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 우리 사이의 온도

첫사랑도 아니고 우정도 아닌

by 라니코


누구나 한 번쯤 지나쳐온, 말하지 못했던 그 감정.

썸이라는 말조차 조심스러웠던 사이.

스무 살, 우리 사이의 온도는

그렇게 어중간하게 따뜻했다.


고3 수능이 끝난 겨울,

그녀의 쪽지함에 오랜만에 그의 닉네임이 남았다.

“잘 지내?”

늘 그렇듯 담백한 그의 인사였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심장이 조그맣게 콩닥콩닥 두드려댔다.

어른이 된다는 설렘과 맞물려서일까.


스무 살.

그저 꿈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빛나던 시절이었다.

서툴지만 적극적으로 서로의 하루를 공유하던 그들.

사소한 일정 하나까지 나누며 조금씩 가까워졌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기류,

분명 ‘썸’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였다.


어른을 기다렸던 그녀는,

수능이 끝나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밤늦게 일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가는 불빛 사이,

버스와 나란히 달려오는 오토바이가 눈에 들어왔다.

버스가 멈추고, 그녀가 내리자

그 오토바이 역시 멈춰 섰다.


“드라이브 삼아 바람 좀 쐬고 싶어서.”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는 그녀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밤거리를 달려갔다.

부담 주지 않으려는 그의 태도는 그 후로도 이어졌다.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메시지 속에서,

그녀가 무심코 하는 말들을

그는 결코 가볍게 지나치지 않았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그는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녀가 서서히 잠이 들 때까지,

끝없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대학생활의 시작 앞에서

설렘보다 걱정이 많던 그녀를

그는 따뜻한 응원과 다정한 말들로 감싸주었다.


그의 섬세한 경청과

그녀의 소박한 응답은

서로를 향한 고백 대신,

서툴지만 분명한 마음의 언어였다


그들은

이름 없는 연애,

아니면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계절 같은 관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난 너랑 평생 좋은 친구로 지내고 싶어.”


그의 말은 조심스럽고 따뜻했지만

그녀는 사랑이 아닌 ‘친구’라는 단어로,

그의 진심을 단순하게 해석해 버렸다.

설마 하는 마음과 혹시 하는 기대가 순간 무너지는 기분.

애써 덤덤한 척,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날 밤 그녀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그도 분명 망설였겠지.

쉽게 시작하면, 쉽게 끝날까 봐.

그걸 그때는, 몰랐다.


그리고 며칠 뒤,

다정하게 웃어주던 또 다른 사람의 고백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스무 살의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


밤공기를 가르며 달려오던 오토바이의 소리,

집 앞에 조용히 서 있던 그의 뒷모습,

불빛에 비친 헬멧 아래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끝내 알지 못했다.


밤바다로 향하던 드라이브,

조수석 창문 너머로 스치는 파도의 반짝임.

그 장면들은

그녀의 기억 속에

첫사랑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정도 아닌

묘한 빛깔로 남았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나눈 말,

장난처럼 주고받았던 약속.


“우리… 10년 후 우리가 처음 만났던 8월 16일.

그때도 서로를 기억하고 있다면,

그날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곳에서 만나자. “


그녀는 지금도

그 말을 문득 떠올리곤 한다.


혹시, 그날 그곳에 서 있을 누군가를 상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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