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빈솔 Bin Sole Jan 04. 2025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르네 지라르

김치수 송의경 옮김

프루스트의 세계

콩브레는 닫힌 세계이다. 어린애는 그 안에서 부모와 집안 우상들의 보호 아래, 마치 중세의 마을이 교구의 비호 아래 그러했던 것처럼 아늑한 행복감에 잠겨 살아간다. 콩브레라는 통일성은 지리적인 것이기에 앞서 정신적인 것이다. 콩브레는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공통된 전망(vision)이다. 어떤 질서가 현실에 부여되면 그것은 더 이상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콩브레의 첫번째 상징은 마법의 램프인데, 램프의 갖가지 형상들은 그것들이 투사된 물건들의 형태와 결합하여 방의 사면 벽과 전등갓과 문의 손잡이들에 비쳤다가 일률적으로 우리에게 반사된다.

콩브레는 폐쇄적인 문화인데, 독일사람들이라면 용어의 민족학적 의미에서 세상(Welt)이라 말할 테지만, 작가는 우리에게 '폐쇄된 작은 세계' (petit monde clos)라 부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인식의 차원에서 콩브레와 외부세계 사이에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콩브레의 인식과 '야만인들' (barebares)의 인식 사이에는 특수한 차이가 존재하며, 그것을 밝히는 일이 소설가의 주된 임무이다. 입구의 문에 달린 작은 종두 개는 이러한 차이에 대한 예증이라기보다는 첫번째 상징에 속하는 한 예를 제시한다. "집안사람은 누구나 들어오면서 그 연결장치를 벗겨 '소리를 내지 않기'로 되어 있는 작은 종"과 "낯선 사람일 경우에는 딸랑딸랑 두 번 수줍게 울리는 달걀모양의 금빛 울림을 가진 작은 종은 전혀 공통점이 없는 두 세계를 환기시킨다.

언제나 매우 피상적인 어떤 층위에서는 콩브레가 아직도 이러한 인식들간의 차이를 분간할 능력이 남아 있다. 콩브레는 두 가지 방울소리의 차이를 알아차린다. 콩브레는 그곳의 토요일이 하나의 색깔, 하나의 특별한 색조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또한 모르지 않는다. 그날따라 점심식사가 한 시간 앞당겨졌다. 평소와 다른 토요일이 돌아오기라도 하면 그것은 집안 내의, 지역의 거의 시민 차원의 사소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여서 평온하던 생활과 폐쇄된 사회 내에는 일종의 거국적인 유대감이 형성되고, 사람들의 대화와 농담과 그리고 제멋대로 부풀린 이야기의 인기있는 주제가 된다. 그것은, 만일 우리 가운데 서사적인 사고를 가진 자가 있었다면, 그에게 전설적인 연작(作)을 써낼 완벽하게 준비된 핵심을 제공했을 것이다. 콩브레 사람들은 외부인들(étrangers)과 대립하는 일이 생기면 서로간에 연대감과 우의를 느낀다. 하녀인 프랑수아즈가 특별히 이러한 일치감을 좋아한다. 식구들이 특별한 토요일을 잊었기 때문이 아니라 외부인들이 그런 사실을 모른다는 점을 잊었기 때문에 생기는 사소한 오해만큼 그녀를 즐겁게 하는 것은 없다. 미리 알려주지 않았으므로 시간이 바뀐 것에 깜짝 놀라는 '야만인'은 약간 우스워 보인다. 그는 콩브레의 진실에 입문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와 타인들 간의 차이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알아볼 수 있는 이러한 중간지대에서 '애국적인' 의례들이 생겨난다. 오해는 여전히 반쯤 의도적이다. 좀더 심각한 수준에서는 오해는 전혀 의도적이 아니며, 화자인 소설가만이 동일한 대상에 대한 상충되는 인식들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을 뛰어넘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콩브레는 그들에게 익숙한 가족처럼 친숙한 부르주아 스완을 알지만 사교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세련된 귀족인 스완의 다른 모습은 알지 못한다."

틀림없이 나의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구성하고 있는 스완 안에 다른 방면이 있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한 탓에 그의 사교계 생활의 허다한 특징들을 빠뜨리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 같으면 그와 대면하게 되었을 때 그의 얼굴에 퍼져 있는 우아함이 마치 자연스러운 경계인양 그의 매부리코에서 멈추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것이 사교계생활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들은 그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방심한 듯한 널따란 얼굴 속에, 그를 과소평가시키는 그 눈 속에, 함께 보냈던 한가로운 시간들의 아련하고 정다웠던 흔적 - 반쯤은 기억하고 반쯤은 잊어버린 - 을 쌓아갈 수 있었다.

소설가는 본래 인간이 전혀 보지도 만지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것, 즉 모순되는 만큼 절대적인 두 가지 명백한 인식을 우리가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게 한다. 콩브레와 외부세계 사이에는 단 한 가지 소통만이 가능해 보인다. 오해가 전부인데, 그 결과는 비극적이라기보다는 희극적이다. 우리는 이 희극적인 오해의 또 다른 예를 셀린(Céline)과 플로라(Flora) 두 할머니가 스완이 보낸 선물에 대해 그에게 표시하는 미미한 감사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암시가 너무 막연하고 간접적이어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렇지만 나이든 두 여자는 자기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리라고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의사소통의 불능은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 '두 모습을 지닌 스완의 경우에 모든 오해는 지적인 이유, 단순한 정보의 부족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소설가의 몇몇 표현들이 이 가정을 확인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가족들의 무지로 콩브레의 스완이 생겨난다. 화자는 허물 없는 스완의 모습에서 자신이 청년기에 범했던 유쾌한 착각들 가운데 하나를 발견한다.

착각은 일반적으로 우발적이다. 그것은 잘못 생각하는 사람의 관심을 그리로 기울이게 하면, 또 그에게 착각을 교정할 방법을 알려주면 즉시 사라진다. 그러나 스완의 경우에는 가족들, 특히 대고모의 착각에 대한 견해가 수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러한 기미들이 늘어나고 사방에서 진실이 밝혀지게 된다. 스완이 귀족들과 빈번하게 교류한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르 피가로지가 '샤를 스완의 소장품'인 그림들에 관해 언급한다. 대고모의 생각은 요지부동이다. 마침내 스완이 빌파리시스 부인(Mme de Villeparisis)의 친구임이 밝혀지지만, 이 소식은 대고모의 생각에서 스완을 격상시키기는커녕 빌파리시스 부인을 격하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뿐이다. "뭐라고? 그 여자가 스완을 안다고? 자네가 마크-마옹(Mac-Mahon) 원수의 친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말이지!라고 대고모가 할머니에게 말한다." 진실은 성가신 한 마리 파리 같아서, 끊임없이 대고모의 콧잔등에 내려앉지만 손등 하나면 그것을 쫓아버리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프루스트의 착각은 지적인 이유로 국한되지 않는다. 문맥에서 유리된 이 용어로, 특히 이러저러한 철학자가 한정시킬 이 용어의 의미로 프루스트를 판단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단어들을 넘어서 소설의 실질을 보아야 한다. 스완에 관한 진실이 콩브레에 침투하지 못하는 까닭은 이 가족의 사회적 믿음과 이 가족이 부여하는 부르주아의 위계질서에 대한 의미가 상반되기 때문이다. 프루스트는 우리의 신념이 지배적인 세계에는 사실들이 침투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이러한 신념을 만들어낸 당사자가 아니므로 그것을 파괴할 수 있는 것도 그들이 아니다. 개인적인 세계의 건전함과 공명정대함이 문제될 때 그들의 눈과 귀는 닫혀버린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바라보되 그리 뚫어지게 바라보지는 않는데, '그의 우월감의 비밀'을 알고 싶지 않아서이다. 셀린과 플로라 두 할머니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 고도의 귀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이들은 사람들이 자기들 면전에서 자기들의 관심사가 아닌 것에 관해 말하면 더 이상 듣지 않는다.

이 두 할머니의 청각을 … 당장 청각기관의 작용을 정지시키고 그 기능의 완전한 위축을 개시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때 할아버지가 두 처제들의 주의를 끌 필요를 느끼면, 할아버지는 정신병 전문의가 어떤 방심증 환자들에게 사용하는 물리적인 경고방법에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여러 번 되풀이하여 칼날로 유리컵을 두드리면서 동시에 목소리와 시선으로 갑작스런 질문을 내뱉는 방법 말이다.

이러한 방어 메커니즘은 분명히 간접화에 속한다. 콩브레의 중개자처럼 중개자가 멀리 있을 때, 그들은 사르트르의 '자기기만' 보다는 막스 셸러가 원한의 인간에서 말하고 있는 '기질성 기만' (mensongeorganique)에 더 부합한다. "체험의 변조는 단순한 거짓말에서 그렇듯이 의식적으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가치의 표상과 감정이 생성되는 순간부터 모든 의식적인 체험에 우선하여 행해진다. '기질성 기만’은 사람이 자신의 '이익' 이나 또는 본능적인 관심의 그러한 다른 경향에 유리한 것만을 알고자 할 때마다 작동하며, 그 대상은 기억에서조차 그렇게 변조되어버린다. 그래서 착각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자신의 건강을 해칠 수 있는 것은 흡수하기를 거부하는 건강한 신체기관이 그러하듯, 콩브레는 위험한 진실을 배격한다. 콩브레는 눈을 자극하는 먼지를 배척하는 하나의 눈이다. 따라서 콩브레에서는 모두가 각기 자신의 검열관이다. 그러나 전혀 애쓸 필요가 없는 이 자체검열은 콩브레의 평화와 콩브레의 일원이 되는 행복과 혼동된다. 게다가 이것은, 원래 본질적으로 레오니(Léonie) 대고모를 돌보는 주변사람들의 지극한 보살핌과 일체를 이룬다. 모두가 대고모의 평온을 깨뜨릴 우려가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대고모한테서 멀리 떼어놓으려고 애쓴다. 마르셀은 산책 도중에 '모르는 어떤 사람'을 만났다고 경솔하게 말했다가 꾸중을 듣는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레오니 대고모의 방이 정신적 중심, 가족들이 사는 집의 진정한 지성소로 비친다. 비시(Vichy) 물병과 약 그리고 종교서들이 놓여 있는 머리말 탁자는 콩브레의 대여사제가 프랑수아즈의 도움을 받아 제식을 집행하는 제단이다.

대고모는 활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녀가 이질적인 정보를 변모시킨다. 즉 그것을 '콩브레의 이야기 주제'로 바꿔서, 소화가 잘되고 영양가가 높고 맛있는 음식물로 만들어버린다. 그녀는 지나가는 사람과 낯선 개를 동일시하며, 모르는 사람을 아는 사람으로 만든다. 그녀 덕분에 모든 지식과 모든 진실이 콩브레의 것이 된다. "고대화가들의 그림에 나오는 작은 마을과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원형(圓形)을 이루는 윤곽이 여기저기 드러나는 중세 성벽지대의 잔해"인 콩브레는 하나의 완전한 구형(形)를 이루고 있으며, 침대에 누워 움직이지 않는 레오니 대고모가 이 구형의 중심이다. 대고모는 가족의 활동에 참여하지 않지만 그러한 활동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녀의 매일매일의 생활이 이 구체를 순조롭게 돌아가게 한다. 마을의 집들이 교회 둘레로 모이듯 가족들은 대고모 주변으로 몰려든다.

콩브레의 기질적 구조와 사교계 살롱의 구조 사이에는 놀랄 만한 유사성이 있다. 그것은 순환적인 동일한 사고방식, 의례적인 언행체계로 확인된 내면의 동일한 응집력이다. 베르뒤랭 살롱은 단순한 모임장소가 아니라 보고 느끼고 판단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살롱 역시 하나의 '폐쇄된 문화'이다. 그러므로 살롱도 정신적 통일성을 위협하는 것은 무엇이나 배척하게 될 것이다. 살롱은 콩브레의 기능과 유사한 '제거기능'을 가지고 있다.

콩브레와 베르뒤랭 살롱 간의 유사성은, 두 경우 모두에서‘외부 사람'이 불행한 스완인 만큼 더욱 이해하기가 쉽다. 오데트를 향한 사랑 때문에 스완은 베르뒤랭 집안에 끌린다. 스완의 사회적 계급의 격하와 범세계성 그리고 귀족들과의 교분은 콩브레에서보다는 베르뒤랭 집안에서 더욱 전복적으로 보인다. '제거기능' 은 몹시 거칠게 수행된다. 스완으로 인해 생겨난 막연한 거북함에 대한 대고모의 반응은 비교적 해롭지 않은 빈정거림으로 그쳤다. 좋은 이웃관계는 훼손되지 않았다. 스완은 여전히 환영받는 사람(persona grata)으로 남아 있다. 베르뒤랭살롱에서는 상황이 다르게 진전된다. '여주인'은 스완을 동화될 수 없는 인물로 깨닫자 증오로 입을 비죽거리는 대신 미소를 짓는다. 불가항력적인 파문이 선고되고, 살롱의 문이 난폭하게 닫혀버린다. 스완은 외부의 어둠 속에 내던져진다.

살롱의 정신적 통일성에는 콩브레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긴장되고 경직된 어떤 것이 있다. 이러한 차이는 통일성을 표현하는 종교적 이미지의 영역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콩브레를 묘사하는 이미지는 일반적으로 원시종교, 구약성서 그리고 중세 기독교에서 차용된 것들이다. 분위기는 젊은이들의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서, 문학이 꽃을 피우고, 신앙심은 돈독하고 순진하며, 외부인을 언제나 야만인으로 간주하되 결코 증오하지는 않는다.

베르뒤랭 살롱의 이미저리는 아주 판이하다.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의 주제가 지배적이다. 살롱의 통일성이 끊임없이 위협받는 듯이 여겨진다. 여주인은 항상 임전태세를 갖추고 '이교도들'의 공격을 물리칠 준비가 되어 있다. 즉 그녀는 교회 분리가 일어나기도 전에 무마하고, 친구들 주변에서 끊임없이 보초를 서며, 그녀의 영향권 밖에서 발견되는 분리를 비방한다. 그녀는 절대충성을 요구한다. '작은 패거리' (petit clan)의 정통성을 해치는 분파정신이나 이단적 생각을 일소해버린다.

무슨 이유로 이 거룩한 베르뒤랭 살롱과 거룩한 콩브레 간의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콩브레의 신들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마르셀의 신들은 그의 부모와 위대한 작가인 베르고트이다. 그들은 '멀리 있는' 신들이어서 그들과의 형이상학적 경쟁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화자 주변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어디에서나 외면적 간접화를 찾아볼 수 있다. 프랑수아즈의 신들은 부모와 특히 레오니 대고모이다. 어머니의 신은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우리와 구분짓는 존경과 숭배의 벽을 통과하지 않으려고 그를 너무 뚫어지게 바라보지 않는다. 아버지의 신은 올림푸스의 신인 우호적인 노르푸아 씨이다. 이 신들은 언제나 만날 수 있고 언제나 신도들의 부름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언제나 합리적인 요구를 들어줄 태세가 되어 있지만, 좁힐 수 없는 정신적인 거리, 형이상학적 모든 경쟁을 금지하는 거리에 의해 인간들과는 분리되어 있다. 「장 상퇴유」에 나오는 콩브레의 밑그림을 이루는 몇 페이지들 중 하나에서 집단적인 외면적 간접화의 진정한 알레고리를 찾아볼 수 있다. 중산층 유년기의 거의 봉건적인 세계에서 중개자의 상징은 한 마리 백조이다. 닫히고 보호된 이 세계의 지배적인 느낌은 기쁨이다.

기쁨을 누리면서...... 눈부신 온몸에 빛과 기쁨을 가득 싣고 유유히 강물 위를 떠다니는 백조는... 주변의 기쁨을 전혀 방해하지 않으면서 기쁨을 느끼는 자신의 행복한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의 여유롭고 고요한 움직임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마치 귀부인이 기쁨에 잠긴 자신의 하인들을 기쁘게 바라보고 미소를 지으며 그들 곁을 지나가지만, 그들의 즐거움을 깔보지도 방해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자기가 지나가는 주변에 온화한 호감과 위엄있는 매력만 발산하는 것과도 같다. (인용자 강조)

그런데 베르뒤랭 살롱의 신들은 어디에 있는가? 답변은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우선 부차적인 신들이 있는데, 그들은 이 살롱을 드나드는 화가들과 음악가들 그리고 시인들이다. 이들은 지고의 신(神)인 이예술(ART)을 어느 정도 일시적으로 체현하고 있는데, 신성의 가장 사소한 발현만으로도 베르뒤랭 부인을 황홀감으로 떨게 하기에 충분하다. 공식적인 숭배가 주목받지 못할 염려는 없다. '문외한들'과 '따분한 사람들' (les ennuyeux)을 파문하는 것은 그러한 명목에서이다. 신성 모독은 콩브레에서보다 훨씬 더 혹독하게 벌해진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 추문을 일으킨다. 그래서 콩브레에서보다 베르뒤랭 집안에서 신앙심이 더 강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싶어진다.

따라서 두 개의 '닫힌 세계' 사이의 차이, 즉 살롱의 더욱 엄격한 폐쇄성은 외면적 간접화의 강화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외관상으로 제시된 결론은 그러하다. 그러나 외관이란 허위일 수 있으므로 소설가는 이 결론을 거부한다. 베르뒤랭 집안에서 실제적인 아무런 힘도 지니지 못한 외면적 간접화의 신들 뒤에는 내면적 간접화의 진짜 신들, 사랑의 신이 아닌 증오의 신들이 숨어 있다. 스완의 추방은 공식적인 신들의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실제로는 거기에 무자비한 중개자, 즉 베르뒤랭 부인에게 문을 닫아버렸으며 느닷없이 어느 날 스완이 그 세계에 속해 있음이 밝혀진 거만한 게르망트 집안에 대한 보복조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여주인의 진짜 신들이 군림하는 곳은 게르망트살롱이다. 하지만 그녀는 공공연하게든 은밀하게든 간에 자신의 신들이 요구하는 숭배를 바치느니 차라리 자살하고 말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그녀는 열광적이면서도 허위인 열정으로 예술이라는 가짜 종교의식을 거행한다.

콩브레에서 베르뒤랭 살롱에 이르기까지, '폐쇄된 작은 세계의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구조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들이 강화되고 강조되었을 뿐 아니라, 말하자면 그 외관이 어느 때보다도 더욱 눈에 띄게 되었다. 미라가 된 얼굴이 생전의 얼굴을 희화하고 그 윤곽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살롱은 콩브레의 유기적 통일성을 희화한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구조의 구성요소들은 양쪽 모두에서 동일하지만 등급이 다르다. 콩브레에서는 야만인들에 대한 부정이 언제나 신들에 대한 긍정에 종속된다. 베르뒤랭 집안에서는 정반대이다. 결합의 의식은 위장된 분리의 의식이다. 그들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의식을 거행하는 이들과 정신적 유대감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식을 거행하지 않는 사람들과 구분되기 위해서 치르던 의식을 더 이상 거행하지 않는다. 전능한 중개자에 대한 증오가 신도들에 대한 사랑보다 우세하다. 살롱의 존재에서 증오의 표명이 차지하는 지나치게 큰 자리는 형이상학적 진실의 유일하지만 뚜렷한 징후이다. 진실이란 증오의 대상인 외부인들이 진정한 신들이라는 사실이다.

외관상으로는 거의 동일해 보이지만 사실은 간접화의 아주 다른 두 가지 유형이 숨겨져 있다. 이제 우리가 살피고 있는 외면적 간접화에서 내면적 간접화로의 이행은 더 이상 개인의 차원이 아닌 폐쇄된 작은 세계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콩브레의 어린아이의 사랑은 어른들의 증오심에 찬 경쟁심, 속물들과 연인들 사이의 형이상학적 적대심으로 대체된다.

집단의 내면적 간접화는 개인적 간접화의 특성을 고스란히 복사하고 있다. '자기들끼리' (entre soi) 있다는 행복감은 자신이 된다(être soi)는 행복감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밖으로 드러나는 베르뒤랭 살롱의 공격적 통일성은 단순한 외관에 불과하다. 살롱은 스스로에 대한 경멸감만 지니고 있다. 이 경멸감은 불행한 사니에트(Saniette)를 피해자로 삼은 박해의 형태로 드러난다. 이 인물은 베르뒤랭 살롱의 순수한 영혼이라 할 수 있는 신도 중의 신도이다. 그는 살롱이 스스로 표방하는 대로라면 마땅히 그가 해야 할 역할, 즉 콩브레에서 레오니 대고모의 역할과 약간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지만 칭송받고 존경받는 대신 사니에트는 욕만 잔뜩 얻어먹는다. 그는 베르뒤랭 집안의 놀림감이다. 살롱은 사니에트라는 인물을 통해 스스로를 경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콩브레와 살롱생활 사이의 거리는 '진짜' 신들과 '가짜' 신들 사이의 경계를 구분짓는 거리가 아니다. 독실한 신자와 냉엄한 진실을 숨기는 데 유익한 거짓을 구분짓는 거리 역시 아니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처럼 신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고도 말하지 말자. 신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가까이 있다. 여기서 신낭만주의적 사고와 소설의 천재성 간의 불일치는 아주 명약관화하다. 신낭만주의 사상가들은 부르주아 세계에서 공식적인 가치에 바치는 숭배와 퇴물이 되어버린 우상들에게 바치는 숭배가 지닌 겉치레를 요란하게 비난한다. 자신들의 통찰력에 우쭐한 사상가들은 이러한 초기의 관찰 이상을 절대 넘어서지 못한다. 그들은 성스러움의 원천이 무조건 고갈되었다고 믿는다. 그들은 부르주아의 위선이 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오직 소설가만이 공식적 숭배의 기만적인 가면을 들추고 그 밑에 숨겨진 내면적 간접화의 신들을 찾아낸다. 철학자들과는 달리 프루스트와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성스러움이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되고 타락한 어떤 성스러움이 삶의 원천을 점차 오염시키고 있다고 규정한다.

콩브레에서 멀어질수록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통일성은 증오라는 부정적인 통일성, 이중성과 다중성을 숨기고 있는 가짜 통일성 쪽으로 발전한다.

그렇기 때문에 콩브레는 단지 하나로 충분하지만 경쟁적인 살롱들은 여러 개가 필요하다. 우선 베르뒤랭 살롱과 게르망트 살롱이 있다. 살롱들은 상호간의 기능들로서 존재한다. 이중 간접화를 분리시키는 동시에 결합시키는 집단들의 상호관계에서 개인들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변증법과 비슷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발견할 수 있다. 베르뒤랭 살롱과 게르망트 살롱은 사교계의 지배권을 놓고 암투를 벌인다. 게르망트 공작부인은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대부분 지배권을 장악한다. 거만하고 냉담하고 빈정거리며 얼굴의 윤곽이 맹금을 닮은 공작부인이 행사하는 지배가 매우 절대적이어서 그녀는 거의 모든 살롱들의 중개자 같은 존재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지배는 모든 지배가 늘 그렇듯이 공허하고 추상적임이 밝혀진다. 게르망트 부인이 자신의 살롱을 그곳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볼 수 없음은 당연하다. 만일 부르주아인 베르뒤랭 부인이 공식적으로는 예술 애호가이지만 내심으로는 오로지 귀족계급만을 꿈꾸고 있다면, 귀족인 게르망트 부인은 문학적·예술적 명성만을 꿈꾸고 있다.

베르뒤랭 부인은 게르망트 살롱과의 대립적인 싸움에서 오랫동안 열세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을 완강히 숨긴다. '영웅적인' 거짓말은 다른 데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마침내 결실을 맺기에 이른다. 내면적 간접화의 작용이 요구하는 대로 베르뒤랭 부인은 게르망트 공작의 저택에 입성하게 된다. 공작부인으로 말하자면, 이 여주인은 지나치게 무감각해져서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고 명성을 낭비하다가 결국 사교계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잃는다. 소설의 법칙은 이러한 이중의 반전을 요구한다.

콩브레는 언제나 가부장 체제로 묘사되는데, 그 체제는 독자적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강압적인지 자유로운지 알 수가 없다. 반대로 베르뒤랭 살롱은 강력한 독재이다. 여주인은 우민정치와 잔혹성을 교묘하게 섞어서 다스리는 독재국가의 원수이다. 콩브레가 불러일으키는 충성심을 떠올릴 때 프루스트는 애국심에 관해 말하고, 베르뒤랭 살롱에 관심을 보일 때 그는 국수주의에 관해 말한다. 애국심과 국수주의 간의 차이는 콩브레와 살롱들 간에 존재하는 미묘한 근본적인 차이를 매우 잘 나타낸다. 애국심은 외면적 간접화에 속하고 국수주의는 내면적 간접화에 속한다. 애국심은 이미 자신에 대한 사랑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영웅과 성인들에 대한 진심어린 숭배이다. 숭배의 열성도는 다른 나라들과의 경쟁심에 달려 있지 않다. 반대로 국수주의는 그러한 경쟁심의 결과이다. 국수주의는 증오, 즉 타인에 대한 은밀한 숭배에 근거한 부정적인 감정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끝부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베르뒤랭살롱은 사교계 극단주의의 사령부가 된다. 신도들 전원이 여주인의 호전성을 모방한다. 브리쇼(Brichot)는 파리의 큰 신문에 호전적인 시평(時評)을 게재한다. 모두가, 심지어는 바이올린 주자 모렐까지도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를 원한다. 사교계의 국수주의는 시민과 나라의 국수주의에서 그 표현을 보충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국수주의의 이미지는 단순한 외관 이상이다. 소우주로서의 살롱과 대우주로서의 전쟁중인 나라 사이에는 한 단계의 차이밖에는 없다. 욕망은 동일하다. 우리를 끊임없이 소우주에서 대우주로 넘어가게 만드는 은유들이 우리의 관심을 구조의 동일성으로 이끌어간다.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관계는 게르망트 살롱에 대한 베르뒤랭 살롱의 관계와 같다. 그런데 '따분한 자들'의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베르뒤랭 부인은 마침내 게르망트 공작과 결혼하여 모든 것을 가지고 적진으로 들어간다. 사교계의 국수주의와 나라의 국수주의 간의 빈틈없는 대응관계는, 소우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반전 '배반'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에 대응하는 것을 대우주의 영역에서 찾아보게 만든다. 만약 이 소설이 우리에게 이러한 대응물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소설이 너무 빨리 끝난 탓에 불과하다. 프루스트가 그의 은유를 보충하게 만들 수도 있었을 사건이 일어나려면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20년 이상을 필요로 한다. 1940년에 어떤 관념적인 국수주의는 의기양양한 독일의 신조를 신봉한다. 그것은 아직 자신의 경계 내에 틀어박혀 있던 대물림한 적에게 머뭇거리며 타협안을 제시할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자들에게 한 세기의 4분의 3 동안 노발대발 화를 내고 난 후이다. 마찬가지로 베르뒤랭 부인도 자신의 '작은 패거리'를 공포에 떨게 만들고 '따분한 자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마음 약한 기색이 보이는 '신도들'을 파문하는 일을 게르망트 공작과 결혼하는 날까지 계속하다가, '신도들' 에게는 살롱의 문을 닫아버리고 포부르 생제르맹의 최악의 속물들에게는 문을 활짝 열어 맞아들인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판결의 집행에 수반되는 판결 이유서(理由書)는 그 시대 분위기의 색조를 띠고 있다. '따분한 자'라는 관례적인 죄과에 '독일 스파이' 라는 죄과가 추가된다. '국수주의'의 미시적 · 거시적 양상들은 거의 구분되지 않을뿐더러 베르뒤랭 부인이 곧 그것들을 혼동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샤를뤼스가 2년 동안 자신의 살롱에서 "끊임없이 염탐하였다"고 모든 방문객들에게 단언한다.

이 문장은 형이상학적 욕망과 증오가 실제 대상에게 가하는 체계적인 왜곡을 기막히게 잘 드러내고 있다. 왜곡이 인식의 주관성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우리는 이 문장이 여주인 자신을 잘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대상인 샤를뤼스 남작을 묘사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즉시하게 된다. 확고부동한 '차이'에서 개인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면, 이문장은 샤를뤼스 남작의 본질을 왜곡하지 않고서는 베르뒤랭 부인의 본질을 드러낼 수 없다. 이 문장은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본질을 포함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문장은 기적을 이루어낸다. 샤를뤼스가 그녀의 살롱에서 2년 동안 끊임없이 염탐하였다고 단언함으로써 베르뒤랭 부인은 그녀 자신을 그려내면서 남작 또한 묘사하고 있다. 샤를뤼스는 절대로 스파이가 아니다. 여주인은 터무니없이 과장하고 있지만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즉 화살이 샤를뤼스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가서 꽂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샤를뤼스는 지독한 패배주의자이다. 그로서는 '허위선전'을 말없이 무시해버리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다. 그는전복적인 말들을 공공연하게 퍼붓는다. 베르뒤랭 부인은 샤를뤼스의 친독일성향(germanisme)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프루스트는 샤를뤼스의 패배주의를 길게 분석한다. 그는 여러 가지 설명을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성애이다. 샤를뤼스는 파리에 우글거리는 미남 군인들에게 가망 없는 욕망을 느낀다. 접근할 수 없는 군인들이 그에게는 '매력적인 형리이다.

그들은 자동적으로 악과 결합된다. 세계를 적들의 두 진영으로 분리하는 전쟁이 매저키스트의 본능적인 이중성을 북돋운다. 악에 결합된 신조(cause)가 사악한 박해자의 것이므로, 독일은 불가피하게 박해받는 선과 결합된다. 독일인들의 용모가 그에게 불러일으키는 전적인 혐오감 때문에 더욱 쉽사리 샤를뤼스는 자신의 신조와 적국의 신조를 혼동한다. 그는 더 이상 그들의 추한 용모와 자신의 용모를 구분하지 못하고, 그들의 군사적 패배와 자신의 사랑의 패배를 구분하지 못한다. 샤를뤼스는 제압당한 독일을 변호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변호한다고 믿는다.

샤를뤼스의 삶의 통일성은 남작의 성생활과 패배주의적 견해 사이의 중간지대인 사교계 생활을 탐구해보면 더욱 명백해진다.

샤를뤼스는 게르망트 집안의 사람이다. 그는 자기 형수인 게르망트 공작부인의 살롱에서 우상숭배의 대상이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특히 평민인 친구들 앞에서 자기 출신계층의 우월성을 주장하지만, 포부르 생제르맹은 부르주아 속물들에게 행사하는 매력만큼 그에게는 매력적이지 못하다. 본래 형이상학적 욕망은 접근 가능한 대상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따라서 남작의 욕망이 이끌리는 쪽은 귀족들이 모이는 포부르가 아니라 천한 '하층계급'이다. 꽤나 저속한 인물인 모렐을 향한 열정은이 '하향적' 속물근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샤를뤼스로 인해 후광을 입은 이 음악가의 저질의 명성이 베르뒤랭 살롱 전체에 파급된다. 상류계급의 인사는 자신이 누리는 은밀한 쾌락의 흔해빠진 배경인 더욱 야한 빛깔의 부르주아 색조를 거의 알아보지 못한다.

국수주의적이고 부도덕하며 부르주아인 베르뒤랭 살롱은 마찬가지로 국수주의적이고 부도덕하며 부르주아인 프랑스라는 좀더 넓은 사악한 장소 한가운데에 있는 사악한 한 장소이다. 베르뒤랭 살롱은 매력적인 모렐을 보호하고 있고, 전쟁 중인 프랑스는 멋진 장교들로 만원이다. 남작은 국수주의적 프랑스가 '자기 집' 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베르뒤랭 살롱이 '자기 집' 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프랑스에서 살고 있으며, 그의 욕망은 그를 베르뒤랭 살롱으로 이끌어간다. 귀족적이며 따분하게 도덕자연하는 게르망트 살롱은, 남작의 사교계 체제에서 사랑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독일이 그의 정치체제에서 수행하는 역할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다. 사랑과 사교계 생활 그리고 전쟁은 완전히 하나이거나 또는 오히려 모순에 빠져 완전히 둘인이 삶에 존재하는 세 개의 원이다. 모든 원들이 서로 대응하면서 남작의 강박적인 논리를 입증한다.

따라서 베르뒤랭 부인의 '국수주의적' 강박관념에는 샤를뤼스의 '반(反)국수주의적' 강박관념이 대립한다. 이 두 강박관념은 거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양식(良識)이 원하듯이 분리하지 못한다. 강박관념이 그들을 무한히 넓은 두 세계에 따로 가두는 것이 아니라 증오심의 일치를 위해 그들을 접근시킨다.

이 두 존재는 동일한 요소들을 결합하지만 그 조직방식은 반대이다. 베르뒤랭 부인은 자신의 살롱에 충실하다고 스스로 주장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게르망트 집안에 가 있다. 샤를뤼스는 게르망트 살롱에 충실하다고 스스로 주장하지만 그의 마음은 베르뒤랭 집안에 가 있다. 베르뒤랭 부인은 '작은 패거리'를 예찬하고 따분한 자들'을 경멸한다. 샤를뤼스는 게르망트 살롱을 예찬하고 '행실이 나쁜 사람들을 경멸한다.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려면 기호들만 뒤바꾸면 된다. 두 인물간의 불화는 훌륭한 부정적 일치이다.

이 대칭적 균형 덕분에 베르뒤랭 부인은 단 한 문장으로 우스꽝스럽지만 인상적인 형태로 자신과 남작의 진실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다. 샤를뤼스를 스파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베르뒤랭 부인으로서는 게르망트 집안의 경멸에 대해 은밀하게 항의하는 것이다. '작은 패거리의 조직에 관한 상세한 보고' 가, 독일 참모부가 보기에 어떤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베르뒤랭 부인의 광기로 보이지만, 부인의 광기를 면밀히 훑어볼수록 그와 유사한 샤를뤼스의 광기를 보지 못할 위험이 커진다. 베르뒤부인은 건전한 이성(理性)에서 벗어날수록 남작과 가까워진다. 한 사람의 광기는, 상식적으로 사교계 생활과 전쟁 사이에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장벽을 전혀 개의치 않고, 다른 사람의 광기로 날아간다. 베르뒤랭부인의 국수주의가 게르망트 살롱을 향해 있다면, 샤를뤼스의 패배주의는 베르뒤랭 살롱을 향해 있다. 따라서 각자는 예리한 동시에 불완전하게 알고 있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광기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 타인에 대한 인식이 예리한 까닭은 양식을 마비시키는 대상에 대한 물신(物神)숭배를 열정이 물리치기 때문이며, 그러나 동시에 불완전한 이유는 열정이 욕망의 삼각형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열정은 타인의 자만심과 그의 표면상의 자제력 뒤에 감춰진 비참함을 알아보지 못한다.

콩브레는 실제로 자율적이지만 살롱들은 그렇지 못하다. 살롱들은 더욱 신랄하게 자율성을 요구하는 만큼 더욱 비자율적이다. 내면적 간접화의 영역에서 집단은 개인이나 마찬가지로 더 이상 절대적인 준거의 중심이 될 수 없다. 살롱들은 경쟁하는 살롱들과의 대립관계로서만, 그리고 각각의 살롱이 하나의 요소로 편입되는 총체성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외면적 간접화의 영역에서는 '폐쇄된 작은 세계들' 이 있을 뿐이다. 관계는 너무나 느슨해서 엄밀한 의미의 소설세계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17세기 이전의 '유럽의 합주(concert)'가 있을 뿐이다. 이 '합주'는 국가 차원의 경쟁의 결과이다. 국가들은 서로에게 사로잡혀 있다. 그들간의 관계는 날로 더욱 긴밀해지지만 흔히 부정적인 형태를 지닌다. 개인의 매혹이 개인주의를 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집단의 매혹은 '집단적 개인주의'를 만들어내며, 그것은 국가주의, 국수주의 그리고 자족정신(自足精神, esprit d'Autarkie)이라 지칭된다.

개인주의의 신화와 집단주의의 신화들이 동류인 이유는 동일자의 동일자에 대한 대립을 항상 은폐하기 때문이다.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와 마찬가지로 자신들끼리이고 싶어하는 의지는 타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고 있다.

'폐쇄된 작은 세계들'은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중성자들이다. 살롱들은 핵입자들처럼 서로 끌어당기는 동시에 밀치는 양성자와 음성자이다. 더 이상 단자들(monades)')은 없지만 폐쇄된 거대한 세계를 형성하는 모의(模擬)단자들이 있다. 콩브레의 통일성과 마찬가지로 빈틈없는 이 세계의 통일성은 정반대의 원리에 근거한다. 콩브레에서 가장 강한 원리는 사랑이지만, 살롱들의 세계를 태어나게 하는 것은 증오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지옥에서 증오의 승리는 압도적이다. 노예들은 주인들 주위를 맴돌고 있으며, 주인들 자신도 노예들이다. 개인들과 집단들은 불가분의 관계인 동시에 고립되어 있다. 위성은 혹성의 둘레를 돌고 혹성은 항성의 둘레를 돈다. 우주계와 같은 소설세계의 이미지는 프루스트의 소설에서 자주 반복되며, 또 이 이미지는 궤도를 계산하고 법칙을 끌어내는 천문학자로서의 소설가의 이미지를 함께 지니고 다닌다.

바로 내면적 간접화의 이러한 법칙들이 소설세계에 일관성을 부여한다. 이 법칙들을 알아야만 비아체슬라브 이바노프(Vyacheslav Ivanov)가 자신의 저작에서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제기했던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어떻게 분리가 결합의 원리가 될 수 있으며, 어떻게 증오가 증오하는 사람 자신들을 함께 묶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콩브레에서 살롱들의 세계로의 이동은 감지할 수 있는 중간단계 없이 계속된다. 마치 매저키스트가 선을 악에 대비시키듯이 외면적 간접화를 내면적 간접화에 대비시켜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콩브레를 좀 더 가까이에서 관찰한다면 사교계 살롱들의 모든 결함을 발생상태에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스완에 대한 대고모의 빈정거림은 베르뒤랭 부인과 게르망트 부인이 휘두르는 징벌의 초벌소묘에 지나지 않는 훨씬 가벼운 것이다. 스완에 대한 악의 없는 대고모의 하찮은 박해는 사니에트에 대한 베르뒤랭 집안의 잔인성과 자기의 절친한 친구인 스완에 대한 게르망트 부인의 잔인한 냉담함을 예시하고 있다. 마르셀의 어머니는 부르주아답게 스완부인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화자 자신도 프랑수아즈라는 인물 안의 성스러움을 모독하는데, 그는 그녀가 '기만에서 깨어나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레오니 대고모의 고지식한 신앙심을 파괴하는 데 열중한다. 레오니 대고모는 자신의 신비스러운 위엄을 기화로 삼아 프랑수아즈와 욀라리(Eulalie) 사이에 무익한 경쟁심을 조장하고 스스로 잔인한폭군으로 변한다.

부정적인 요소가 콩브레에도 이미 존재한다. 그 덕분에 폐쇄된 작은 세계는 자신 속에 갇히며, 위험한 진실의 제거가 보장된다. 바로 이 부정적인 요소가 점점 커져서 마침내는 사교계 살롱들에서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게 된다. 또한 이 부정적인 요소는, 늘 그렇듯이, 자만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자만심 때문에 대고모는 스완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자만심 때문에 마르셀의 어머니는 스완 부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자만심은 이제 막 생겨나는 자만심이기는 하지만, 그 본질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 파괴작업은 이제 겨우 시작이지만 결정적인 선택은 이미 이루어졌다. 소돔과 고모라는 콩브레에 이미 잠재해 있다.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비탈길이 이끄는 대로, 꾸준히 가속이 붙으면서 우리를 신비의 중심에서 계속 멀어지게 하는 움직임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 이 움직임은 늘 침대에 누워서 지내는 레오니 대고모에게는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콩브레의 신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온갖 마귀 쫓기 의식에 압도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어린아이에게는 매우 빠른 것이다.

한번도 다다른 적이 없으면서 끊임없이 멀어지기만 하는 중심이란 어떤 것인가? 프루스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지만, 그의 작품의 상징적 의미들이 그를 대신해서, 때로는 그의 의도에 반(反)해서 말을 한다. 콩브레의 중심은 '도시 전체를 요약하고 도시를 대표하여 이 도시에 관해서 그리고 도시를 위해서 먼 곳에 말을 하는 교회이다. 교회의 중심부에는 생-틸레르의 종루가 있는데, 그것이 마을에서 지니는 의미는 집안에서 레오니 대고모의 방과 같은 것이다. 이 종루는 '마을의 갖가지 일들, 시시각각, 온갖 견해에 그 모습을 부여하고 관(冠)을 씌우고 축성'을 내린다. 콩브레의 신들은 모두가 이 종루 밑에 모여 있다.

우리가 되돌아와야 하는 곳은 변함없이 이 종루이며, 신의 몸이 인간의 무리들 속에 숨어 있다 한들 내가 인간들과 혼동할 리 만무한 그 신이 뜻밖에 나타나 내 앞에 치켜세운 신의 손가락과도 같은 첨탑하나로 온 마을의 집들을 총괄하면서 온갖 것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도 이 종루이다.

종루는 어디에서나 보이지만 교회는 언제나 텅 비어 있다. 외면적 간접화에 속하는 지상의 인간 신들은 이미 우상들이 되었다. 그들은 종루의 수직에 참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아주 가까이 있어서 콩브레와 교회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중개자가 욕망하는 주체와 가까워짐에 따라 초월은 이 수직에서 점점 멀어진다. 활동을 수행하는 것은 굴절된 초월이다.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게르망트 쪽」 「소돔과 고모라 「갇힌 여인」과 「사라진 여인이라고 제목이 붙은 일련의 동심원들에서, 이 굴절된 초월은 화자와 그의 소설세계를 더욱 더 종루에서 멀리 이끌어갈 것이다. 신비주의적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마음의 동요는 더욱 고통스럽고 격렬하고 무의미해질 것이며, 이러한 움직임을 반전시키게 될 「되찾은 시간」이 올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것이 생-틸레르의 까마귀들이 그들의 저녁나절의 추적에서 예시하고 있는 바로 도주와 회귀라는 이중의 움직임이다.

탑에 난 두 개의 창문으로, (종루가) 일정한 간격으로 까마귀들을 풀어 날려보내자 새들은 한동안 울부짖으며 공중에서 맴을 돈다. 마치 여태까지 보고도 못 본 척 까마귀들이 깡총거리며 뛰놀게 내버려두던 오래된 자갈밭이 갑자기 살기에 부적절한 곳이 되어버려 극심한 불안의 요소들을 발산하면서 까마귀들을 후려쳐 쫓아버리기라도 한 듯이. 그런 다음, 보랏빛 빌로드 같은 저녁하늘에 사방으로 줄을 긋고 나서, 까마귀들은 돌연 조용해지더니 다시 돌아와, 불길한 곳이었다가 다시 호의적인 장소가 된 탑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 *

프루스트의 작품은 사회학적 가치가 있는가? 이 점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인간희극」(La Comédie bumaine) 13)이나 「루공마카르 총서(Rougon-Macquart)')보다 열등하다고 비평가들은 흔히 되풀이 말하곤 한다. 프루스트는 유서깊은 귀족계급에만 관심이 있으며, 따라서 그의 작품은 '규모와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불리한 평가 뒤에는 소설예술에 대한 사실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인 해묵은 개념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천재적인 소설가는 인간과 사물에 대한 시시콜콜한 목록을 작성하여 우리에게 경제적·사회적 현실에 대해 가능한 한 완벽한 파노라마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면, 프루스트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보잘것없는 소설가가 되리라. 비평가들은 '그의 조사(enquéte)가 포부르 생제르맹에 국한 되었음을 비난하지만 그것 또한 그를 칭찬하는 셈이 된다. 프루스트는 체계적인 어떠한 연구에도 열중한 적이 없으며, 그들이 그를 위해 남겨둔 좁은 영역에서마저도 그러하다. 그는 우리에게 그저 막연히 게르망트 집안 사람들은 매우 부유한데 다른 사람들은 몰락했다고 말한다. 성실한 소설가가 우리를 산더미 같은 서류 · 유언장 · 재산목록 · 회계장부 · 집행영장 · 유가증권과 채권들 속으로 밀어넣는 곳에서 프루스트는 차 한 잔에 대한 다소간의 잡담을 되는 대로 늘어놓는다. 게다가 그런 이야기도 결코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늘상 다른 것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이다. 거기에 앙케트라는 거창한 명칭이 걸맞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프루스트는, 단정적인 어조로든 잡다한 물품들의 열거로든 간에, 자기가 '자료를 철저히 조사했다'는 암시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사회학자의 관심을 끄는 어떠한 질문에도 마르셀 프루스트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이 소설가가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무관심은, 그것이 비난받든 칭찬받든 간에 언제나 부정적인 행위, 특별한 미학을 위해 삭제한 형태, 고전비극에서 천한 단어들의 추방과도 같은 어떤 것, 이런 것들로 남아 있다.

우리는 소설예술에 대한 이러한 제한적인 개념을 거부할 만큼 충분히 잘 알고 있다. 소설가의 진실은 총체적이다. 그것은 개인과 집단의 삶의 모든 양상을 포괄한다. 비록 소설이 어떤 양상을 소홀히 다룬다 하더라도 소설은 틀림없이 하나의 전망을 가리킨다. 사회학자들이 프루스트의 소설에서 자신들의 방식을 환기시키는 것을 전혀 찾아내지 못하는 이유는 소설의 사회학과 사회학자들의 사회학 사이의 대립이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립은 해결과 방법에서뿐만 아니라 풀어야 할 문제에 대한 자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회학자가 보기에 포부르 생제르맹은 틀림없이 사회적 풍경의 미세하지만 실재하는 지역이다. 경계가 너무나 분명해서 아무도 경계에 관해서는 전혀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경계는 프루스트의 작품을 읽어나갈수록 모호해진다. 화자가 마침내 게르망트 집안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는 무척이나 실망한다. 그는 그곳 사람들도 다른 집안의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말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포부르의 본질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게르망트 살롱은 자신의 개체성을 상실하고 이미 유명해진 사교계의 불분명한 회색빛에 합류한다.

포부르를 전통에 의해 규정할 수는 없다. 게르망트 공작처럼 중요하고통속적인 인물은 전통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포부르를 세습에 의해 규정할 수도 없다. 르루아(Leroi) 부인 같은 부르주아가 빌파리시스 부인보다 사교계에서 더 탁월한 지위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곳에 재물이 넘쳐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몰려든다 할지라도, 19세기 말엽 이후로 포부르는 정치력이나 재정력의 진정한 중심을 이루지 못한다. 포부르를 특별한 사고방식에 의해서도 역시 구분지을 수 없다. 그곳 사람들은 정치에서는 보수주의자, 예술에서는 복고주의자, 문학에서는 편협한 사람들이다. 게르망트 살롱을 20세기 초엽의 무위도식하는 부유한 여타 살롱들과 차별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포부르 생제르맹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학자라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눈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 이 소설은 무익할 뿐 아니라 위험할 수 있다. 사회학자가 연구의 대상을 포착했다고 믿는 순간 대상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린다. 포부르는 계급도 집단도 환경(milieu)도 아니다. 사회학자들간에 통용되는 어떠한 범주도 포부르에 적용될 수 없다. 포부르는 어떤 핵입자들과 유사해서, 과학자의 기구를 들이대면 사라져버린다. 이 대상은 따로 분리시킬 수 없다. 100년 전부터 포부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포부르는 가장 강렬한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다. 포부르는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에서 끝나는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속물은 알고 있다. 그가 주저하는 법은 없다. 마치 속물에게는 육감이 있어서 한 살롱의 사교계적 가치를 정확히 측정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포부르는 속물에게는 존재하지만 비속물(non-snob)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비속물이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기 위해서 속물의 증언을 전적으로 신임하지 않는다면 비속물에게는 포부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

프루스트가 너무 협소한 환경 속에 틀어박혔다고 비난을 받지만, 이 협소함을 그보다 더 잘 알았으며 더 잘 드러내 보였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프루스트는 우리에게 '큰 세계'의 무가치함을 지적·인간적인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점에서도 말하고 있다. “사교계의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이 지닌 사회적 중요성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다.” 프루스트는 포부르 생제르맹의 '탈신화화'를 민주적인 그의 비판자들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진척시킨다. 그들은 사실상 마법을 지닌 대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프루스트는 우리에게 그런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반복한다. “세상은 허무의 왕국이다.” 그의 단언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소설가는 포부르의 객관적인 허무와 속물의 시선에 비친 경이로운 현실 사이의 대조를 끊임없이 강조한다.

이 소설가는 대상의 보잘것없는 실상에도 변형된 대상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변형의 과정에 관심을 기울인다. 위대한 소설가란 언제나 그러하다. 세르반테스는 이발사의 대야에도 맘브리노의 투구에도 흥미가 없다. 세르반테스를 열광시키는 것은 돈키호테가 단순한 이발사의대야를 맘브리노의 투구로 혼동한다는 사실이다. 마르셀 프루스트를 열광시키는 것은 속물이 포부르 생제르맹을 누구나 들어가기를 꿈꾸는 멋진 왕국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사회학자와 자연주의 소설가는 단 한 가지 진실만을 원한다. 이 진실을 그들은 인식하는 모든 주체에게 강요한다. 그들이 대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욕망과 무욕(無慾)의 상반된 인식들간의 무의미한 타협일 뿐이다. 이 대상에 대한 신빙성은 모든 모순들을 약화시키는 대상의 중간입장에서 유래한다. 모순들의 뾰족한 부분들을 이 천재소설가는 무디게 하는 대신 가능한 한 예리하게 버린다. 그는 욕망으로 인해 생긴 변모를 강조한다. 자연주의자는 이러한 변모를 인식하지 못하는데, 그 자신의 욕망을 비판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삼각형의 욕망을 폭로하는 소설가는 현재 속물이 아니지만 과거에 속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분명히 과거에 욕망했었으나 이제는 욕망을 느끼지 않는다.

포부르는 속물에게는 마법의 투구이지만 비속물에게는 이발사의 대야이다. 우리는 날마다 재물 · 행복 • 권력 · 석유 등등의 '구체적인' 욕망이 이 세계를 이끌어간다고 반복해서 듣는다. 이 소설가는 겉보기에 대수롭지 않은 질문을 하나 던진다. “속물근성이란 무엇인가?"

속물근성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제기함으로써 이 소설가는 나름의 방식으로 사회적 기계장치를 작동시키는 숨겨진 태엽에 대해 자문한다. 그런데 학자들은 어깨만 으쓱할 뿐이다. 이 질문이 그들에게는 너무 시시한 것이다. 그들에게 답변을 강요한다면 그들은 도망가버린다. 그들은 이 소설가가 불순한 이유로 속물근성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주장할 것이다. 소설가 자신도 한 속물이다. 오히려 그가 속물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어쨌든 질문은 그대로 남아 있다. 속물근성이란 무엇인가?

속물은 구체적인 어떠한 이득도 추구하지 않는다. 속물의 쾌락과 특히 고통은 순전히 형이상학적이다. 현실주의자도 이상주의자도 마르크스주의자도 이 소설가의 질문에 답변하지 못한다. 속물근성은 과학의 톱니바퀴에 들어가 기계를 고장내는 작은 알갱이이다. 속물은 허무를 원한다. 사람들간의 구체적인 차이들이 사라지거나 뒷전으로 밀려나면 사회의 어떠한 분야에서도 추상적인 경쟁관계가 나타나지만,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것을 예전의 갈등과 혼동하여 그 형태에 결합시킨다. 속물의 추상적인 불안과 계급의 억압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속물근성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믿고 있듯이 옛날 계급사회의 산물이 아니라, 현재에 그리고 더욱 민주적인 미래에 속한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살던 시대의 포부르 생제르맹은 사회의 모든 계층을 다소 빠르게 변모시키던 진보의 최선두에 있다. 이 소설가가 속물에게 시선을 돌리는 까닭은 속물의 욕망이 보통사람들의 욕망보다 '더 많은 허무'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속물근성은 이러한 욕망의 풍자화이다. 모든 풍자가 다 그렇듯이 속물근성도 특성을 강조하고 있어서, 우리가 원본에서는 결코 볼 수 없을 것을 보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포부르 생제르맹이라는 가짜 대상은 소설의 폭로에서 특권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 역할은 현대물리학에서 라듐의 역할에 비유될 수 있다. 라듐이 자연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포부르 생제르맹이 프랑스 사회에서 차지하는 자리만큼이나 제한된 것이다. 그러나 매우 희귀한 이 원소가 예전 물리학의 어떤 원리들을 거짓말로 만들어버리고 점점 과학의 모든 전망을 송두리째 뒤집는다. 속물근성도 마찬가지로 고전사회학의 어떤 원리들을 거짓말로 만든다. 속물근성은 과학적 사유가 전혀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행동의 동기들을 폭로한다. 프루스트의 경우에 소설의 천재성은 초월된 속물근성이다. 그의 속물근성이 이 소설가를 추상적인 한 사회의 가장 추상적인 장소로, 가장 파렴치하게 무가치한 가짜 대상으로, 다시 말해서 소설의 폭로가 가장 유리한 장소로 인도한다. 돌이켜보면 속물근성은 이 천재의 초기 행보와 혼동된다. 그는 자신의 행보에 대한 확실한 판단과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을 지닌다. 이 속물은 엄청난 희망으로 흥분했었으며, 엄청난 실망으로 괴로워했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욕망의 대상과 무욕(nondésir)의 대상 사이의 간격이 그의 관심을 끌게 되고, 그의 관심은 새로운 욕망이 생길 때마다 매번 그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극복한다.

속물근성에 대한 풍자의 효력은 소설가에게 공헌한 다음 틀림없이 독자에게도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독서행위는 소설이라는 형태를 가진 정신적인 체험을 다시 체험하는 일이다. 자신의 진실을 획득하고 나자 이 소설가는, 라듐이라는 '특별한' 원소에서 추출한 진실들을 '평범한' 원소들에 확대적용시키는 물리학자처럼, 포부르 생제르맹에서 다시 사회적 삶이 좀더 활발한 지역으로 내려갈 수 있게 된다. 부르주아 계층과 심지어 서민계층의 대부분의 단체들(cercles)에서 마르셀 프루스트는 욕망의 삼각형 구조, 적대자들의 무익한 대립, 숨은 신에 대한 증오, 추방 그리고 내면적 간접화의 불모화시키는 금기들을 다시 만난다.

소설의 진실의 점진적인 확산은 속물근성이라는 용어를 가장 다양한 종류의 직업과 각양각색의 계층에까지 확장시킨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교사들의 속물근성, 의사들의 속물근성, 사법관들의 속물근성 그리고 심지어 가정부들의 속물근성까지 등장한다. 속물근성이라는 단어의 프루스트적 용법들은 '관념적인' 한 사회학을 규정짓는데, 이 사회학은 보편적으로 적용되지만 사회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나태한 계층에 그 원리가 특히 강하게 효력을 발휘하는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프루스트가 사회현실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당찮은 말이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오직 사회현실에 대해서만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삼각형의 욕망의 소설가에게는 내면의 삶이 이미 사회적이기 때문이며, 사회적 삶이란 항상 개인의 욕망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루스트는 콩트(Comte)'의 낡은 실증주의에 근본적으로 맞서고 있다. 그는 또한 마르크스주의에도 반대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소외(aliénation)는 형이상학적 욕망과 비슷하다. 그러나 소외는 외면적 간접화와 내면적 간접화의 상위단계에만 해당된다.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분석은 다른 분석들보다 더 심도있지만, 새로운 환상으로 인해 기초부터 잘못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부르주아 사회를 제거함으로써 모든 소외를 제거할 수 있으리라 상상한다. 그는 형이상학적 욕망의 가장 강렬한 형태들, 즉 프루스트와 도스토예프스키가 묘사한 형태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대상에 속고 있다. 그의 유물론은 부르주아의 이상주의를 넘어선 상대적인 진전에 불과하다.

'욕구' (besoins)가 충족되고 또 구체적인 차이가 사람들간의 관계를 지배하지 않게 되자, 프루스트의 작품은 예전 형태들을 잇따르는 새로운 소외의 형태들을 묘사한다.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속물근성은 동일한 수입을 지닌 개인들, 동일한 사회계급에 속하는 개인들 그리고 동일한 전통에 속하는 개인들 사이에 추상적인 칸막이들을 세운다. 미국 사회학의 어떤 직관은 프루스트의 관점의 풍요로움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이 전개한 '현시소비'(顯示消費, conspicuous consumption)"의 개념은 이미 세모꼴이다. 이 개념이 유물론의 이론에 치명타를 가한다. 소비된 대상의 가치는 오직 타인의 시선에 달려 있다. 타인의 욕망만이 욕망을 발생시킨다. 좀더 최근에는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과 밴스 패커드(Vance Packard)' 같은 사람들이, 마르셀 프루스트가 묘사한 계층들과 마찬가지로 욕구에서 해방되어 더욱 일률적이 된 미국의 거대한 중산계급 역시 추상적인 여러 칸으로 나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중산계급은 서로 완벽하게 같으면서 대립하는 통일성들(unités) 사이에 금기와 추방을 증가시킨다. 하찮은 차별이 끔찍해 보이고 중차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타인이 변함없이 개인의 삶을 지배하지만 이 타인은 마르크스주의의 소외에서처럼 계급이라는 압제자가 아니라, 같은 층의 이웃, 학급의 친구, 직업상의 경쟁자가 된다. 타인은 나에게 가까워질수록 언제나 더욱 매혹적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기서 문제는 사회의 부르주아 구조와 관련된 '잔류하는' 현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소비에트 사회에 나타난 유사한 현상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이 추론은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학자들이 이러한 현상에 직면하여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계급이 폐지된다"고 단언할 때, 그들은 혼란을 야기시킬 뿐이다. 계급은 폐지되지 않는다. 예전의 소외가 사라지는 곳에 새로운 소외가 나타난다.

사회학자들의 가장 과감한 직관에서조차도, 그들은 절대로 대상의 횡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 모두가 소설의 반성(réflexion)에 미치지 못한다. 그들은 해묵은 계급의 차이, 외부에서 강요된 차이를 형이상학적 욕망이 유발시킨 내면적 차이와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한소외에서 다른 소외로의 이행이 오랜 기간의 과도기를 거치는 동안 이중 간접화가 전혀 외관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은밀히 진행되는 만큼 혼동은 더 쉽게 이루어진다. 사회학자들이 형이상학적 욕망의 법칙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물질적 가치 자체도 결국 이중 간접화에 휩쓸린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속물은 구체적인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다. 소설가는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개인적 · 집단적 삶의 모든 단계에서 속물근성과 대칭을 이루는 헛된 대립관계를 찾아낸다. 그는 우리에게 개인의, 직업의, 한 국가의, 심지어 국가들 상호간의 삶에서도 추상 개념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세계대전이 20세기에 일어난 국가들간의 마지막 충돌이 아니라 최초의 추상적인 대충돌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요컨대, 마르셀 프루스트는 형이상학적 욕망의 역사를 스탕달이 포기한 지점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는 이중 간접화가 국경을 뛰어넘어, 우리가 오늘날 발견하게 될 세계적 규모의 차원을 획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군사작전 용어를 빌려서 사교계의 적대관계를 묘사한 연후에, 프루스트는 사교계의 적대관계를 표현하는 용어로 군사작전을 묘사한다. 조금 전의 이미지는 대상이 되고 대상은 이미지가 된다. 현대시(詩)에서처럼 이미지의 두 용어는 호환互換)이 가능하다. 미시세계에서 거시세계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동일한 욕망이 승리를 거둔다. 구조는 동일하고 단지 구실만 바뀐다. 프루스트의 은유들은 우리의 시선을 대상에서 떼어내 중개자에게로 고정시킨다. 즉 우리의 시선이 직선의 욕망에서 삼각형의 욕망으로 향하게 만든다.

샤를뤼스와 베르뒤랭 부인은 사교계의 생활과 세계대전을 혼동하였다. 소설가는 이 광기를 광기 자체가 이미 '양식'을 넘어섰던 것처럼 넘어선다. 그는 더 이상 두 영역을 혼동하지 않으면서 그 둘을 체계적으로 서로 동일시한다. 따라서 이 소설가는 전문가의 눈에 피상적으로 비칠 우려가 있다. 그들은 그가 대사건들을 '하찮은 동기'로 설명한다고 비난할 것이다. 역사를 진지하게 다루기를 바라는 역사가들은 루이 14세의 어떤 전쟁들을 궁정신하들간의 경쟁관계로 해석한 생 시몽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들은 루이 14세 치하에서 군주의 총애와 관련하여 '하찮은'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무조건적인 하찮음과 재난을 일으키는 하찮음 사이에는 감지할 수 없는 미미한 거리가 있을 뿐이다. 생-시몽이 그것을 모르지 않으며, 소설가 역시 그렇다. 더욱이 크건 작건 간에 '동기들'은 없고 형이상학적 욕망의 끝없이 활동 중인 허무만이 있다. 세계대전은, 살롱들간의 전쟁처럼 형이상학적 욕망의 결과이다. 이 점을 납득하려면 두 진영을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양 진영 모두에서 동일한 분노, 동일한 연극적 제스처를 볼 수 있다. 담화들도 모두가 서로 비슷하다. 듣는 사람의 의향에 따라 담화를 경탄스럽거나 불쾌한 것으로 만들려면 고유명사를 섞기만 하면 된다. 독일인들과 프랑스인들은 맹목적으로 서로를 모방한다. 샤를뤼스는 텍스트들을 비교해보고 매우 씁쓸한 희극의 효과를 맛본다.

몇 해 전만 해도 우리는 전세계의 속물근성을 보고 웃을 수 있었다. 사교계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소설가가 우리에게는 현대의 공포와 불안에서 까마득히 멀리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의 진전에 비추어 프루스트를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도처에서 대칭을 이룬 집단들이 서로 대립한다. 곡(Gog)과 마곡(Magog) 20)은 열정적으로 서로 모방하고 증오한다. 이데올로기는 은밀히 합의된 강렬한 대립들을 위한 한낱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주의의 인터내셔널과 인터내셔널의 국가주의는 복잡하게 뒤얽힌 혼란 속에서 서로 섞이고 교차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제 모호해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더 잘 이해되었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위대한 소설작품들의 정신적 영향력은 매우 미약하며, 또한 이러한 영향력은, 우리가 아는 바이지만, 작가가 예견했던 방향으로는 거의 절대로 작용하지 않는다. 독자는 자신이 이미 세계에 부여했던 의미를 작품에 투영한다. 이러한 투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쉬워지는데, 왜냐하면 작품이 사회를 '앞질러' 존재하고 사회가 점차 작품을 따라잡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월의 비밀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 소설가는 원래 가장 강렬한 욕망의 존재이다. 그의 욕망이 그를 가장 추상적인 지역과 가장 무가치한 대상으로 인도한다. 따라서 그의 욕망은 거의 자동적으로 그를 사회기구의 정상으로 이끌어간다. 바로 그곳이, 우리가 이미 플로베르에게서 그 점을 주목했듯이, 존재론적 질환이 언제나 가장 극심한 곳이다. 소설가가 지적하는 증상들이 이 사회의 하위계층으로 차츰차츰 퍼질 것이다. 작품에 묘사된 형이상학적 상황에 많은 독자들이 익숙해질 것이며, 소설에 나타나는 대립들은 일상생활에서 정확히 복사될 것이다. 사회 지도층의 욕망을 폭로하는 소설가는 거의 언제나 예언자와도 같다. 그는 점진적으로 보편화할 상호주관적인 구조들을 묘사한다. 프루스트에게 진실인 것은 다른 소설가들에게도 똑같이 진실이다. 위대한 소설작품은 거의 모두가 귀족사회의 매력에 굴복한다. 스탕달의 모든 소설에서 우리는 시골에서 수도로, 중산계급의 삶에서 세련된 삶으로 이행하는 이중의 움직임을 찾아볼 수 있다. 돈키호테의 모험들은 이 주인공을 차츰 귀족사회로 이끌어간다. 「악령」에 나오는 모든 이들의 중개자인 스타브로긴은 귀족이다. 「백치」 「악령」 「미성년」 그리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귀족의' 소설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작품에서 러시아 귀족계급이 맡고 있는 역할을 여러 차례 설명한 바 있다. 귀족계급의 쇠퇴와 정신적인 타락은 농민의 생활을 제외한 러시아의 생활상을 비추는 확대경 노릇을 한다. 언어의 차이와 윤리적 관점의 차이를 고려한다면, 바로 그 점이 정확히 세르반테스와 스탕달과 프루스트의 소설에서 귀족계급이 수행하는 역할이다.

위대한 작품들은 상류사회의 무익한 추상적 관념 속에서 끝을 맺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회가 조금씩 이러한 동일한 추상 관념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폴 발레리와 장-폴 사르트르처럼 다양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프루스트가 경박한 화제를 다루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 소설가는 프랑스를 알지 못하며, 프랑스를 포부르 생제르맹과 혼동한다고 어느 비평가나 거듭 말한다. 비평가들이 옳다고 해야겠지만, 이 범상치 않은 혼동에서 프루스트 창작의 주요 비밀들 가운데 하나를 알아보아야 한다. 사회 지도층을 묘사한 작가는, 그가 형이상학적 욕망을 그저 반영하고 있는가 또는 그것을 폭로하는 데 성공했는가에 따라 가장 피상적일 수도 가장 심오할 수도 있다.

단지 형편없는 작가와 천재작가만이 감히 이렇게 쓴다. “후작부인은 다섯 시에 외출하였다."23) 이러한 모욕적인 진부함 또는 지고의 대담성 앞에서 평범한 재능은 뒤로 물러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