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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솔 Bin Sole Dec 27. 2024

욕망하는 식물

승자는 감이냐 밤이냐?

인간 욕망에 도구화된 식물 유전학

식물 유전학은 형질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어떻게 전달되는지 연구하는 학문이다. 각 식물은 특정 형질에 대한 지침을 담고 있는 DNA 조각인 유전자 세트를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유전자는 꽃의 색깔부터 나무의 키까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식물 유전학에서 가장 흥미로운 측면 중 하나는 변이 개념이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식물도 한 종 내에서 다양한 형질을 나타내는 변이는 모 식물로부터 전해지는 다양한 유전자 조합의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 덕분에 식물은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고 다양한 조건에서 번성할 수 있다.

유전자는 식물이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형질에 대한 지침을 담고 있다. 이러한 특성에는 꽃 색깔, 키, 잎 모양과 같은 물리적 특성과 질병 저항성 및 영양소 흡수와 같은 생리적 특성이 포함될 수 있다. 식물 유전학 연구는 식물의 전체 DNA를 매핑하고 염기서열을 분석하는 유전체학 분야도 포함한다. 유전체학의 발전은 식물 생물학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혁신적으로 변화시켰으며, 과학자들은 바람직한 형질을 담당하는 특정 유전자를 식별하고 농업 및 생태학적 목적을 위해 이를 조작할 수 있게 되었다. 식물 유전학의 힘을 활용하면 지속 가능한 농업에 기여하고, 식물 질병을 퇴치하며, 식량 안보를 강화할 수 있다. 

디옥시리보핵산의 약자인 DNA는 모든 생명체에서 발견되는 유전 물질이다. 세포의 발달과 기능에 대한 청사진 역할을 하며, 식물 유전학의 신비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아마존 열대우림의 무성한 녹지에서부터 토스카나의 드넓은 포도밭에 이르기까지 식물은 놀라운 다양성을 보여주는데, 이는 식물의 복잡한 DNA 덕분이다.식물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신체적 특징과 특성을 결정하는 DNA를 가지고 있는데데 여기에는 성장과 발달에 대한 지침이 담겨 있으며, 잎 모양과 꽃 색깔부터 질병 저항성과 수확량 잠재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식물 DNA는 또한 식물 종의 진화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과학자들은 다양한 식물의 DNA 염기서열을 비교하여 계통도를 재구성하고 수백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조상을 추적할 수 있다. 이러한 지식은 식물 생물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뿐만 아니라 보존 노력과 지속 가능한 농업 관행의 개발에도 도움이 된다. 

식물 육종의 흥미로운 측면 중 하나는 다양한 식물 품종에서 바람직한 형질을 결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연구자들은 선택적 교배를 통해 식물의 유전적 다양성을 활용하여 양쪽 부모의 가장 좋은 형질을 가진 잡종을 만들 수 있다. 이 기술은 질병에 더 잘 견디고, 다양한 기후에서 잘 자라며, 영양 성분이 향상된 작물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식물 육종에 사용되는 또 다른 기술은 식물의 유전자를 직접 조작하는 유전 공학인데, 이 방법을 통해 과학자들은 해충에 대한 저항성이나 제초제에 대한 내성 같은 특정 형질을 식물의 게놈에 도입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CRISPR-Cas9과 같은 도구의 등장으로 전례 없는 정확성과 효율성으로 식물 게놈을 편집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인간들은 식물 유전학이라는 영역을 개발하여 인간의 욕망 충족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인간 욕망 충족에 보탬이되는 식물은 보다 풍성하게 유전자를 조작하고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욕망하는 식물

식물은 자연 속의 연금술사이다. 이들은 물과 흙과 햇빛을 수많은 소중한 물질로 바꾸는 마법사다. 그런데 식물은 왜 이런 화학물질들을 만들어야 했을까?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는 우선 외부의 적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필요성을 들 수 있다.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습득한 능력으로 식물이 생성하는 화학물질들 가운데 매우 많은 것들이 다른 생물체가 자기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치명적인 독과 악취, 흥분제 등을 동원해 자신을 약탈하려거나 짓밟으려는 다른 생물체의 감정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식물의 경우 이들이 만들어내는 화학물질은 방어용이 아니라 유인용이다다른 생물체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충족시킴으로써 그들을 끌어들인다.

식물이 화학물질로써 다른 생물체를 쫓기도 하고 끌어들이게 된 가장 근본적인 배경은, 동물처럼 위치를 마음대로 옮길 수 없다는 실존적인 조건에 있다. 이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식물은 자기를 덮치는 다른 생물체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또한 외부의 도움 없이는 자기 영역을 넓힐 수도 없다.

1억 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식물들은 무려 수천 가지나 되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동물들이 자기 유전자를 다른 장소로 옮기도록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것은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획기적인 일이었다. 속씨식물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은 진화라는 커다란 강물로 흘러들어가는 아주 작은 실개천이다. 우리가 구사하는 문법으로는 세상이 능동적인 주체와 수동적인 객체로 나뉘지만, 공진화의 모든 관계에서는 객체가 주체인 동시에 주체가 객체이다. 이런 관점으로 바라보자면, 농경이라는 것도 풀이 나무를 이기려고 사람을 이용해 나무를 베어내게 만드는 전략이라는 새로운 정의가 가능하다.

내가 오늘 한 그루 사과 나무를 심는 것은 사실 (사과나무의 종족 보존 이라는 욕망을 달성 하려고)  나무가 나로 하여금 자기를 심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쓰면서, 자기가 세운 자연선택이라는 탁월한 개념을 어떤 식으로 세상에 내놓는 게 가장 좋을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호기심을 유발하는 전략을 세웠다. 자기가 세운 새로운 이론을 설명하는 것에서 풀어나가지 않고, 우선 사람들(특히 영국의 정원사들이 쉽게 관심을 기울일 만한 주제를 책의 앞부분에 배치했다. <종의 기원>의 제1장을, '인위선택' 이라 불리는 자연선택의 특이한 사례들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채웠던 것이다. 여기에서 '인위' 라는 단어는 길들여진 생물 종이 나타나는 과정을 지칭하기 위해 다윈이 만들어낸 관념이다. '가짜' 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공'이라는 의미였다. 인간의 의지가 반영되었다는 뜻이었다. 사실 코커스패니얼과 같이 이종교배를 통해서 생긴 생물 종을 가짜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윈은 제1장에서 코커스패니얼을 포함해 몇몇 길들여진 생물 종을 설명하면서, 이 각각의 종이 보여주는 특성은 매우 다양한데 이 특성들 가운데서 몇몇을 인간이 의도적으로 선택해, 다음 세대에 다시 나타나도록 한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그는 또, 길들이기' 라는 특수한 영역에서 인간의 욕망은 (이 욕망은 때로는 의식적이고 때로는 무의식적이다) 자연이 자연 속에 잘 적응하는 종들을 선택하고 또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종을 이끌어내는 것과 똑같은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자연은 인간을 우수한 먹이 사냥꾼으로 만들기 위해 자연선택의 압력을 우리에게 가하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뇌는 발달한다. 그 덕에 인간은 활동 시간 중 99퍼센트를 물이 아닌 뭍에서 보낼 수 있게 됐다. 이미 어릴 때 깨달은 사실이지만, 꽃이 피면 머지 않아 그 식물에 먹을 게 열린다. 말하자면 꽃은 수확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전령인 셈이다. 이렇게 보자면, 꽃에 보다 잘 이끌리는 사람, 나아가 여러 꽃들을 분간할 줄 알고 어디에서 그 꽃들을 보았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꽃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 비해 훌륭한 먹이 사냥꾼이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 이 같은 이론을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How the Mind Works》에서 설명한 신경과학자 스티븐 핀커는 자연선택은 우리 조상 가운데서 식물학자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즉 주변에 어떤 식물들이 있는지 알고 그것들을 분류하며 또 그것들이 어디에서 자라는지 기억하는 사람들 편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자연의 풍경 속에서 욕망의 대상, 즉 어떤 식물이 눈에 띌 때마다 우리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그 순간이 즐거움이 된다. 나아가 그 대상의 아름다운 존재가 된다

살충제 내성 문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이 강화되면 될수록, 자연 선택은 더욱 빠르게 그 지배력을 뒤집어버린다.

고전적인 다윈주의 이론에 따르면, 비티 균(살충제 종류) 유전자를 이식한 농작물은 너무도 많은 비티 균을 그것도 지속적으로 자연 환경에 뿌려댐으써 이 균이 대상으로 삼는 해충들은 결국 내성을 기르는 쪽으로 진화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하는 점이다. 예전까지만 해도 내성에 대한 문제는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기존의 비티 균 살충제 분무액은 햇빛을 받으면 금방 약화되고, 농민들도 해충이 기승을 부려도 여간해서는 이 살충제를 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성은 본질적으로 어떤 개체군이 멸종의 위협을 받을 때 나타나는 진화의 한 형태이다. 멸종당할지도 모른다는 압박 때문에 해당 종은 멸종 상황을 피할 수만 있다면 어떤 돌연변이라도 기꺼이 수용한다. 결국 어떤 종(대표적으로 인간이다)이 다른 종을 완벽히 통제하려고 시도할 경우, 다가오는 건 재앙뿐이라는 뜻이다.

자연선택에서 살아 남는 방법

우리는 생존 기계다. 여기서 '우리'란 인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동식물, 박테리아, 그리고 바이러스를 포함한다. 지구상 생존 기계의 총수를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심지어 종의 총수마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예컨대 곤충의 경우 현재 약 3백만 종이 있다고 추정되며, 그 개체 수는 10¹⁸ 마리나 된다. 생존 기계는 종류에 따라 그 외형이나 체내 기관이 매우 다양하다. 문어는 생쥐와 전혀 닮지 않았으며, 이 둘은 참나무와 또 다르다. 그러나 그들의 기본적인 화학 조성은 다소 균일하다. 특히 그들이 갖고 있는 자기 복제자, 즉 유전자는 박테리아에서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모두 동일한 종류의 분자다. 우리 모두는 같은 종류의 자기 복제자, 즉 DNA라고 불리는 분자를 위한 생존 기계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여러 종류의 생활 방법이 있는데, 자기 복제자는 이 방법을 이용하기 위해 다종다양한 기계를 만들었다. 원숭이는 나무 위에서 유전자를 유지하는 기계이고, 물고기는 물속에서 유전자를 유지하는 기계다. 심지어 독일의 맥주잔 받침에서 유전자를 유지하는 보잘것없는 작은 벌레도 있다. 이처럼 DNA는 매우 신비하게 일한다.

무생물인 나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06년 하이페리온(Hyperion)이라는 나무가 미국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국립공원에서 발견됐을 때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무의 키가 116미터(379.7피트) 였기 때문이다.  315피트에 달하는 런던의 빅벤 타워보다 더 높다.  이전 까지 수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는 높이가 369피트에 달하는 성층권 자이언트(Stratosphere Giant)라는 또 다른 해안 삼나무로 여겨졌었는데 이를 넘어 선 것이다. 하이페리온의 놀라운 키는 유전학과 유리한 성장 조건의 조합으로 인해 발생되었다.  

해안 레드우드라는 지역이 태평양 북서부의 습하고 안개가 많은 기후를 유지하고 있어서 나무가 높이자랄 여건이 되었고 거기에 더해  유전적 요인이 작용한 결과이다.  


유전적 요인이 식물에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나무를 대상으로 유전 정보를 파악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개되고 있다. 국립산림과학원은 서울시립대 김승일 환경원예학과 교수 연구팀과 공동으로 반수체 유전형(Haplotype) 정보를 반영해 소나무 표준 유전체를 완성했다. 이는 국내 연구팀이 세계 최초로 소나무 표준 유전체를 해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반수체 유전형은 반수체(Haploid)와 유전형(Genotype)의 합성어로, 부계 또는 모계로부터 유전된 염색체 유전 정보의 집합을 의미한다. 소나무 유전체(총 21.7Gb)는 인간 유전체(3.2Gb)보다 7배 방대하다. 또 전체 유전체 중 70% 이상의 염기서열이 반복적이고, 쌍으로 위치한 유전자의 염기서열이 달라 유전체 해독에 어려움이 따랐다.

소나무 표준 유전체를 해독에 활용된 나무는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이다. 이에 따라 송이와 소나무 간의 상호작용 연구와 기후변화, 질병 형질에 관한 유전변이를 확보할 수 있는 ‘소나무 범유전체 지도’ 구축 등에 활용될 예정이다.

낙엽수와 상록수,누가 우월한가?

겨울을 맞이하는 나무 중에는 잎을 훌훌 떨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세찬 바람과 맞서는 나무가 있다. 그런가 하면 봄이나 여름이나 별반 다르지 않게 푸른 잎을 가지에 달고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겨울을 보내는 나무도 있다.

우리는 겨울에 잎을 떨어뜨리는 나무는 낙엽수, 사시사철 푸른 나무를 상록수라 부른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런 나무의 형태를 두고 어느 나무가 더 우월하냐를 놓고 의견이 갈리는 경우가 있다. 변함없는 상록수에 점수를 주시는 분도 있고,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낙엽수에 공감하는 분도 있다.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라면 어느 나무에 점수를 더 주실까?

겨울철은 소수인 상록수가 돋보인다. 희망차게 보이고 세상이 다 변해도 변함없는 모습이 믿음직하다는 견해가 지배한다. 막전막후에서 음모가 뒤끓는 시대에 영원히 나를 지켜줄 것 같은 충직한 모습에 마음이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문화와 정신적 지주로 성장한다. 상록수의 대표격인 소나무를 살펴보자. 거주 공간도 소나무, 생활용구도 소나무, 전투 시 전략물자도 소나무, 죽어서도 소나무, 경사스러운 날 병풍 속의 그림도 소나무가 들어가 있다. 제왕이 사용하는 '일월오봉도'에도 붉은 소나무가 영묘하게 자리하고 있다. 일상에 스며든 문화는 알게 모르게 소나무를 충성심, 정절, 장수, 정의감의 상징으로 표현하고 권력자는 은연중에 상록수 같은 충성심을 갈망해왔다.

왕조시대에 왕족은 측백, 향나무, 소나무 등의 사시사철 푸른 나무를 심고 가꾸며 자신의 영화가 영원하고 변함없기를 소망했다. 그런가 하면 일반 벼슬아치나 백성은 감히 그 나무를 심지 못했다. 아니 권력자들은 엄격한 등급을 매겨서 관리했다. 자신들만이 독점하던 시대가 있었다.

학자나 벼슬을 희망하는 사람이 심는 나무가 바로 학자수로 알려진 회화나무였다. 겨울이면 잎을 떨어뜨리는 낙엽수다. 왕족은 그 권력이 푸른 상록수처럼 영원히 이어 나아가지만, 백성의 벼슬은 때가 되면 거두어들이는 이치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도 옛날 나무에 대한 믿음은 예외가 아니다. 현존하는 창덕궁에도 정승의 나무로 불리는 회화나무가 조선 왕실의 역사를 간직한 채 늠름하게 버티고 있다. 벼슬아치는 물러갔지만, 그들을 맞아주던 회화나무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낙엽이 지는 나무와 늘 푸른 나무는 문화나 정서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음이 원초적으로 달랐다. 낙엽수가 낙엽을 떨어트리는 것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다. 뿌리에서 공급되지 않는 수분이 잎을 통하여 증발하면 나무는 죽음에 이른다. 절묘하게도 온도가 내려가면 이를 감지한 나무는 잎을 떨어뜨리는 준비를 한다. 단풍이 들고 이내 낙엽이 되어 가지를 떠난다. 삶의 방식이 다른 것이다. 잎을 떠나보낸 나무는 다음의 봄을 준비한다. 더 왕성한 잎을 생산하기 위한 노고는 겨울의 칼바람 추위를 견디어 냄으로써 준비된다.

식물의 세계에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고는 없다. 각자 고유한 특성에 따라 역할이 다르고 생존의 방식이 다를 뿐이다. 자연은 함께 어울려 살아갈 때 자연의 가치를 지닌다. 강한 자가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온대 지방에서 겨울에 상록수가 우월하게 보이는 것은 그를 돋보이게 하는 낙엽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감과 밤, 누가 자연선택에서 이겼나?

벼슬의 꿈을 이루어주는 감나무

감나무는 아름답고 풍성한 가을의 상징처럼 보인다. 넓은 잎이 붉은색으로 물들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주렁주렁 달린 감 사이로 하얀 구름이 지나간다. 감을 달고 있는 나무 자체가 한 폭의 명화처럼 아름답다.

감나무가 100년이 되면 1,000개의 감이 달린다고 했다. 수없이 많은 감을 달고 있는 감나무 고목을 보고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기자목으로 생각한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옛날 선비들은 넓은 감나무 잎에 사랑의 고백을 써서 연인에게 전하면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가을의 운치가 담긴 멋진 사랑의 편지를 감잎에 썼다. 한 장의 낙엽에 지나지 않지만, 옛 선비들의 풍류가 느껴진다.

우리의 조상님들은 나무를 대하고 생각하는 관찰력도 놀라웠다. 전하여 오는 감나무 예찬을 살펴보자. 세심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운 내용들이다. 감나무는 수명이 길다. 좋은 그늘을 준다. 새가 집을 짓지 않는다. 벌레가 피지 않는다. 단풍이 아름답다. 열매가 맛있다. 잎에 글을 쓸 수 있다. 이렇게 칠절(絶)을 두루 갖춘 나무가 감나무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듣고 감나무를 살펴본 적이 있다. 감나무에도 벌레가 있으며 새가 집도 짓는다. 그러나 유독 감나무를 사랑한 선비들은 겉과 속이 한결같은 감을 좋아했다고 한다. 좋으면 모든 것이 좋아 보인다고 했던가? 조상님들의 혜안과 감나무를 닮고자 하는 감나무 사랑이 돋보인다.

그런가 하면 감나무의 다섯 가지 덕(德)을 꼽는 분들도 있다. 잎이 넓어 글씨 공부를 할 수 있는 문(文)이 있고, 목재가 단단해서 화살촉을 만드니 무(武)가 있다. 겉과 속이 한결같으니 충(忠)이요, 치아가 없는 노인도 즐겨 먹을 수 있는 과일이니 효(孝)다. 서리를 이기고 오래도록 매달려 있는 나무이니 절(節)이라 했다. 이렇게 사람들도 지니기 어려운

상주시장 하늘아래 첫감나무

오덕을 지닌 감나무

문, 무, 충, 효, 절 5덕을 지녔다고 하니 참으로 감나무는 버릴 것이 없는 나무다. 아니, 본받아야 할 덕목이 가득한 나무다. 이런 과일을 우리네 조상님들이 그냥 두실 리가 없다. 선비의 사랑을 독차지한 감은 사람이 행하는 가장 엄숙하고 경건한 제례에도 빼놓을 수 없는 과일이 되었다.

감은 씨가 8개로, 팔도의 관찰사(현재의 도지사)가 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에서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출세 지향적 이야기도 전하여 온다. 이렇듯 인간의 염원이 담겨 있는 감나무지만 식물은 예외라는 게 있다. 감은 그해 그해기후에 따라 씨의 개수가 다르감게 나타난다. 일정하게 씨가 생성되지 않는 것이다. 씨가 전혀 보이지 않는 감도 있으니 8개를 고집하지는 말자. 감나무의 덕성을 닮는다면 도지사가 아니라 그 이상의 벼슬도 가능할 터이다.

감나무는 감 씨를 심으면 종전의 감을 딸 수 없다. 보통 고욤나무에 접을 붙여 원하는 감을 생산한다. 사람도 태어나 공부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큰 인물이 되기 어렵다. 감이 접을 붙여 원하는 열매를 생산하는 것처럼 사람도 역경과 고통을 감내하고 인고의 노력을 통하여 사람다운 사람이 됨을 나타내는 상징성을 감나무가 가지고 있다.

열매만이 보배가 아니다. 감나무는 아무리 커도 열매가 열리지 않는 나무가 있는데, 이것을 꺾어보면 속에 검은 신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감이 열리는 나무를 꺾어보면 속에 검은 신이 있다고 한다. 이 검은 속은 고통을 감내한 흔적이라고 한다. 부모 역시 자식을 낳고 애지중지키우며 가슴속이 검게 상했다. 온갖 고통을 감내한 부모의 은공을 생각하여 제상 위에 감을 놓는다는 이야기도 전하여 온다.

이래저래 감나무는 사람들에게 말없이 교훈을 주는 나무다. 그러나 세상에는 감나무보다도 못한 인간들이 있다고 하니 그것이 문제다.

헌신과 출세의 상징 밤나무

가을은 풍요의 계절이다. 넘실대는 황금 물결이, 산야에 익어가는 열매가 마음을 더욱 넉넉하게 한다. 그중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고 맛보기 쉬운 열매가 알밤이다. 밤이 익으면 가시 빗장이 서서히 열리고 애지중지 보호하던 갈색의 알맹이를 바깥세상으로 내보내며 가을이 왔음을 알린다.

밤나무는 큰 키에 넓은 잎을 지니고 낙엽이 지는 나무로, 20m까지 자란다. 다른 나무들이 봄을 맞아 꽃도 피우고 잎도 피우지만, 짐짓 모르는 체하다가 남 늦게 잎을 피워 양반 나무라는 별칭도 있다. 꽃은 특유의 진한 향기를 날리며 열매 맺기에 몰입한다. 개화로부터 열매를 맺고 배출하는 속도가 다른 나무에 비해 빠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좌고우면하지 않는 목표지향형 나무가 밤나무다.

가을이 되면 알밤이라는 성숙한 열매를 생산한다. 밤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하면 매우 특이한 열매를 맺는다. 강한 가시로 둘러싸여 있어 범접하기 어렵다. 이렇게 중무장하고 자라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밤은 밤알 자체가 씨앗이기 때문이다. 다른 열매는 과육이나 껍질이 씨앗을 보호하고 있지만, 밤은 열매 자체가 씨앗이라 생육 과정부터 강력한 보호가 필요하다.

이러한 밤나무의 강인한 특질을 조상님들은 놓치지 않으셨다. 내 자손이 잘되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인 부모들은 밤송이처럼 엄중하게 자손을 보호하고 훈육한다. 때가 이르러 독립할 때까지 최고의 보살핌을 유지한다. 특별한 성질을 보유한 밤나무의 생멸에서 삶의 지혜를 터득해 그 지혜를 실천했다. 조선 대학자율곡의 밤나무 사랑은 전설로 남아 있다. 밤나무를 심고 가꾸고 숭배하며 길흉사를 막론하고 큰 행사에는 반드시 챙겨야 하는 과일이 된 데에는 사람이 배우고 실천해야 할 덕목이 올곧이 스며 있다.

밤은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진기한 열매다. 대부분 식물은 씨앗을 심으면 종자의 껍질을 밀고 올라와 싹이 튼다. 그러나 밤나무는 조금 다

밤의 발아. 싹은 위로, 뿌리는 아래로, 알밤은 중심에서 영양을 공급한다

른 모습을 보인다. 종자의 껍질을 밀고 올라오지 않는다. 종자를 정점으로 하여 뿌리는 땅속으로 내려가고 싹은 위로 올라온다. 밤은 그 중심에 남아 뿌리와 싹이 튼튼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저장되어 있는 모든 양분을 후손에게 제공한다. 그리고 오랜 기간 그 중심에 열매의 흔적을 간직한다.

이러한 특징으로 밤나무는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는 성스러운 나무로 자리매김한다. 선조의 은혜를 잊지 않는 나무가 밤나무이다. 그뿐만 아니라 밤나무는 부귀의 상징으로도 중요시하는 나무다. 백성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벼슬을 암시한다. 밤송이 속의 밤알 세 톨은 각기 삼정승 배출을 염원하는 출세의 기원이 담겨 있으며 조율시불리는 것처럼 한]로국인 정서 속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열매이자 교훈을 주는 나무다.

우리말에 "신주를 모시듯 한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가장 귀하고 정성스럽게 모실 때 사용하는 대표성이 있는 용어다. 이때 신주를 만드는 나무가 밤나무였다. 조상님의 영혼을 담은 위패를 밤나무로

알밤 삼 형제, 삼정승을 염원하는 희망이 간직된 열매다

만드는 데에는 밤나무가 지닌 가시의 엄중함과 근본과 은덕을 잊지 않는 상징성이 내포되어 있다. 신은 언제나 공경스럽고 정성스럽게 모셔야 하는 대상이자 정성이 부족하면 가시에 찔릴 수 있음을 일깨운다.

가시로 무장한 밤송이, 천적으로부터 씨앗을 엄중하게 보호한다

밤나무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잘 자란다. 효의 상징으로, 출세의 염원을 담은 나무로 인가 가까이 자라고 식용과 약용으로 귀한 쓰임을 받는다. <본초강목>이나 <동국여지승람>, <춘추좌씨전>, <삼국유사> 등 고전에도 밤나무가 자주 등장한다. 삼천리강산에 밤나무를 상징하는 밤밭, 밤나무골, 율곡, 밤섬, 율동, 과천 등 밤나무와 연관된 지명이 있을 정도로 한국인의 정서가 듬뿍 담긴 나무다.

밤은 밤송이를 까는 불편함이 있어서 대부분의 동물들은 감히 덤벼들지 못한다. 원숭이 정도만 도전할 따름이다. 다람쥐는 밤송이를 까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알밤을 주워서 자기만의 비밀 장소에 은닉해 두고 겨울철에 꺼내 먹는다. 다람쥐라는 동물이 건망증이 심해서 숨겨 놓은 장소를 잊어버리는 바람에 밤은 발아를 해서 밤 나무가 자라기도 한다. 그러나 밤은 밤송이를 까고 나면 알밤 자체는 바로 씨앗이 된다. 땅에 심으면 밤나무로 자라게 된다.

반면 감을 보자. 감은 껍질을 깔 필요도 없이 바로 먹으면 된다. 물론 떫어서  바로 먹기는 적당하지 않다. 홍시로 먹거나 곶감으로 먹는다. - 홍시도 그렇고 곶감도 그렇고 겨울에 이보다 더 좋은 간식이 있었던가 - 여기까지 중간 평가를 해보도록 하자. 밤은 먹어 버리면 씨앗이 남아 있지 않는다. 반면 감은 먹고 나면 씨앗은 뱉어진다. 감의 씨앗은 먹을 수가 없다. 유전학상으로, 또 자연 선택 관점에서 감이 우수하지 않는가? 승자는 감이 아닐까요? 

그런데  마지막 한 가지 고려할 일이 남아 있다. 감 씨앗을 심으면 감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염이라고, 감 보다 작은 열매가 열리는 나무가 자라게 된다. 이 고염나무에 감나무 가지를 가지고 접을 붙여서 감나무가 되는 것이다. 

어떤가. 감나무 밤나무 모두 자신만의 자연선택 비법을 가지고 살아 왔다.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단언컨데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우월하다 할 수 있다.   

지배의 욕망, 감자 (마이클 폴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인간이 길들인 모든 식물은 인간이 계획한 문화적이고 자연적인 정보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하지만 동시에 인위적인 기록 창고이다. 모든 감자는 자기에게 주입된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 길고 매끈한 프렌치프라이나 흠집 하나 없이 둥근 감자칩을 만들기 위해 선택된 감자는 한 국가의 먹이사슬과 고도로 개발된 감자를 좋아하는 문화가 표현된 결과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감자 농사를 지을 경우, 아무리 황폐한 땅이라 하더라도 몇 에이커만 있으면 가족과 가축을 모두 넉넉하게 먹일 만큼 풍족하게 수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소위 레이지 베드lazy bed' (어떤 역사가는 '내버려두다' 라는 뜻의 프랑스어 동사 '레세 laisser'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밭을 갈지도 않은 채 파종만 하고 나머지는 자연에게 맡겨두는 '게으른' 농법을 일컫는다.옮긴이)로 농사를 지을 경우 일을 많이 할 필요도 별로 없었고 따로 농기구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씨감자를 밭에 흩어놓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 다음 삽으로 밭 가장자리에 물길을 낸 뒤, 뗏장이든 토탄이든 혹은 물길을 내느라고 파놓은 것이든 아무 흙으로나 씨감자를 덮어주기만 하면 되었다. 쟁기로 밭을 갈 필요도, 이랑을 따로 만들 필요도 없었다. 물론, 농사의 엄숙함이나 장엄함이란 것도 없었다. 바로 이런 점이 영국 사람들 눈에는 경멸스럽게 비쳤다. 곡물이 가지런하게 줄지어 늘어선 들판을 바라보는 아폴로적인 만족감을 감자밭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일사불란하게 정렬한 군대의 대오처럼 태양 아래 황금빛으로 일렁거리며 영글어가는 밀의 늠름한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영국 사람들에게 감자를 재배하는 일은 농사도 아니었다. 밀은 태양과 문명을 향해 위로 자라지만, 감자는 아래로 자랐다. 각각의 개체가 구분도 잘 되지 않는 덩이줄기는 보이지 않는 땅 속에서 자라며, 땅 위의 덩굴은 단정치 못하게 제멋대로 이리저리 기어다녔다.

반면 영국 사람들은 감자를 경멸하였다. 감자라는 이 작물에는 인간의 문화가 너무 적게 담겨있는 한편, 고치거나 극복할 수 없는 자연적인 야성의 요소는 너무 많이 담겨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너무나 배가 고파서 농사의 미학에 대해서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감자는 비록 그림처럼 정연한 질서나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고귀한 지배력을 드러내주지는 못했겠지만, 아일랜드 사람들에게는 양식이 되어주었다. 이로써 그들은 세상에 지배당하지 않고 세상을 지배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이제 영국 사람들의 경제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기 힘으로 배를 채울 수 있었으며, 빵 가격이 오른다고 해서 혹은 임금이 적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소에서 짠 젖과 함께 감자를 주식으로 삼을 경우 영양적인 균형도 완벽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감자는 충분한 열량을 내는 탄수화물 외에도 상당한 양의 단백질과 비타민 B, C를 공급했다(이런 영양소로 인해 감자는 장차 유럽에서 괴혈병을 몰아내게 된다). 단지 부족한 게 있다면 비타민 A였는데, 이것은 소량의 우유로도 충분히 섭취할 수 있었다(이렇게 해서 으깬 감자는 간편한 식사가 될 뿐 아니라 몸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영양소의 공급원이 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감자는 재배하기도 쉬웠지만 요리하기는 더 쉬웠다. 땅에서 캐낸 뒤에 냄비에 넣고 삶든, 불 속에 그냥 던져넣어 굽든 익히기만 하면 먹을 수 있었다.

다른 곡물과 비교할 경우 감자는 이런 부인할 수 없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서 장차 북유럽 전역의 사람들 기호를 바꾸어놓게 되지만, 아일랜드 이외의 지역을 파고들기까지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가히 투쟁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정도였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농민에게 감자를 심으라는 명령을 직접 내려야 했고,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보다 교묘한 방식을 썼다. 감자에 왕실의 권위를 부여하면 이 위엄에 이끌려서 농부들도 감자를 심을 것이라 생각하고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머리에 감자 꽃을 여러 송이 꽂고 다니도록 했다. 심지어 다음과 같은 묘책도 썼다. 왕실에 딸린 밭에 감자를 심도록 한 뒤, 최고 정예 부대인 왕실 수비대에 명령을 내려서 이 감자밭을 지키도록 했다. 그러고는 자정에 철수하도록 했다. 그러자 농부들은 감자가 매우 소중한 작물이라고 생각하고, 루이 16세가 예상한 대로 그 감자밭에서 감자를 훔쳐갔다.

시간이 흐르자 이 세 나라는 감자 덕분에 국력이 강성해졌다. 이로써 북유럽에서 흔하던 영양 실조와 기아가 사라졌다. 감자는 곡물을 심었을 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먹고살 수 있는 수확량을 보장했다. 감자를 경작하는 데는 많은 노동력이 들지 않아서, 점점 커지고 산업화되어가던 북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필요로 하는 식량을 시골에서도 충분히 댈 수 있었다. 그때까지 유럽의 정치 중심은 밀이 잘 자라는, 늘 덥고 맑은 날씨의 남쪽 지방이었지만 이제 북쪽으로 이동했다. 만일 감자가 없었다면 유럽의 세력 균형에 이런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감자에 대한 편견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곳이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 사람들의 편견은 고루하고 미신을 잘 믿는 농민에게만 한정된게 아니었다. 19세기가 되고나서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도 런던의 여론 지도층 가운데 상당수가 감자는 문명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증거를 대라고 물으면 그 사람들은 손을 들어 아일랜드 쪽을 가리켰다.

1794년, 영국. 그해 영국의 밀 농사는 흉작이었고 빵의 가격은 가난한 사람들은 감히 살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뛰어올랐다. 식량 때문에 폭동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이런 소동 속에서 감자를 둘러싼 논쟁이 50년 동안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이 감자 논쟁은 레드클리프 샐러먼의 1949년 저서 《감자의 역사와 사회적인 영향 The History and Social Influence of Potato)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문학비평가인 캐서린 갤러허는 <유물론적 상상 속의 감자The Potato in the Materialist Imagination>라는 논문을 통해서 이 책의 설득력 있는 주장을 명쾌하게 분석했다). 영국 전체의 내로라하는 온갖 저널리스트와 농업경제학자 그리고 정치경제학자가 뛰어든 이 감자 논쟁은 계급 갈등과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영국 사람들의 우려를 표면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이 논쟁은 동시에, 영국 사람들이 주식으로 하는 식물들과 좋건 싫건 그 식물들이 인간을 자연에 뿌리박게 하는 방식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속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논의의 핵심이 되었던 것은 바로, 인간이 이 식물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는가 아니면 그들이 인간을 지배하고 통제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논쟁은 처음 감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서 촉발되었다. 이들은 제2의 주식을 도입하는 것은 영국에 크게 이익이 되는데, 빵이 귀할 때 가난한 사람이 배를 곯지 않게 해주고 아울러 빵 값과 함께 뛰어오르게 마련인 임금이 오르지 못하도록 붙들어둘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존경받던 농업경제학자 아서 영은 아일랜드를 여행하고 돌아오면서, 감자야말로 기아로부터 영국의 빈민을 보호해줄 수 있으며, 인클로저 운동으로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잠식당하던 농민이 환경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는 '풍요의 뿌리'라고 확신했다.

급진주의 저널리스트이던 윌리엄 코베트 역시 아일랜드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아서 영과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렸다. 영이아일랜드의 감자밭에서 자립을 보았다면, 코베트는 비굴한 생존과 의존성을 보았다. 코베트는, 감자가 아일랜드 사람들을 먹여살렸다는 말은 맞지만 채 100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인구를 300만 명에서 800만 명으로 늘렸으며 그 결과 임금 수준을 묶어두어 아일랜드 사람들을 황폐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감자가 풍성한 수확량을 보장하자 젊은 사람들은 일찍 결혼을 해서 대가족을 부양했고, 노동력 공급이 늘어나면서 임금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감자가 가져다준 행복이 사실은 저주였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코베트는 자기가 쓴 기사에서 '이 저주받은 뿌리'를 중력의 힘이라고 불렀다. 이 중력의 힘이 아일랜드 사람들을 문명의 수준에서 땅속으로 끄집어내리고, 인간과 야수 심지어 인간과 뿌리의 구분조차 모호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또 코베트는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 사는 진흙 오두막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했다.

“창문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 바닥은 그냥 맨땅이다. 굴뚝도 없다. 한쪽 구석에 돌멩이 몇 개를 둘러놓은 구덩이가 하나 있을 뿐이다”.

그의 섬뜩한 묘사에 따르면, 아일랜드 사람들은 지하로 내려가서 진흙 속에 있는 덩이줄기와 함께 살았다.

(다 익은 감자를) 불에서 끄집어내기만 하면 그것 자체로 멋진 요리가 된다. 가족은 냄비 주변에 웅크리고 앉아서 손으로 감자를 집어서 먹는다. 곁에는 돼지도 한 마리 있다. 사람이 돼지에게 감자를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돼지가 직접 냄비에서 감자를 꺼내먹기도 한다. 돼지는 마치 가족의 한 사람인 것처럼 구덩이 주변에서 서성거린다.

감자는 자연이 다시 인간을 지배하게 만듦으로써 손쉽게 문명을 와해시키고 말았다고 코베트는 주장했다.

영국 사람들은 때로 감자를 '빵 뿌리' 라 부르기도 했다. 이 표현은, 결코 감자에게 유리하게 전개된 적이 없었던 감자 논쟁으로부터 불거진 감자와 빵의 대조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캐서린 갤러허의 지적에 따르면, 영국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감자를 원시적이며 고루하고 문화의 흔적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단순한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부족함이라는 특성이 바로 감자가 풍기는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감자는 식품을 넘어서는 의미를 담지 못했다. 그저 동물이 먹고 힘을 내는 재료일 뿐이었다. 이에 반해서 빵은 의미를 가득 담고 발효가 되는 음식 이상의 존재였다.

밀도 감자처럼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밀은 감자와 달리 문화에 의해 변모된다. 요리할 때 감자는 그냥 냄비나 불에 던져넣기만 하면 되지만 밀은 그렇지 않다. 수확을 한 뒤 타작과 제분, 혼합, 반죽, 모양내기, 굽기 등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마치 기적처럼 무형의 반죽 덩어리가 빵으로 탄생한다. 분업화된 노동과 초월성의 암시를 담고 있는 이 정교한 과정은 원시 자연에 대한 문명의 지배를 상징한다. 단순한 음식인 빵이 인간과 영혼 사이 교감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랜 세월 빵이 예수의 몸을 상징해왔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뭉툭한 덩어리인 감자가 천한 물질이었다면, 빵은 기독교인의 마음에서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었다.

정치경제학자들 역시 감자 논쟁에 뛰어들었다. 비록 자기 주장을 과학적인 용어로 포장을 했어도, 어쨌거나 그들의 화려한 미사여구는 자연이 문명을 지배하고 통제한다는 데 대한 깊은 우려였다. 맬서스의 논리는 인간은 식욕과 성욕에 따라 움직인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맬서스는 감자가 인구를 억제하는 경제적인 압박감을 해소하기 때문에 위험하며, 바로 아일랜드에서 이런 문제가 드러났다고 보았다.

감자로 인해서 하층민의 인구가 노동에 대한 통상적인 요구 수준보다 높게 유지되는 한, 아일랜드 하층민의 게으르고 거친 성정은 절대로 개선될 수 없다.

사람들이 감자를 먹음으로써 빵을 만드는 문명화의 과정을 생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감자를 먹을 때 경제의 규율이 실종되고 만다는 게 맬서스의 생각이었다. 애덤 스미스나 데이비드 리카도 같은 정치경제학자들이 보기에, 시장은 노동 규모에 맞게 인구를 조절하는 민감한 체계였고, 빵의 가격은 이런 체계의 조정자였다. 즉, 밀의 가격이 오르면 사람들은 식욕과 성욕을 억제하고, 따라서 출산율이 줄어든다고 보았던 것이다. 감자가 중심인 경제 체계의 문제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서 행동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 (경제 논리에 따라서 행동하는 인간이라는 뜻.옮긴이)가 사라지고 이들보다 훨씬 비이성적인 존재, 즉 갤러허가 '호모 아페티투스' (욕망에 따라서 행동하는 인간이라는 뜻.―옮긴이)라고 불렀던 존재만 세상에 남는다는 것이었다. 경제 논리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이 냉정하고 이성적인 아폴로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인다면,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은 세속적이고 도덕 관념이 없는 다산의 신 디오니소스의 지시에 따른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감자를 자급했으며 또 감자는 밀처럼 저장을 하거나 거래를 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감자는 시장 경제 안에서 상품이 될 수 없었고 결국 아일랜드 사람과 마찬가지로 권위가 아니라 자연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게 이들의 논리였다.

정치경제학자들이 보기에, 자본주의적인 교환 과정은 자연(다시 말해서 식물)과 인간의 무질서한 본성을 교화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시장 경제의 교환은 빵을 굽는 것과 매우 흡사했다. 시장 경제의 규율이 없으면 인간은 본능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만다. 무제한적인 식량 공급과 성욕에 대한 추종은 필연적으로 인구 과잉과 불행을 불러온다. 리카도는 바로 이런 퇴보, 즉 자연에 대한 지배력 상실의 원인이자 상징이 바로 감자라고 확신했다. 인간에게 먹을 게 필요한 한, 인간은 결코 자연의 변화무쌍함으로부터 초연할 수가 없다. 리카도는 밀처럼 홍수나 가뭄에 대비해서 저장할 수 있으며 화폐와 바꾸어 필요한 물품을 살 수 있는 주식에 의존하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감자는 이런 대비를 하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감자는 식품 재료라는 원래 본성을 떠나 시장에서 매매되는 상품이 되기를 거부함으로써, 갤러허의 표현을 빌자면 '선진적인 경제 체제가 변덕스런 자연에서 인류를 해방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과정을 지워버릴 수도 있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적어도 이 점에 대해서는 정치경제학자들의 견해가 끔찍할 정도로 옳다는 사실을 장차 역사가 증명하게 된다. 감자가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행사했던 지배력은 언뜻 보기에는 축복 같았지만, 실제로는 잔인한 환상으로 판명될 터였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감자에 의존함으로써 경제의 변화무쌍함뿐만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무쌍함에도 더할 나위 없이 취약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해주는 사건은 1845년 늦여름에 갑자기 터졌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돌아온 배를 통해 감자 잎마름병이 유럽에 상륙했고, 이 무시무시한 병원균의 포자는 바람을 타고 몇 주 사이에 유럽 대륙 전역으로 퍼졌다. 그리고 감자와 감자를 주식으로 삼던 사람들에게 종말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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