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 <면지>

미지수 x 님 대신 이름을 불러드립니다.



"너의 이름은 <면지>"


매일 아침 출근이랍시고 집안 서재에 꾸며놓은 제법 근사한 사무 공간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책꽂이 위에 놓인 사업자 등록증과 출판사 신고필증을 바라보며 자린고비 영감이 천장에 매달아 놓은 굴비를 바라보듯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쳐다봐도 절대 배가 부르지는 않더라. 오히려 그 종이 두 장은 나에게 심한 정신적 압박을 주었다.

’94%의 무실적 출판사가 될 수는 없어. 반드시 책을 출판하는 6%에 진입하겠어!’

누가 보면 상위 6%인 줄 알겠다. 절대 아니다. 그저 내 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1종의 책을 ‘무사히’ 출간하는 게 유일하게 그 6% 안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출판사의 흥망성쇠(興亡盛衰) 중에서 흥성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쇠망이 되지 말자는 간절함만이 있었다. 머리로 생각한다고 책이 나오지는 않지. 이럴 땐 역시 사수님께 도움을 청해야한다. 출판계 나의 영원한 사수님은 내 첫 번째 책을 담당했던 에디터님이셨다. 내 책 총괄 편집을 마지막으로 다니던 큰 출판사를 퇴사하고 자신의 출판사를 시작하셨다. 다행히 내가 출판사를 하겠다고 고민할 때 ‘왜 너까지 그따위 일을 하냐?’라고 말리지 않고, ‘윤여사님(당시 필명)이라면 해 볼 만하죠. 만약 출판사 시작하면 첫 번째 책 만드는 과정을 도와줄게요’라고 했던 그 말만 굴뚝같이 믿고 시작한 것도 있다. 그래서 바로 대표님께 전화를 했다.

“대표님… 저 출판사 등록했어요.”

“그러면 첫 책 만드셔야죠. 원고는 있나요?”

“제 책으로 만들어보려고요. 다른 몇 출판사에서도 의뢰가 들어왔었고요. 저 좀 도와주세요. 뭐부터 해야 할지 하나도 감을 못잡겠어요.”

“윤여사님! 그냥 사무실로 오세요. 와서 원고 보면서 같이 이야기해요.”



며칠 뒤 조촐한 내 샘플 원고와 주섬주섬 필기도구를 챙기고 노트북까지 들고 사수님 사무실, 정확히 말하면 사수님의 출판사를 찾아갔다. 경기도 남쪽인 집에서 대학로까지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마치 도심 한가운데로 도 닦으러 가는 시골 마을의 수련생처럼 대표님 출판사에 발을 들였다. 그렇게 그날, 저자가 아닌 출판인의 첫걸음을 시작한 거다. 대표님이 따뜻한 커피 한잔을 내주고, 책 한 권을 들고 와서 나와 마주 앉았다. 그러고는 세상 태어나서 책을 처음 보는 아이에게 소개하듯 보여주셨다.

“자… 책에는 표지가 있고요. 여기가 표1, 이렇게 양쪽을 펼치는 책날개가 있어요. 여기는 표2, 표3. 책등과 책입이 있죠. 책에는 면지가 있는데 보통 앞뒤 두 장씩, 즉 8p를 쓰는 게 정석이지만, 요즘은 한 장씩 쓰기도 해요. 책 안에 제목이 들어가는 부분을 표제지라고도 해요 내지는 종이 무게에 따라서… 마지막에 간기면은……”

줄줄줄 책의 하드웨어에 관해 설명하는데 그날 마치 나는 달에서 떨어진 운석을 구경하는 지구인처럼 멀뚱멀뚱 책을 봤다. 심지어 필기를 하나도 못 했다.(도비라, 세네카 등등 이상한 용어도 나와서 알아듣지도 못하고 받아 적지도 못했다. student란 단어를 영어 선생님 앞에서 대놓고 스튜던트라고 쓰기 민망한 것과 흡사하다) 내가 그토록 매일 보는 책, 심지어 저자이기도 했는데 그냥 내 책이 세상에 짠! 하고 나왔을 때, ‘오! 표지가 샤방해. 중간에 간지(면지라는 용어 몰랐음)가 핑크군. 안에 사진이 예쁘게 나왔네.’ 정도만 생각했지 책의 각 명칭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특히 <면지>라는 용어에 갑자기 뭉클함이 일었다. 지금도 당시의 뭉클함의 이유는 모르겠다만 아마 면지는 기껏해야 저자들이 사인하는 색지 정도로 인식했던 나의 무지함이 부끄럽기도 했고, 독자에게 표지에서 본문의 세계로 인도하는 무언의 징검다리 같은 역할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이름을 알고 모르고는 큰 차이가 있다. 독자, 저자였을 때 그냥 ‘예쁜 책'이 출판인이 된 첫날, 책의 세부 이름을 알게 되면서 드디어 내가 정말로 책을 만드는 사람의 영역으로 넘어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미지수 X님, 만나서 반가워요. 앞으로 저랑 친하게 지내시죠.”보다는 “면지야 안녕, 이번에는 차분한 색깔로 책을 잡아줬네”가 더 다정하지 않은가. :)

출판사 책의 표지 대신 면지만 모아서 찍어봤다



여기서 잠깐!
"저자 사인 어디다 해야 할까?"

면지 vs 약표제지

당연히 90% 이상의 저자는 면지에다 사인을 한다. 나 역시 첫 책에서는 그렇게 했다. 그런데 출판계에 아주 오랫동안 몸담았던 에디터 친구가 내가 책에 사인하려는 걸 보더니, 한가지 정보를 알려줬다. 약표제지(겉표지 다음에 책 제목이 나오는 첫 번째 페이지)에다 하라는 것이다. 원래 책 제목이 쓰여있는 약표제지, 표제지는 저자만의 공간이기에 저자 사인을 하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그 누구도 이 자리를 침범할 수 없다 했는데 그 이후로 나는 약표제지에 서명을 한다. 사실 면지보다 약표제지에 사인을 하면 그 페이지만으로 하나의 사인본이 완성되는 기분이다. 이후 우리 출판사의 저자들에게도 저자만의 약표제지를 마음껏 이용하라고 부추겼다.
우리 저자들 착하다. 모두 약속이나 한듯이 약표제지에 사인을 한다 :)



다음 출판 수련(수업 아니라 수련이다) 시간까지 숙제는 완전 원고를 만들어오는 것이었다. 내가 출판사를 시작할 때 사람들이 가장 오해했던 것 중 하나가 내 책을 출판하려고 출판사를 시작했다고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출판사 시작하고 낸 첫 책이 내 책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현재는 이미 5종을 낸 상황이라서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시 내 심정은 저자로는 어느 정도 초보를 떼었지만, 출판은 그야말로 ‘쌩초보’ 이고 출판 관련 직종에서 일해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감히 다른 저자님의 원고로 책을 만들어보겠는가? 그래서 출판인이 되기 위한 이 모든 임상 시험을 내 원고로 직접 해보기로 한 거다. 잘되면 다행이고, 망하면 나 혼자 속상하면 되니까. 내돈내산과 비슷한 상황이랄까? 내 돈으로 수업료 내고 내 원고로 출판 공부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 먹었다.



글을 쓰고 탈고해서 완전 원고를 만들어 오는 것은 온전히 저자의 몫이다. 그런데 원고를 써서 출판사에 턱 넘길 때와는 다르게 내가 직접 책을 만드는 편집자가 돼서야 깨달았다. 내 원고가 엄청 후지다는 것을… ㅠㅠ (사수님! 제가 첫 번째 책에서 죽을죄를 졌습니다. 갑자기 책상 아래에다 멍석을 깔고 대학로를 향해 석고대죄하고 싶어졌다) 브런치에서 그렇게 주목을 받았던 글이었지만 책으로 내려니 중구난방, 엉망진창이었다. 이래서 편집자들이 저자들의 원고를 보면서 머리를 쥐어뜯나 싶었다. 게다가 나는 타인의 원고를 욕할 수도 없이 밤에 저자 입장에서 써놓은 내 글을 아침에 편집자 입장에서 보니 북북 찢고 싶고. 이건 뭐 내 안에 다른 내가 있었나, 지킬(본인은 박사가 아니라서 박사 뺌)과 하이드였나, 저자인 동시에 편집자인 야멸찬 자웅동체 처지를 스스로 원망했다. 그래도 저자 입장보다는 편집자의 마음을 자꾸 심었다.

‘윤지영이라는 형편없는 저자의 글을 윤지영이라는 성실한 편집자가 최선을 다해 출간할 거야.’

(이거 뭐야. 다중인격인가? 써놓고 보니 영화 <파이트 클럽>의 브래드 피트 형이랑 에드워드 노튼 형아가 쌍으로 귀싸대기를 때리고 가겠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원고와의 전쟁을 치르며 마침내 셀프 탈고를 했다.

이제 진짜 책을 만∙들∙어∙야∙한∙다…!!!



이쯤에서 소개하는 아직까지 업계에서 잘 버티고 있는 출판사 홈페이지


매거진의 이전글나는 언제나 뮤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