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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복수 Sep 10. 2024

맥주, 퇴근 후 맥주

맥주, 나는 맥주를 즐긴다. 이틀 혹은 사흘에 한번.. 퇴근 후 맥주 한 캔을 잔에 따라 마시는데 이때 하루의 모든 긴장이 시원하게 풀리는 것을 느낀다.


퇴근 후 맥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빈 속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빈속에 술을 마시면 속을 버린다, 빨리 취한다. 심지어 저혈당이 온다 등 여러 가지 말이 많지만 빈속의 술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는다.


나에게 맥주는.. 깔끔하게, 허기진 빈 속이어야만, 함께 먹는 안주가 없어야만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시원하고 청량한 맥주가 입 안에서 전류를 흘리듯 탄산을 쏘며 잠시 머물다 이내 빠르게 목을 타고 식도를 적신 다음 위로 찰방찰방 들어가 쌓인다. 어느덧 위에서 찰랑거리는 맥주가 느껴질 때, 뱃속은 허기가 채워지고, 머릿속은 알싸하고 몽롱하다. 팔다리 힘이 스르르 빠지지만 드디어 내일을 견딜 힘이 생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얼음잔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원하지 않은 맥주는 맛이 없다. 나는 마트 냉장고에서 갓 들고 온 맥주라도 우리 집 냉장고에 다시 한번 잘 숙성시켜 얼음잔으로 담아낸다. 그래야 맛이 있다. 맥주의 본고장이라는 영국의 맥주는 시원하지 않은, 밋밋한 맥주라는데 나는 이를 상상하기 어렵다.


정말 운 좋게도 나는 얼음잔과 맥주의 적정한 온도를 기가 막히게 찾았다. 냉장고 고기칸에 캔 맥주를 넣어두고, 김치냉장고에 잔을 넣어둔다. 퇴근 후 잔과 맥주를 꺼내 1분간 상온에 둔다, 다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맥주의 탄산이 날아가지 않도록 살며시 잔에 굴리면.. 맥주가 담긴 얼음잔에서 맥주얼음이 천천히 떠오른다. 이때 나는 흥분하고, 옆에 있는 아내를 재촉한다. "여보 빨리! 지금이야!"


마지막으로 잔은 쳐야 맛이다. 술을 마실 때, 잔을 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술의 즐거움, 그날의 힘듦을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얇고 가벼운, 흡사 가느다란 여인의 몸매를 띈 와인잔은 서로를 아주 간드러지게, 부드럽게 애무하면서 잔을 맞춘다. 끼 많고, 요염한 여우 같은 여인이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고 길게 미소를 지으며 소리를 낸다.


짧고 뭉툭한, 흡사 조선의 마당쇠 같은 단단하고 우직한, 굵고 짧은 소주잔은 담백하다. 술을 많이 담아 두지도 않고, 서로를 위한 눈빛, 생각, 손짓 하나를 그리 신경 쓰지도 않는다. 강렬한 술은 '탁'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입에 '탁' 하고 털어 넣기 좋다.


맥주잔은 중간이다. 때로는 와인잔 같고 때로는 소주잔 같다. 치킨집, 맥주집에서 주로 즐기는 생맥주는 소주잔을 크게 키워놓은 듯한 용맹스런 잔에서 뭉툭한 남성미를 뿜으며 무겁게 '짠'하며 잔을 치고, 여러 가지 톡톡 튀는 과일향 혹은 진한 홉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수제맥주는 길고 늘씬하지만 조금은 아쉬운 유리잔에서 나름의 여성미를 뽐내며 '짠'을 친다.


나에게 퇴근 후 맥주는, 빈 속에 알싸하게 마시는 맥주, 입 안이 시리도록 시원한 맥주, 그리고 아내와 함께 잔을 치며 마시는 그런 나의 목 넘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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