지 않게 된다. 당시에는 아직 프로이트와 라포르그의 왕복 서신이 발표되지 않았고, 라캉도 스코토미자시옹을 폐제로 '대체하지 않았다. '부정'이라고 번역한 Verneinung의 메커니즘을 이용해 이 문제에 접근했던 장 이폴리트와의 토론에서 라캉은 메를로-퐁티의 『지각 현상학』에 비추어 이 문제를 재고찰했다. 특히 메를로-퐁티가 환각을 주체의 지향성에 포함되는 '실재의 해체 현상'으로 규정한 대목을 중시했다.
'늑대 인간'을 분석하고 있는 한 대목에서 프로이트는 거세에 대한 자기 환자의 인정과 부인이 '거부(Verwerfung)'로 특징지을 수 있는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거부는 환자가 성을 순전히 어릴 적의 가설, 즉 항문 성교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이런 주장을 좀더 명확히 하기 위해 세르게이 판케예프가 어렸을 때 체험한 시각적 환각을 상기시켰다. 세르게이 판케예프는 주머니칼에 의해 새끼손가락이 잘려진 것을 보았다. 그러나 곧 전혀 상처가 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표상되는 현실의 거부는 억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eine Verdrängung ist etwas anderes als eine Verwerfung(억압은 거부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라캉은 1954년에 이폴리트와의 대화에서 이 텍스트를 읽으면서 Verwerfung를 'retranchement(삭제)'로 번역했다. 2년 후에 그는 신경병과 정신병을 구분하는 프로이트의 입장을 받아들여 여기에 라포르그와 피숑의 용어를 적용하는데, 이에 따르면 정신병에서 현실은 결코 의식에서 실제로 사라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슈레버 판사의 편집증에 대해 길게 주석을 붙인 후 결국 Verwerfung를 ‘폐제'로 번역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이것이 정신병 일반에 특수한 메커니즘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정신병은 편집증이라는 관점에서 규정되며, 기본적 시니피앙(아버지의 이름)을 주체의 상징적 세계로부터 본원적으로 추방시키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 폐제라는 용어를 억압과 구분하면서 폐제의 경우 말소된 시니피앙 또는 표상하는 시니피앙들은 주체의 무의식 속에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환각이나 망상의 형태로 현실 속에 되돌아오거나 주체의 말이나 지각에 침입해 들어온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처럼 이 개념이 걸어온 여정은 참으로 독특하다!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해 한 문법학자가 스코토미자시옹이라는 병리학적 과정을 일반 언어로 번역하면서 고안된 이 용어는 1956년에 라캉의 강연에서 다시 나타났다. 라캉은 프로이트에 대한 두번째의 구조적 재해석의 틀 안에서 프로이트가 슈레버의 편집증이 아니라 판케예프의 유아기 신경병에서 발견한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이 개념을 이용했다. 라캉은 용어라는 측면에서는 피숑의 진영에 남아 있었지만 언어학에 기대 시니피앙의 궤도를 여기에 포함시켰다. 라포르그에게 승리한 대가로 그는 한 과정(폐제'라는 의미에서의 Verwerfung)의 발견과 함께 프로이트가 발견하지도 또 발명하지도 않은 한 개념(Verwerfung)의 발명을 프로이트의 공로로 돌렸다.)
폐제 개념의 정교회는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이론적 정교화와 관련되어 있었는데, 이미 1953년부터 사용되어오던 이 개념은 1956년 6월 27일에 와서야 하나의 개념으로 공식화되었다. 또한 '대타자'와 '대상'라는 두 용어도 최종적으로 확립되었다. 전자는 1955년 5월 25일에 처음으로 소개된 반면 후자는 이미 1936년부터 사용되어오고 있었지만 이때부터 이항적 형태로, 즉 A/a로 자리잡게 되었다. 라캉은 '로마 강론'에서 처음 규정한 대로 무의식을 '타자의 담론'으로 보다가 두 번째 재정식화 단계에서는 무의식을 '대 타자의 담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한편 상상적 나의 장소인 대상 a는 실재와 비상징적인 것 사이에 남겨진 잔여로 정의되었다. 즉 결핍과 욕망의 원인으로서의 대상이 된 것이다.2) 라캉은 나를 버려질 어떤 것의 위치로 실추시키기 위해 이때 조르주 바타이유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이종학(異種學)에 의지했다. 그것은 이제부터 라캉의 구조가 레비-스트로스가 그토록 의심했던 초월성이라는 형태로 신을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보증해주었다.
하지만 A/a라는 이항적 대립을 파악하려면 먼저 이상적 나(Ideal-Ich)63)와 나의 이상형(Ich-Ideal)을 구분해야 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프로이트의 위상학 체계에는 이러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프랑스어로는 'moi-idéal'로 번역되는 Ideal-Ich는 유아기의 나르시시즘 모델에 고착된 주체의 나르시시즘적 전능의 이상을 가리키는 신체 내부의 한 형성물로 정의되었다. 프로이트에 이어 1932년에는 헤르만 눈베르크가 이 개념을 세분해 '이상적 나'를 '초자이(surmoi)' 이전의 형성물로 만들었다. 그는 주체는 발달하면서 나르시시즘적 이상을 포기하게 된다고 말했다. 물론 특히 정신병의 경우에서처럼 다시 거기로 돌아가기를 열망하
지만 말이다. 눈베르크의 글을 읽던 라가는 라캉과 거의 동시에 이러한 구분법을 채택해 1958년에 루아요몽에서 열린 인성에 관한 콜로키움에서 이것에 이론적 형태를 부여한다.
다른 한편 1954년 3월에 라캉은 나르시시즘을 둘러싼 프로이트와 융의 논쟁으로부터 시작해 그리고 물론 눈베르크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채 자기 식대로 '이상적 나'와 '나의 이상형'을 구분했다. 그에 따르면 '이상적 나'는 상상적 질서에 속하며 거울 단계에서 기원하는 나르시시즘적 형성물이며, '나의 이상형'은 주체와 타자들과의 관계 전체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해주는 상징적 기능으로 규정되었다. 이처럼 A/a라는 이원론의 도입은 '이상적 나'와 '나의 이상형'이라는 이원론이 탄생한 산물이었다. 이 체계에 라캉은 모든 근친상간을 자연에서 문화로의 이행으로 바라보는 레비-스트로스의 구분법을 재도입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분을 통해 문화의 대표자이며 법의 화신으로서의 아버지의 상징적 기능과 자연의 질서에 종속되며 결핍된 페니스의 남근적 대상처럼 자식에게 몰입하도록 운명지어진 어머니의 상상적 위치를 대비시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단계를 자연에서 문화로의 이행기로 바라보는 라캉의 생각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인간 사회가 언어(대 타자, 시니피앙)의 우위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이야기는 결국 아버지라는 극이 모든 주체의 역사적 구조화에서 비슷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라캉은 프로이트에 대한 첫번째 재해석 단계에서는 이러한 자리를 아버지의 기능으로 규정했다가 다음에는 상징적 아버지에 대한 기능으로, 다시 그후에는 아버지의 은유로 규정했다. 그리고 두번째 재해석 단계에서는 결국 이러한 기능 자체가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개념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 개념의 정교화 역시 시니피앙 이론의 확립과 관련해서 이루어졌으며 또 폐제라는 용어를 하나의 개념으로 사용하기 일 주일 전인 1956년 6월 20일에도 분명히 강조했듯이 폐제라는 개념에 대한 이론적 정식화와도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라는 기능은 (・・・・・・) 시니피앙의 범주 없이는 절대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자연으로부터 문화로의 오이디푸스적 이행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즉 자식에게 자기 성을 붙이기 때문에 시니피앙의 화신이 되는 아버지는 아들에게는 어머니를 빼앗아가는 자로, 따라서 나의 이상형이 생기게 해주는 자로 작용하게 된다.
프로이트의 연구에 대한 이러한 인류학적인 번역 과정에서도 라캉은 가족사를 반쯤은 은폐하는 방식을 그대로 사용했다. 남동생인 마르크-프랑수아의 소중한 기억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아버지의이름이라는 개념이 발생하게 된 기원을 라캉의 할아버지인 에밀 라캉이 가족의 계보 안에서 차지했던 위치에서 찾을 수 있다. 라캉은 평생 '아주 어릴적부터 신을 저주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해준 그 끔찍한 인물을 증오했다. 출생 증명서에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본 딴 라캉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는 할아버지가 아버지 알프레드에게 너무 폭군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 역할에 무능하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이처럼 무서운 할아버지에게서 자란 아버지 알프레드는 다정다감하고 헌신적이고 선의로 충만한 아버지였지만 큰아들의 지적 재능에는 최소한의 관심도 보일 수 없었으며, 장남을 그저 변덕스럽고 책임감 없는 아이로 생각했을 뿐이다.
라캉이 1938년에 서양 사회에서 아버지 이마고는 불가피하게 쇠퇴할 수밖에 없다고 언급했을 때 그는 바로 아버지 알프레드의 취약한 위치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1953~63년 사이에 아버지의 상징적 기능의 재평가에 기초한 구조 체계를 만들어 내면서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아버지 위치의 쇠퇴로부터 출발해 그는 아직도 에밀, 즉 아버지의 아버지의 모습이 불러일으키는 공포로부터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알프레드에 관한 모욕적인 회상에 자신의 부성 체험을 덧붙였다. 딸에게 자기 성을 붙여줄 수 없는 점에 죄책감을 느끼면서 말로 하는 행위, 즉 호명만이 아버지가 자식을 인정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생각을 이론화했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내 이름, 사적이든 공적이든 내 이름으로 나 자신에게 말을 걸면서 나 자신에게 말했다. 결국 라캉, 네 딸이 벙어리가 아닌 것은 이 때문이다. 네 딸이 네 딸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벙어리라면 그 아이는 결코 네 딸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니엘 파울 슈레버는 1842년 7월에 독일의 부르주아 프로테스탄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판사, 의사, 학자, 교육자 등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아버지인 다니엘 고트로프 모리츠 슈레버 박사는 위생학, 정형술, 체육, 일광 요법에 기반한 엄격한 교육 이론의 창안자로 유명했다. 인간 본성에 의해 저질러지는 잘못들을 교정하려고 노력했던 그는 사회 전반의 타락을 치료하고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완벽한 존재, 즉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을 가진 존재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교육서들에서는 야만적인 도구를 사용해 어린이들에게 바른 자세를 갖도록 가르칠 것을 권했다. 독일 정신을 고양시키는데 열성적이었던 다니엘 고트로프는 노동자들을 위한 주택에도 정원을 조성할 것은 주창했다(이러한 정원은 아직까지도 슈레버 정원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옮긴이). 이러한 제안은 처음에는 사회 민주주의의 지지를 받다가 다음에는 수정주의적인 것으로 비난받았고 결국 나치에 의해 수용된다. 그는 사다리가 머리에 떨어지는 사고가 있은 지 3년 후에, 그리고 비스마르크가 권력을 장악하기 직전인 1861년에 궤양이 터져 사망했다. 그의 나이 53세였고, 마지막 저서가 될 『독일 국민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을 위한 교육자이자 안내자와 같은 가정의 친구. 가정의 행복, 국민의 건강, 고결한 인간의 육성을 위하여』를 막 끝낸 상태였다.
그의 아들인 다니엘 파울 슈레버가 비스마르크가 격찬한 도덕 질서를 대변하는 보수당 후보로 선거에 출마한 것은 1884년이었다. 그는 명망 있는 법학자이자 삭소니 지방의 항소심 판사였다. 그는 이 지역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던 사회민주당 후보에게 패했다. 바로 이때 첫번째 정신 장애가 나타났다. 그는 신경과 의사인 파울 플렉시히에게서 치료를 받았다. 그는 두 번이나 요양원에 장기간 입원했다. 1893년에 그는 드레스덴의 항소심 판사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7년 후에는 공직 취임이 금지되고 금치산자로 선고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어느 신경병 환자의 회고록』을 쓰게 되는데, 이것은 1903년에 발표된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경험한 망상과 환각들을 이야기했다. 이 책 덕분에 그는 정신병원에서 나올 수 있었고 재산도 되찾았다. 그가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광기가 감금하기 위한 법적 이유가 될 수 없음을 법원에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10년 4월에 그는 4년 전에 다시 입원했던 라이프치히의 한 요양소에서 사망했다. 1910년 말에 프로이트는 슈레버가 죽은 사실을 모른 채 1903년에 발표된 슈레버의 자서전에 입각해 그의 사례에 대한 주석을 쓰기 시작했다.) 이자서전에는 화자의 가족에 관한 한 장(章)의 절반 부분이 빠져 있었다. 편집자들이 출판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해 빼버린 것이다.
슈레버의 『회고록』은 신에게서 박해당하는 인간의 독특한 광기 체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위도 방광도 없이 살았고, 가끔 '자기 후두喉頭)를 먹어치우기도 했던 그는 세계의 종말이 가까웠고,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해치워진 인간들의 망령인 환자와 간호원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는 자기뿐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신은 그에게 '신경 언어'나 '태초의 언어'로 말을 했다. 그리고 그에게 타락한 인류의 잔해 위에 새로운 종족을 낳기 위해 여자로 변신할 것을 명했다. 슈레버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와 신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의 영혼은 '신경'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신은 신경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신과 하늘은 친밀하고 감각적인 관계들로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신경은 죽음 이후 정화되어 신에 의해 '하늘의 입구'로 모이게 되며 신은 '빛'을 통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 슈레버는 이러한 '빛'에 의해 끊임없이 갱생하게 되어 불멸의 생을 부여받았지만 '기적을 받은'새들에게 박해를 받았다. '하늘의 입구의 파편들로 만들어진 이 새들은 시체의 독으로 채워진 후 그를 향해 날려보내졌다. 새들은 그에게 '인간의 옛 영혼이라는 매혹적인 유물도 전달했다. 그리고 여성으로 변신해 신에 의해 임신되기를 기대하면서 그는 신의 박해도 태양을 향해울부짖으면서 견뎌냈을 뿐만 아니라 플렉시히 박사가 선동한 사악한 음모, 즉 그를 성적으로 악용한 후 곧 갈가리 찢긴 그의 몸을 부패하게 만든 이 '영혼의 살해자'의 음모도 이겨냈다.
프로이트는 당시의 여느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소위 정신적 질병들의 기원을 찾아내려고 고심하면서 슈레버의 언어와 함께 망상 속에서 위대한 신비주의자들의 대화를 그대로 들려주고 있는 이 미친 화자의 기묘한 이야기에 매혹되었다. 프로이트가 이 텍스트에 매료된 이유는 당시 그가 종교의 기원에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곧 『토템과 터부』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 사례 연구를 통해 그는 편집증을 정신분열증에 대한 새로운 규정 속에 포함시키려고 했던 블로일러와는 반대로 일관되고 확고한 편집증의 병리학을 제시하게 된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융과 단절하는 계기가 된 빈 학파와 취리히 학파 간의 논쟁에서 프로이트는 정신병의 구성에 정신분석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했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편집증 정신병의 모델로 보았다.
그는 고전적 방법에 따라 과대망상, 피해망상, 색광증, 질투 등의 망상들을 편집증에 포함시켰다. 또한 동성애에 대한 방어와 함께 광인이 자신에 대해 갖게 되는 망상적인 생각은 이 광인의 광기를 설명하기 위해 임상가가 구성해내는 합리적인 지식만큼이나 진실일 수 있다는 생각을 여기에 덧붙였다. 그러나 후자만이 이론적 지위를 갖게 된다. 그런데 일년 전에, 즉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관한 연구서를 쓸 때 프로이트는 동성애에 대한 접근 방식을 구상하게 되는데, 이것은 슈레버 사례를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는 같은 해에 알프레트 아들러와 결별하면서 편집증적 인식을 동성애의 카텍시스(Besetzung, Investissement), 이론적 인식을 이러한 카텍시스에 대한 거부와 연결시켜볼 생각을 하게 된다. 아들러와의 결별로 그는 빌헬름 플리스와 이별할 때의 고통을 다시 한번 겪게 되었다. 이 때문에 프로이트는 1910년 10월자로 산도르 페렌치에게 보내는 편지와 같은 해 12월에 융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 유명한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플리스와의 일의 경우 이제 그럴 필요는 사라졌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동성애적 카텍시스에 끌려 들어가 그것을 내 자아를 확장하는 데 이용했지. 나는 편집증 환자가 실패한 바로 그곳에서 성공한 셈이지. (......) 한때 친구였던 플리스는 나에 대한 모든 애정을 청산한 후 대단한 편집증 사례를 발전시켰네. 그것은 분명 대단한 것이었다네. 나의 이 생각[편집증이 동성애적 요소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그에게 빚진 것이라네."
프로이트는 슈레버 아버지의 교육 이론을 면밀히 조사한 후 그가 얼마나 폭군이었는지를 여러 번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그는 또 아들이 『회고록』에서 아버지는 시체들만 연구했다고 비난하면서 그의 의학 기술을 맹렬히 풍자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교육관과 아들의 편집증적 망상을 조금도 연관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편집증적 망상과 인간 본성의 변화를 목표로 하는 엄격한체계 간의 유사성에 주목하고 있었다. 정신병에 관한 이처럼 새로운 이론의 맥락에서 그는 먼저 신을 향한 슈레버의 울부짖음을 아버지에 대한 반항의 표현으로 보았고, 억압된 동성애를 망상의 근원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것을 편집증의 기본 메커니즘으로 보았다. 또한 망상의 발생을 질병의 시작이라기보다는 회복의 시도로 보았다. 다시 말해 아버지(그리고 남동생)의 상실을 위로해줄 아들을 갖지 못한 슈레버가 신으로 변모한 아버지의 이미지와 화해하려고 시도했던 것처럼 보았다. 프로이트는 신의 모습 속에서의 이러한 회복과 변모를 차라리 긍정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아버지 콤플렉스의 결과로 바라보았다. 다시 말해 그가 보기에는 늙은 고트로프 박사는 가정의 폭군이었던 만큼이나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1955년 가을에 일 년 내내 슈레버 판사의 『회고록』에 주석을 붙이고 있었을 때 편집증에 대한 라캉의 입장은 1911년의 프로이트의 입장과는 크게 달랐다. 1932년의 박사학위 논문과 파팽 자매에 관한 글에서 그는 여성 편집증에서 나타나는 동성애적 요소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프로이트주의에 대한 두번째 구조적 재해석 단계에서는 이 문제가 전혀 다른 식으로 제기되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편집증적 지식이라는 개념을 언급하면서 30년대라는 시기와 프랑스의 정신의학사에 여자 정신병 환자인 에메의 사례 발표가 얼마나 커다란 충격을 주었는지를 상기시켰다. 그는 스승들인 클레랑보, 세리외, 카프그라 등의 이름을 거명했고, 체질론을 비판했다. 그리고 당시 널리 읽히고 있던 슈레버 연구서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글로버의 제자로서 BPS에 반대하는 이다 매칼파인과 리처드 헌터의 글도 참조했다. 이들은 이제 막어느 신경병 환자의 회고록』을 영어로 번역하고 서문을 썼다. 어머니(이다)와 아들(리처드) 관계인 이 두 저자는 프로이트가 아버지의 교육이론들에서 뭔가를 추론해내는 것을 소홀히 했음을 지적하면서 슈레버의 편집증에 대한 클라인 식의 해석을 제시했다. 즉 이들에 따르면 미분화한 리비도의 원초적 단계로 심하게 퇴행함으로써 출산에 대한 어릴 적 환상들이 부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라캉은 프로이트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프로이트적인 문제들을 바꾸어놓았다. 그는 편집증을 동성애에 대한 방어가 아니라 아버지 기능에 대한 구조적 의존(성)으로 보았다. 이리하여 그는 아버지의 교육이론과 아들의 광기 간의 연결 관계를 살펴보려면 슈레버 아버지의 글들을 실제로 읽어볼 것을 제안하게 된다. 하지만 라캉은 아버지 위치의 우위성을 주장하기 위해 동성애적 요소의 우위성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또한 그는 망상적 지식과 이성적인 지식 간의 유사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도 바꾸어놓았다. 망상적 지식을 동성애적 카텍시스에 연결시키고 이성적 지식을 이러한 카텍시스에 대한 거부와 연결시키는 해석 대신 그는 1932년부터 머릿속에서 구상해온 광기의 계보에 대한 생각을 이용했다. 바로 아무나 맘만 먹으면 미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광인이란 광기에 대해 너무나 정확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유의 한계로서 자기 내부에 갖고 있는 진리로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가설을 다시 끄집어냈던 것이다.
1953년의 위상학의 맥락 속에서 그리고 프로이트주의에 대한 두번째의 구조적 재해석을 통해 라캉은 편집증에 관한 자신의 해석과 프로이트의 해석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이어서 이러한 수정의 결과를 정신병 일반의 영역으로까지 확대시켰다. 그는 편집증이 정신병의 모델이라는 확신을 프로이트와 공유했다. 1955~56년에 이루어진 이러한 수정을 통해 라캉은 폐제와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도출해냈다. 이 개념들은 야콥슨에 대한 연구를 통해 새로운 시니피앙 이론이 점차 정교화되면서 만들어진다. 이러한 수정 덕분에 그는 슈레버의 편집증을 아버지의 이름의 폐제라는 라캉적 용어로 규정할 수 있었다. 즉 다음과 같은 연쇄고리가 만들어지게 된다. D. G. M. Schreber의 이름, 다시 말해 인간 본성의 개혁을 목표로 하는 교육 이론들을 통해 아버지로 구현된 원초적 시니피앙의 기능은 아들의 상징적 세계에서 거부(폐제)되고, 화자의 담화 속에 들어 있는 망상적 실제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라캉은 이처럼 추상적이고 복잡한 공식을 통해 이전에 『어느 신경병 환자의 회고록』에 대해 프로이트를 포함한 모든 주석가들이 제기했던 문제를 천재적인 방식으로 해결했다. 이들도 모두 아버지의 교육관과 아들의 망상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주목했지만 라캉이 처음으로 이러한 관계를 이론화했고 미친 화자의 자전적 망상 속에서 이것의 작용 방식을 명확히 설명했다. 슈레버는 D. G. M. Schreber의 이름, 즉 아들의 회고록』이나 '기억(Gedächtnis)'에서 제외되거나 폐제된 아버지의 이름이 표지에 적혀 있는 교육 입문서들에서 권하고 있는 각종 장비들과 이상하게도 빼닮은 각종 고문 기구들로 가득찬 세계를 그려 보였던 것이다.
라캉은 프로이트주의 역사의 개념 체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는 생각과 함께 언제나처럼 말로 된 자기 학설이 표절되거나 오해되지나 않을까 두려워 1955~56년 세미나의 개요를 종합하는 글을 하나 써서 정신병을 주제로 다룬 『정신분석』지 4호에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 '정신병의 모든 가능한 치료에 전제가 되는 하나의 예비적 문제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붙였고, 작성 날짜를 1957년 12월~1958년 1월로 명기했다. 그는 슈레버 가족을 연구한 최초의 프랑스인이었으며, 그가 편집하는 '프로이트의 장(場)' 시리즈에 『어느 신경병 환자의 회고록』의 최초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포함시켰다.
프로이트가 블로일러와 융과 논쟁하면서 또 플리스와 결별하면서 편집증을 이론화했다면 라캉은 자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체험한 내밀하고 공포스런 경험을 이론 수립에 이용했다. 그가 슈레버 아버지의 교육 이론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이고 열정적인 관심에서 우리는 분명 한편에서는 자기 아버지와 할아버지 간의 관계,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 어머니와 친가쪽 여자들 간의 관계의 장면들이 어린 시절에 불러일으켰던 공포스런 회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슈레버의 회고록에 대한 라캉의 훌륭한 해석이 얼마나 폭군적인 아버지와 모욕당한 아버지간의 변증법, 즉 이미 헤겔에게서 빌려온 변증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는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부터 라캉의 구조주의 시대의 바로크풍의 두 가지 개념, 즉 폐제와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